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장곡사 배롱나무꽃과 잡초

느림보 이방주 2005. 9. 10. 05:19

  8월 21일, 빡빡한 학교 일정 때문에 지독하게 지루했던 여름 방학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서울에서 기현이(막내딸)가 내려왔다. 어렵고 힘든 교육을 끈질기게 마치고 20일 수료한 모습이 대견하다.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 무엇인들 쉽게 이룰 수 있을까마는 아비가 되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항상 미안하다.

 어디든 세상 바람을 구경하게 해 주는 것만이 내 유일한 능력이다. 점심을 먹고 장곡사를 가기로 했다. 사실 아이들은 저들끼리 몰려 놀기를 좋아하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부모를 따라가 주는 것은 저들 입장에서 보면 부모에 대한 배려겠지만, 나는 그냥 내가 아이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고 데리고 떠났다.

 

  장곡사는 충남 청양의 칠갑산 서쪽에 있다. 공주에서 대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들러 보고 싶었으나, 늘 시간이 허용치 않았다. 이렇게 시간을 내서 떠나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할 듯했다.  장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마곡사의 말사이다. 마곡사는 가깝기 때문에 한두 번 순례를 한 적이 있으나 이절은 처음이다. 장곡사는 통일 신라 문성왕 12년(850)에 보조선사(普照禪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서너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절집의 모습으로 보아 최근의 건축 자재도 엿보인다. 이 절은 위 아래로 나뉘어 대웅전이 둘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신비스러웠다. 아래에는 설선당, 운학루, 대웅전, 등이 있고, 위에는 대웅전 등과 응진전이 있다.

 

  대개의 사찰이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생각하여 배치되지만, 장곡사는 주변 산줄기의 용틀임과 더욱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 했다. 설선당을 지나 하대웅전 옆으로 상대웅전으로 이르는 계단길이 있고 계단의 끝에 오르면 바로 왼쪽 산 밑으로 삼성각이 있고,  오른쪽으로 상대웅전이 있다. 상대웅전에서 내려다 본 가람은 산과 어울려 또하나의 자연으로 보였다. 하대웅전을 중심으로 설선당을 비롯한 절집들이  엎드린 듯 조용하다. 좌우로 감싸 안은 청룡과 백호가 조산(祖山)인 칠갑산을 삼킬듯이 기어 오르고,  꼬리는 가까운 수구(水口)를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흐르게 하고 있다. 그 꼬리 끝으로 멀리 보이는 산 봉우리가 조산(朝山)으로 바라보인다.  다만 절 앞으로 칠갑산 등산로만이 산에 칼질을 해놓은 것처럼 보기 흉했다. 이것은 후세에 훼손된 것으로 생각된다.

상대웅전에서 내려다본 가람배치, 바로 아래 건물이 하대웅전, 하대웅전과 평행으로 범종각,

 

  하대웅전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대웅전이나 상대웅전이나 현판이 그냥 대웅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건립 당시부터 두 대웅전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하대웅전은 맞배지붕이고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이다.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평방을 두른 것이 다른 절집과 많이 다르다. 여느 절집과 다름없이 앞면은 모두 문이다. 거뭇거뭇 세월의 옷을 입은 석축이 천년 역사를 말해 주고, 그 아래 부처님이 내려주시는 것 같은 샘물이 새삼 자비를 느끼게 한다. 상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 양편이나 절집 주변의 우거진 잡초나 돌계단 틈으로 비집고 올라온 잡초만이 우리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이 절의 스님들은 잡초 하나도 고귀한 생명으로 보시는 모양이다. 항상 단아하고 정갈함을 잃지 않으려는 듯한 보살사 종산 스님의 부지런하심과 장곡사 스님의 자애가 각각 다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계단 옆 잡초를 뚫고 올라와 피어난 옥잠화, 원추리, 상사화, 난꽃이 청초하다.

 


하대웅전, 앞에서 본 모습
 

  설선당(說禪堂)은 하대웅전 바로 옆에 있다. 얼른 보이는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인 듯했다. 안내판에는 조선 중기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마루에 배가 많이 나와 풍골 좋으신 스님이 한 분 앉아 계셨다.

  처음 지은 건물을 변형하여 서너칸의 승방을 덧붙여 ㄱ자집 형태로 변경된 듯하다. 앞면에 편액 ‘說禪堂’이 걸려 있어 선실(禪室)인 동시에 승방임을 알 수 있다. 처마와 기둥에 덧붙여 밖으로 튀어나온 쇠서(소의 혀 모양의 장식)의 곡선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졌다.

  설선당은 건축에 문외한인 우리가 보아도 당시에는 매우 소박하면선도 아름답게 공들여 지은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밤을 새워 참선에 든 스님께서 새벽에 마루에 나와 달을 바라보며 우주의 원리를 고민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니면 세상과 가까이 민중의 속으로 돌아와 부채질하면서 삶은 감자 껍질이라도 벗기는 소박한 스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說禪堂
 

  상대웅전은 고려시대에 재건되고 조선 후기에 개건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앞뒤 처마 밑에 받친 공포(栱包)는 구조상 다포집 계통의 수법을 따르고 있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방(昌枋) 위에는 평방(平枋)을 두지 않았으며, 4개의 종량(宗樑)과 건물의 좌우 박공(牔栱)에 배치된 2개의 대량(大樑)은 구재목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건물 내부 바닥에 전(塼)을 깔았으며 그 중에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8판(八瓣) 연화무늬를 새긴 전이 섞여 있다. 이것으로 보아 상대웅전도 통일 신라때 창건되어 고려 조선을 거쳐 몇 차례 중수된 것으로 짐작된다.

