문학생활과 일상/에세이의 뜨락

꽃사름 벽화 (이은희)

느림보 이방주 2008. 9. 13. 10:51

꽃사슴 벽화

 

 

 

잔잔한 이야기 코너인 '에세이 뜨락'은 지역 수필가들이 1주일에 한 번씩 방문, 삶의 여정에서 건져올린 생각을 수필, 꽁트 등의 형식으로 들려주는 작은 사랑방입니다.

꽃사슴 두 마리가 가풀막진 능선을 오르고 있습니다. 앞선 사슴은 두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니 마치 새처럼 날고 있는 모습이라 할까요. 정녕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양 다급한 형상입니다. 그런데 그 사슴은 소나무 두 그루를 쏜살같이 스쳤지만, 무에 미련이 남는지 고개가 뒤쪽을 향해 있습니다.

꽃사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스쳐온 풍경이 아닙니다. 뒤따라오는 벗(友)을 염려하는 눈빛이었어요. 뒤처진 사슴은 기력이 떨어진 듯싶습니다. 꼬리가 하늘을 향해 있으나, 고개는 땅으로 파고들 듯 푹 꺼져 있고, 다리는 맥이 풀린 양 바닥에 겨우 지탱하는 듯 보였어요. 앞선 사슴의 눈빛은 마치 "조금만 더 힘을 내, 어서 따라와" 뒤처진 사슴에게 그리 말하는 듯싶었습니다. 돌연 자신보다 큰 짐승이 나타나 당황할 친구가 염려돼 애타는 몸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거지요.

   
▲ 이제야 고백하렵니다. 팬에서 방금 건져낸 두릅전을 식기 전에 먹으라며 접시에 담아 내 앞에 놓아주시고, 그 따스한 것이 목으로 넘어갈 즈음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걸 감추느라 애를 썼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이었어요. 당신은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손길과 사유의 창을 열어주셨습니다.

선생님, 눈치를 채셨는지요. 한순간 꽃사슴 벽화에 사로잡혀 다른 풍경은 안중에 들지 않았답니다. 평화로운 풍경이 있는 앞마당과 옹기종기 앉은 장독가에 피어있는 가녀린 매발톱꽃에 눈길을 빼앗겼더라면, 뒤뜰로 가는 측면에 그려진 벽화를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주위에 좋은 풍경을 놔두고 왜 하필 벽면에 그림이냐고, 나의 비약된 상상이라고 말해도 좋아요. 하지만 전 무생물의 벽화에서 생기 넘치는 두 사슴의 무언의 소통인 앞선 사슴의 염려의 눈빛과 따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앞선 사슴의 시선은 줄곧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어요. 선생님 자택에 꽃사슴이 그려진 의미를 캐고 있었답니다. 선생님께 묻고픈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 의미가 퇴색될까 뒤로 미루어 두었죠. 가풀막진 능선에 자라난 나무 몇 그루와 두 마리 꽃사슴의 그림은 지극히 절제된 표현 같았어요. 고개를 뒤로 한 채 달려가는 사슴의 애타는 시선과 기력이 쇠하여 따라가는 또 다른 사슴의 무언의 교류는 내 마음을 단박에 붙들었습니다.

사실 인간사에선 어디 그런가요. 자신의 앞에 놓인 목숨과 이익을 챙기기 위해 급급하지요. 과연 앞선 사슴의 마음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될까요. 그래요. 내가 보기엔 그것을 몸소 실천하고, 당신의 삶을 잘 아는 지인이 벽화로 형상화 시켜놓은 듯싶습니다. 풀이 죽어 네발로 힘겹게 능선을 기어오르는 짐승, 뒤처진 꽃사슴이 냉엄한 현실에 서있는 제 모습 같았지요. 생활이 먼저이기에 직장을 놓지 못하고 어렵게 시작한 글쓰기였지요. 나 같은 현실급급형 까마귀에게는 문인들의 사회는 고고한 학들의 교류의 장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들과 교류할수록 대면하기 어려운 선배들뿐, 자상하게 길을 안내하며 이끌어준 선배는 드물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질 문학의 길이 까마득히 높게만 느껴졌지요.

그런 나에게 아니 후배들에게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신 분도, 작품집을 받고 축하 전화를 해주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다. 그 오름에 앞선 사슴처럼 선생님이 이끌어주고 다독여 주시니 희망이 보입니다. 멀고 험한 노정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 길이 힘겹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오르겠습니다. 힘들다고 오던 길을 허정허정 내려간다면 결국 제자리걸음일겁니다. 끝없는 그 길을 지인들과 정담을 나누며 함께 걸어가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거처인 수랫골에서 수필의 삶을 보았습니다. 당신에게는 참으로 번거로운 일인데 손수 입맛이 절로 도는 담백한 두릅전과 버섯전을 부치고 따스한 밥을 지어주셨죠. 그리고 봄날에 저장해두었던 자목련으로 차를 우려내 물빛 도는 다기에 수차례 부어 주시며, 향기로운 정담을 시절 없이 나누었지요. 동안에 쌓였던 시름은 모두 내려놓고 가라며 친정어머니처럼 등을 토닥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제야 고백하렵니다. 팬에서 방금 건져낸 두릅전을 식기 전에 먹으라며 접시에 담아 내 앞에 놓아주시고, 그 따스한 것이 목으로 넘어갈 즈음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걸 감추느라 애를 썼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맛이었어요. 당신은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손길과 사유의 창을 열어주셨습니다. 아, 이 모든 걸 어찌 한나절의 이루어진 정(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후, 어떤 이들은 선생님의 그림 같은 집과 솜씨가 좋은 음식을 떠올리지만, 난 꽃사슴 벽화와 선생님의 따스한 마음이 먼저 그려집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양 행복했어요. 언제나 내 집처럼 놀러오라는 선생님의 마지막 인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돕니다. 마음결이 출렁여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때 쉼터인양 불쑥 찾아뵈렵니다.

도시의 생활을 줄이고 자연과 벗하며 자연을 닮아가는 선생님, 내내 강녕하소서.
입력 : 2008년 08월 21일 18:03:07 / 수정 : 2008년 08월 21일 18: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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