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축 읽는 아이(나)
물들이기
느림보 이방주
2001. 11. 6. 22:05
참으로 오랜만에 산행다운 산행을 했다. 지난 가야산 산행 때는 때아닌 비가 내려서 절방에 앉아 된장찌개를 얻어 도시락만 먹고 내려오느라 단풍은 구경도 못했었다. 정말 이 가을에는 단풍은 꿈도 꾸지 말아야겠다고 포기하고 있을 때, 친구 연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장산 단풍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어떠냐는 것이다. 좋다. 더구나 차를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내장산은 추억이 있는 산이다. 대학 1학년 때, 우리 친구 다섯이서 떠났다가 같은 학교 1년 선배 여학생 다섯을 만나 그야말로 단풍 빛 추억을 만든 곳이다. 그리고는 실로 30년 만에 친구 내외와 함께 떠나는 것이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과거의 추억이 되살아날 것 같은 기대와 함께 가벼운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버스가 추령이라는 고개에 도착하여 인원 점검과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능선을 올라서서 불출봉과 내장사가 있는 계곡을 내려다보아도, 불출봉이나 내장사로 들어가는 긴 계곡만 기억이 날 뿐 케이블카가 오르내리는 삭도가 늘어진 계곡이나 수려한 계곡에 괴물처럼 들어선 시멘트 건물에 짓눌린 아름다운 추억은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군봉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니 온통 단풍의 천지다. 내장사의 잿빛 지붕이 언뜻언뜻 보이는 숲 사이로 옛 군대 행렬의 깃발처럼 단풍의 붉은 물이 아래로 꿈틀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푸른 나무들 사이로 붉은색, 노랑색, 갈색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극락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내외는 가끔씩 숨을 고르며 산 아래 불타는 단풍의 지경을 내려다 보았지만 친구 내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붉은 색은 단풍나무일 것이다. 단풍나무는 관목과 교목 사이에서 적당히 볕을 받으며, 골짜기 흐르는 물을 나름대로 받아먹으면서 돌틈에 뿌리를 간신히 내리고도 아주 단단하게 자라는 나무다. 단풍나무는 가을 단풍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봄에 새순이 날 때에도 그 어린아이 손바닥 같은 여리고 가냘픔으로 하늘빛을 통할 것 같은 엷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면, 여린 잎을 하늘거리며 하늘에 한 해의 소망을 비는 것 같은 순수를 볼 수 있어서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여름, 교목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짱짱한 햇볕을 은혜처럼 받으며 그 여린 어린 손바닥은 짙푸른 녹음으로 변해 간다. 그게 이 가을에 그렇게 고운 빛으로 물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단풍 나무보다도 더 선혈이 흐르듯 붉은 빛을 내는 것은 개가죽 나무이다. 개가죽 나무 잎은 단풍보다 길고 두텁지만 그렇게 옹골지지는 못하다. 마치 비단에 솜을 놓아 도도록하게 만든 옛날 처녀애들의 댕기처럼 그렇게 포근하면서도 부드럽다. 단풍나무보다 더 붉어서 차라리 징그러울 정도이다. 개가죽 단풍을 한 이파리 따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잎맥을 따라 붉은 물이 흘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에 굵은 잎맥을 따라 붉게 올라가던 물감이 가늘게 갈라지면서 온 이파리에 퍼져서 그렇게 붉게 물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을이 깊어갈수록 개가죽 나무 잎이 안으로 또르르 말려 들어가다가 붉은 색이 갈색으로 변하면 그 화려한 생애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산벚나무는 짙은 초록에서 붉은색으로 물들이기를 하느라, 짙은 보랏빛을 담고 있다가 끄트머리부터 차츰 분홍색으로 변하다가는, 또 노랗게 엷어지는 변화를 보여준다. 진달래는 꽃보다 더 붉은빛으로 그 자잘한 잎사귀들이 물들이기를 하고 있다.
내장사 경내는 온통 단풍 천지였다. 경내에서 일주문으로 빠지는 길 양편에 가로수처럼 들어선 키 큰 단풍들은 붉은 색도 있고, 샛노란 색으로 하늘과 대비를 이루는 것도 있고, 아직도 짙은 초록이 있는가 하면, 물들이기에 실패했는지 그냥 말라 떨어지는 애처로운 놈도 있다.