 

  상대웅전 마당도 장마에 패어나간 자국이 그대로 있고, 뜰의 잡초도 다듬지 않아 좀 스산해 보였다. 그런 잡초 속에서도 수국이 피고 배롱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오래된 감나무 고목에도 젊은 가지가 돋아 파란 열매가 맺혀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그늘을 지우고 있다. 고고하게 잘 생긴 느티나무나, 화사한 배롱나무꽃이나, 밝고 청초한 옥잠화나, 무성하게 뻗어가는 바랭이나 다 함께 부처님의 자비의 품 속에 있는 중생이라 생각하면 '잡초'란 이름이 얼마나 억울하고 불공평하겠는가? 그런 이름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우상이라는 아집에 사로잡혀 함부로 지어 놓은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견강부회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이 절에서는 '잡초'가 존재하지않는 평화를 실현한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웅전  옆에서 본 모습, 옆으로 응진전

 

  상대웅전에는 철조여래죄상,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철조약사여래좌상이 서으로부터 차례로 모셔져 있다. 대개의 사찰에서 대좌를 만들고 하나의 대좌 위에 삼위의 불상을 나란히 모시는데 비해 여기는 대좌위에 따로따로 한 위의 불상을 모신 것이 특이하다.
 

  금동약사여래 좌상은 나발(螺髮) 아래 타원형의 긴 상호는 우아하며 알맞게 살찐데다 눈·코·입이 적당히 표현되어 한결 부드럽게 보인다. 결가부좌하였고 상반신이 늘씬하며 몸 전체에 율동감이 넘쳐흐른다. 왼손에 약호(藥壺)를 들고 있으며 바른손은 가슴에 들어 엄지와 중지(中指)를 맞대고 있으며 손톱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도 역시 상호가 좁고 턱으로 내려올수록 가늘어져 삼각형의 얼굴이 되었다. 눈은 바로 떴으며 작은 코, 다문 입들은 수척한 삼각형의 얼굴과 함께 무척 빈약해 보인다. 어깨는 넓지만 결코 당당한 것이 아니며 매우 부자연스럽다. 수척하고 평범한 얼굴, 부자연스러운 자세, 지권인(智拳印), 간략한 옷무늬 처리, 바른쪽이 허술하게 처리되었다. 이 대좌는 본시 이 불상의 대좌가 아니라 석등(石燈)의 대좌인데 후대에 이 불상의 대좌가 되었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올려다 본 숲 속에 든 듯한 상대웅전

 

 상대웅전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샘물이 있었다. 산에서 돌틈과 흙덩이 사이를 뚫고 한 방울씩 졸졸 떨어지는 소중하게 모아 음료로 사용하고 있었다. 산은 온통 숲으로 우거지고 나무들은 향내를 내품고 있다. 절의 마당이나 뜰에는 배롱나무꽃이 붉게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절에 이렇게 화려하고 고고한 꽃을 피우는 까닭은 알 수가 없다. 월인석보를 읽으면 옛 불자들이 세존에게 헌화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부처님은 꽃을 참으로 좋아했는가 보다. 

 

  옥잠화는 배롱나무꽃과 다르다. 배롱나무는 곡예를 하는듯이 자라나는 나뭇가지도 아름답고 꽃이 매달리는 발그레한 새 가지도 곱다. 배롱나무는 나뭇잎도 다른 것보다 윤이 반짝반짝 나는 것이 색다르다. 나뭇잎을 따서 들고 가만히 보면 봄부터 잎맥마다 붉은 물을 품고 있다.이에 비하면 옥잠화는 별로 우아하지도 못한 꽃대에서 백합 같은 봉오리가 나와서 말할수없이 우아한 꽃이 핀다. 진흙에서 물을 뚫고 하늘을 향하여 피어나는 연꽃과 다름없다. 불법이 역설적 사고로써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그건 바로 옥잠화나 연꽃이나 다를것이 없다.                                      

  말할 수 없이 희게 피어난 옥잠화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상사화나 원추리처럼 곱게 피어나지 않았으면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음에 감탄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는 이런 꽃들과 함께 스님들에게 만큼은 버림 받지 않은 장곡사 잡초들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자연 속에는 아름다운 꽃보다 잡초가 더 많다. 이것은 마치 선택된 인생보다 잡초처럼 팽개쳐진 민중이 더 많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제도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할 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잡초라는 사실에 새삼 놀랍다.

 

  우리가 내려 온 길은 일주문에서 하대웅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상대웅전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이었다. 상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마치 극락에 오르는 길처럼 아름답다. 아미타의 세계가 이렇게 간단히 오를 수 있는 길이 아님은 잘안다. 그러나 그 계단에 올라 서서 웃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까다로운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저렇게 살면 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요원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그냥 잡초와 같은 중생이지만 배롱나무꽃이 화사하게 피어나 백일을 견디듯, 그렇게 화려하지 못한 꽃대에서 순백의 지순을 피워내는 옥잠화처럼 그렇게 피어날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돌아오는 길 딸아이가 찍은  배롱나무꽃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유난히도 붉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웅전 앞에서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내 앞에서는 늘 당당한 내 모습이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