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이방주 2006. 11. 23. 08:06
 

운동장을 돌다가

새벽에 운동장을 두 바퀴 돌았다.

운동장에 비치는 외등의 불빛이 휘황찬란하다. 내려 쏘이는 빛 기둥 속에 아침안개가 자욱하다. 갑자기 이화령이 궁금하다. 이화령의 안개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능개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능개가 되어 그 작은 물 알갱이들이 떼를지어 메마른 얼굴을 촉촉하게 적셔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화령으로

차를 이화령으로 몰았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어제 그대로다. 어제 저녁에 걸어서 올라 왔을 때 어둠 속에 서 있던 그대로다.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그렇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로 표지판도 그냥 그대로 그 자리다. 나처럼 이른 새벽에 올라와 ‘어제 그대로구나’하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을 텐데 그냥 그대로다.

‘미끄럼 추락 위험’

이런 도로 표지판은 눈이 내렸을 때 운전자들에게 얼마나 큰 경각심을 주는가? 그런데 한여름 내내 포장도로에서 되쏘이는 뙤약볕을 그대로 견디면서 미끄러질 까닭이 없는 그 자리에 미련하게 서서 제 철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제철을 말이다. 겨울이 오면 굽이가 잦아 비탈진 이 이화령 고갯길은 정말 미끄러울 것이다. 양지쪽으로 난 길이지만 낮 동안 산비탈의 눈이 녹아 흐르면 밤에는 얼어붙어 나무 밑에 숨은 산적처럼 여기 저기 숨어 있다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약아빠진 사람들이 훌륭한 굴길을 놔두고 누가 이리로 기어 올라오겠는가? 그래도 도로 표지판은 별 말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혹 모르는 사람들의 안전 운행을 위해서 그자리에 그대로 지키고 서 있는 것이다.


629미터 까지 올라가

정상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그러나 능개는 아니다. 가벼운 솜털처럼 여기저기 떼지어 날아다닌다. 예전에 쇠죽 솥에 군불을 지피면서 청솔가지를 넣으면 마당에 연기가 깔려 꼭 이 모양으로 기어 다녔다. 세상은 아직도 깜깜하다. 전조등을 그대로 켜 놓은 채 휴게소 마당에 내려 심호흡을 해본다. 축사가 많은 연풍에서 불어오는 공기와는 맛이 다르다. 이화령 안개는 이렇게 낭만적이고 멋있는데, 세상의 안개는 왜 그리 묘연하기만 한가? 저 주흘산 너머에서 해가 솟아 오르면 이화령 안개도 승천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아득하기만 한 세상의 안개도 걷힐 때가 있을까? 또 내 안의 안개도 따라 걷힐 날이 있을까?


내려오는 길에

마치 무릉도원에 들었다가 나오는 것처럼 떠나는 고갯길이 묘연하다. 20분 머문 동안 혹시 저 아래 세상은 한 20년 쯤 지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지금 저 만한 아이들의 학부모가 되어 나를 맞는 것은 아닐까하는 동화 같은 상상을 해 본다.

안개 속에 다가오는 길가의 소나무들이 멋스럽다. 언뜻언뜻 스쳐 지나가는 소나무들이 모두 가지를 아래로 내리고 있다. 소나무는 밤에만 가지를 내리는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높은 곳에 있는 소나무는 가지를 늘어뜨리고 사는가? 아, 그렇구나. 높은 곳에 사는 소나무가 멋스러운 것은 가지를 내려뜨리기 때문이구나. 세상에 꼿꼿한 것은 멋이 없다. 숙여야 멋스럽다. 하늘을 향하는 듯하면서 땅을 잊지 않는 소나무 가지처럼 그렇게 숙인 것이 아름답다. 사과나무도 가을이 되면 가지를 늘어뜨리고, 기장도 익을수록 모가지를 숙인다. 속담에 '못된 조대가리 빳빳하고, 된 조대가리 숙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높은 곳에 살면서 가지를 내리는 소나무가 멋스럽다.

사람들은 과연 높은 곳에 올라서서도 얼마나 자신을 내릴 줄을 알고 있는가? 나는 높은 곳에 올라 과연 가지를 내리고 살았는가? 나는 지금 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가? 내 안의 가지는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나는 땅을 잊지 않고 있는가? 하늘만 바라보고 달려온 '하늘바라기'는 아닌가? 내가 디디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 디디고 있을 자리를 올곧게 디디고 서서 멋스럽게 가지를 늘이고 가끔 하늘을 바라볼 줄 아는가?


모롱이를 돌아

내려다보니 마을은 온통 금잔화가 핀 것처럼 아름답다. 가까이에 소복하게 모여 이룬 커다란 한 무더기 꽃밭도 볼만하고, 멀리 어두운 기슭에 듬성듬성 피어난 꽃밭도 그림이다. 하얗게 향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다. 연풍의 새벽은 온통 꿈속 같다. 표지판들은 안개 속에 아직도 그대로 서있다. 이제보니 모롱이마다 소나무들도 모두 가지를 그대로 아래로 늘어뜨리고 서 있다. 내 안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오만의 가지는 땅을 찾고, 오만의 가지가 땅에 의지하니,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 있는 안개 속의 소나무들이 내 눈에도 보인다. 나는 그 소나무들의 멋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제 내가 그대로 서 있어야 하는 곳이 어디인가, 그리고 어디를 향하여 가지를 뻗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창가에서 커피를

출근해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창너머로 이화령을 본다. 커피 맛이 진하다. 지난날 내가 '황제의 커피'라 했던 그 오만의 감방에서 인제는 벗어나야 한다. 이제 정말로 그대로 서 있어야 할 곳, 그곳에서 땅을 향하여 가지 늘어뜨리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내가 바라볼 것은 하늘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누가 뭐래도 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둠이 걷힌 이화령은 아직도 안개가 그대로다.

아득하다. 세상처럼 아득하다. 그러나 어둠 걷힌 산줄기는 능선이 뚜렷하다. 해가 솟으면 안개는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안개는 세상을 다시 우리의 품으로 보내 줄 것이다. 이제 모두가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어김없는 제자리를 말이다.

아, 내가 오만을 버린 채 두 팔을 늘어뜨리고 변함없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따끈한 커피는 조금씩 식어가는데 이화령 단풍은 아직도 붉고, 청솔은 아직도 푸르기만 하다.

(2006.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