대체 나무들은 어떻게 살아 왔기에 그렇게 현란한 빛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일까. 아무런 탐욕도 없이 하늘의 뜻대로 볕을 내리면 볕을 받고, 비를 내리면 물을 받으면서, 몸뚱어리를 굵고 단단히 하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씨를 퍼뜨려 종족을 번성하는 일이 사람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나무들 가운데, 아니 같은 단풍나무라도 어떤 놈은 붉게 물들고, 어떤 놈은 샛노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놈은 그냥 그대로 비들 비들 말라 버리는 것도 있듯이 그렇게 모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계절을 중턱을 넘어서는 시점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그렇게 현란한 빛을 낼 수 있는 것인가?
30년 전 백양사에서 내장사로 넘어오던 금선 계곡을 지나 내장사 경내에서 단풍을 보면서, 갑자기 나는 어떤 색깔로 물들이기를 해야할까 하는 생각이 났다. 아니다. 그 생각은 30년 전 여기서 했어야 한다. 나는 이미 물들이기는 끝난 것이 아닐까? 인제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지금, 이미 나는 나의 인생의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과연 어떤 색깔일까? 단풍나무처럼 그렇게 현란한 아름다움을 지녔을까? 단풍나무이면서도 그렇게 노랗게 물들어 있을까? 개가죽 나뭇잎처럼 핏빛으로 제몸을 돌돌 말고 있을까? 아니면, 붉은 빛도 노란빛도 내지 못하고 그냥 갈색 낙엽이 되어 떨어질 준비를 할까? 그 때 그 친구들은 모두 어떤 빛을 내고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 났다. 내가 내고 있는 빛깔의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내 삶이 두려운 것이다.
난 아직 그냥 짙푸른 녹색을 지닌 도톰한 이파리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가을 햇발이 아직도 저렇게 짱짱한데, 아직도 한나절에는 그늘을 찾는 사람들이 저렇게 있는데, 아직도 무서리를 피해 비틀거리며 숲을 찾는 고추잠자리가 남아 있는데, 그들에게 작은 그늘이라도 지워줄 짙푸른 녹음을 지닌 도톰한 이파리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부터 물들이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지난날들을 반성하면서 이제부터 가장 화려한 색깔로 물들이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니 그런 생각은 그대로 또한 탐욕이 아닐까? 푸른색인 채로 말라 떨어지는 그 놈들이 바로 나 같은 탐욕의 화신이 아닐까? 그렇다면, 노랑색이든, 붉은색이든, 아니 그냥 시들어 떨어지는 처절함이라도 그냥 지은 대로 거두리라 생각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 긴 가뭄에도 섬진강 물줄기가 노을에 반짝인다.
(2001. 11. 4)
내장산은 추억이 있는 산이다. 대학 1학년 때, 우리 친구 다섯이서 떠났다가 같은 학교 1년 선배 여학생 다섯을 만나 그야말로 단풍 빛 추억을 만든 곳이다. 그리고는 실로 30년 만에 친구 내외와 함께 떠나는 것이다.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과거의 추억이 되살아날 것 같은 기대와 함께 가벼운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버스가 추령이라는 고개에 도착하여 인원 점검과 안내원의 안내를 받으며 능선을 올라서서 불출봉과 내장사가 있는 계곡을 내려다보아도, 불출봉이나 내장사로 들어가는 긴 계곡만 기억이 날 뿐 케이블카가 오르내리는 삭도가 늘어진 계곡이나 수려한 계곡에 괴물처럼 들어선 시멘트 건물에 짓눌린 아름다운 추억은 되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군봉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보니 온통 단풍의 천지다. 내장사의 잿빛 지붕이 언뜻언뜻 보이는 숲 사이로 옛 군대 행렬의 깃발처럼 단풍의 붉은 물이 아래로 꿈틀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푸른 나무들 사이로 붉은색, 노랑색, 갈색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극락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내외는 가끔씩 숨을 고르며 산 아래 불타는 단풍의 지경을 내려다 보았지만 친구 내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붉은 색은 단풍나무일 것이다. 단풍나무는 관목과 교목 사이에서 적당히 볕을 받으며, 골짜기 흐르는 물을 나름대로 받아먹으면서 돌틈에 뿌리를 간신히 내리고도 아주 단단하게 자라는 나무다. 단풍나무는 가을 단풍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봄에 새순이 날 때에도 그 어린아이 손바닥 같은 여리고 가냘픔으로 하늘빛을 통할 것 같은 엷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면, 여린 잎을 하늘거리며 하늘에 한 해의 소망을 비는 것 같은 순수를 볼 수 있어서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여름, 교목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짱짱한 햇볕을 은혜처럼 받으며 그 여린 어린 손바닥은 짙푸른 녹음으로 변해 간다. 그게 이 가을에 그렇게 고운 빛으로 물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단풍 나무보다도 더 선혈이 흐르듯 붉은 빛을 내는 것은 개가죽 나무이다. 개가죽 나무 잎은 단풍보다 길고 두텁지만 그렇게 옹골지지는 못하다. 마치 비단에 솜을 놓아 도도록하게 만든 옛날 처녀애들의 댕기처럼 그렇게 포근하면서도 부드럽다. 단풍나무보다 더 붉어서 차라리 징그러울 정도이다. 개가죽 단풍을 한 이파리 따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잎맥을 따라 붉은 물이 흘러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음에 굵은 잎맥을 따라 붉게 올라가던 물감이 가늘게 갈라지면서 온 이파리에 퍼져서 그렇게 붉게 물들이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가을이 깊어갈수록 개가죽 나무 잎이 안으로 또르르 말려 들어가다가 붉은 색이 갈색으로 변하면 그 화려한 생애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산벚나무는 짙은 초록에서 붉은색으로 물들이기를 하느라, 짙은 보랏빛을 담고 있다가 끄트머리부터 차츰 분홍색으로 변하다가는, 또 노랗게 엷어지는 변화를 보여준다. 진달래는 꽃보다 더 붉은빛으로 그 자잘한 잎사귀들이 물들이기를 하고 있다.
내장사 경내는 온통 단풍 천지였다. 경내에서 일주문으로 빠지는 길 양편에 가로수처럼 들어선 키 큰 단풍들은 붉은 색도 있고, 샛노란 색으로 하늘과 대비를 이루는 것도 있고, 아직도 짙은 초록이 있는가 하면, 물들이기에 실패했는지 그냥 말라 떨어지는 애처로운 놈도 있다.
대체 나무들은 어떻게 살아 왔기에 그렇게 현란한 빛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일까. 아무런 탐욕도 없이 하늘의 뜻대로 볕을 내리면 볕을 받고, 비를 내리면 물을 받으면서, 몸뚱어리를 굵고 단단히 하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씨를 퍼뜨려 종족을 번성하는 일이 사람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나무들 가운데, 아니 같은 단풍나무라도 어떤 놈은 붉게 물들고, 어떤 놈은 샛노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놈은 그냥 그대로 비들 비들 말라 버리는 것도 있듯이 그렇게 모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계절을 중턱을 넘어서는 시점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그렇게 현란한 빛을 낼 수 있는 것인가?
30년 전 백양사에서 내장사로 넘어오던 금선 계곡을 지나 내장사 경내에서 단풍을 보면서, 갑자기 나는 어떤 색깔로 물들이기를 해야할까 하는 생각이 났다. 아니다. 그 생각은 30년 전 여기서 했어야 한다. 나는 이미 물들이기는 끝난 것이 아닐까? 인제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지금, 이미 나는 나의 인생의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과연 어떤 색깔일까? 단풍나무처럼 그렇게 현란한 아름다움을 지녔을까? 단풍나무이면서도 그렇게 노랗게 물들어 있을까? 개가죽 나뭇잎처럼 핏빛으로 제몸을 돌돌 말고 있을까? 아니면, 붉은 빛도 노란빛도 내지 못하고 그냥 갈색 낙엽이 되어 떨어질 준비를 할까? 그 때 그 친구들은 모두 어떤 빛을 내고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니 참으로 무서운 생각이 났다. 내가 내고 있는 빛깔의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내 삶이 두려운 것이다.
난 아직 그냥 짙푸른 녹색을 지닌 도톰한 이파리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가을 햇발이 아직도 저렇게 짱짱한데, 아직도 한나절에는 그늘을 찾는 사람들이 저렇게 있는데, 아직도 무서리를 피해 비틀거리며 숲을 찾는 고추잠자리가 남아 있는데, 그들에게 작은 그늘이라도 지워줄 짙푸른 녹음을 지닌 도톰한 이파리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이제부터 물들이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지난날들을 반성하면서 이제부터 가장 화려한 색깔로 물들이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니 그런 생각은 그대로 또한 탐욕이 아닐까? 푸른색인 채로 말라 떨어지는 그 놈들이 바로 나 같은 탐욕의 화신이 아닐까? 그렇다면, 노랑색이든, 붉은색이든, 아니 그냥 시들어 떨어지는 처절함이라도 그냥 지은 대로 거두리라 생각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 긴 가뭄에도 섬진강 물줄기가 노을에 반짝인다.
(2001.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