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사랑의 방(가족)

모롱이를 도는 노래 소리

느림보 이방주 2000. 9. 23. 20:07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 아니 어제 밤부터 내렸다. 아랫녘에는 식수까지 걱정하다가 해갈이 되었다고 방송에서도 야단법석이다. 아무튼 시원해서 좋다.
밤이다. 비나리는 밤이다. 결전의 날을 꼭 일주일 앞둔 아이들을 한바퀴 돌아보고 와 빗방울이 듣는 밖을 내다본다. 유리창 턱에 배달도시락 상자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반쯤 남긴 것, 아예 건드리지도 않은 도시락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나는 6km 쯤 되는 학교를 걸어 다녔다. 고 3 때는 아침 7시 40분에 첫 시간 수업이 시작되어 밤 10시 50분에 끝이 났다. 어머니는 도시락을 두 개 준비해 주시는 걸 생각지 못하셨다. 나도 그런 생각은 아예 못하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랬다. 그래서 공부가 모두 끝나면 이튿날 1시가 되어서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한 밤 중 내가 집에 돌아가면, 막내아들을 위하여 국을 덥히고 밥을 데워서 저녁을 차리시느라고 육순을 맞으신 어머니께서 잠을 설치셨다. 철없던 나도 한없이 안쓰럽고 괴로웠다. 그래서 내 방에 저녁상을 보아 놓고 밥은 이불 밑에 묻어 두시고 일찍 주무시도록 말씀드렸더니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몰라"
하시며 좋아 하셨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삼키던 경술년 생이신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입시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공부라는 것이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시는 어른이셨다. 그저 배부르고 따뜻하게 먹이기만 하면 대학은 가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그러나, 여덟 자식 키우시느라고 항상 찌적찌적 눈시울이 마를 날이 없으셨던 우리 어머니가 지금도 자랑스럽다. 그 후부터 어머니는 상을 차려다 놓고, 밥을 아랫목에 묻어 두시고는 주무시지 않으시고 나를 기다리셨다. 창호지로 바른 옛날 문에 붙인 손바닥만한 유리창을 내다보며 산모롱이에서 나의 노래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리셨을 것이다. 청룡과 백호가 안을 듯이 에워싼 골짜기 안 산자락 명당에 자리잡은 고향집을 가려면 지금도 숲이 우거진 모롱이를 세 개쯤 돌아야 한다. 늑대가 나오기도 했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나서 나는 모롱이를 돌 때마다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곤 했다. 가을이 오면 이른 저녁을 드시고 막내를 기다리시느라고 졸음을 참으며 아랫목에 묻어 둔 밥사발을 몇 번이나 만지며 애태우셨을 것을 생각하면, 성인이 천명을 헤아렸다던 나이를 바라보는 이제사 코가 시큰하다. 나는 반짝반짝 호롱불 빛이 보이는 마지막 모롱이를 돌 때면 더욱 큰 소리를 질러 댔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마루에 나선 어머니께서
"막내냐? 얼렁 와. 배가 얼마나 고퍼. 아이구 딱하지."
하시며 언제나 막내의 배고픔을 걱정하셨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정월 어머니께서 회갑을 맞으신 날 나는 대학에 합격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회갑을 맞으시고 대학에 합격한 막내아들을 두신 어머니를 부러워했지만, 당신께서는 그냥 덤덤해 하셨다. 철없는 나는 지방 대학밖에 그것도 2 년 짜리 교육대학밖에 다닐 수 없는 신세와 가난한 어머니를 원망하며 그날도 투정을 부렸다.
교육대학 2년을 마치고 선생이 되어 객지 생활을 하였다. 객지에 나가는 나를 두고 어머니는 또 먹는 걸 걱정하셨다. 나의 초임지인 의풍학교는 워낙 벽지라서 바로 집에 오지 못하고, 3 개월만에 연휴를 맞이해서 겨우 집에 다녀 갈 수 있었다. 컴컴한 새벽에 출발했건만 세 시간을 걸어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밤 10시가 넘어야 외딴집 호롱불이 가늘게 보이는 모롱이를 돌 수가 있었다. 나는 고3 때처럼 소리를 질러 노래를 불렀다. 마지막 모롱이를 돌 때 더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문이 열리고 기침 소리가 나고는,
"누구여, 막내냐? 노래가 막내 소린디."
"엄마, 나여 나란 말유"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었다. 절 받을 새도 없이 어머니는 상을 차려 오시더니 옛날처럼 아랫목에서 밥주발을 꺼내셨다. 구들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진 따뜻한 밥, 그건 구들의 온기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랑의 온기였다.
그 후에도 언제나 갑자기 집에 가게 되고, 갈 때마다 밤이었다. 그 때마다 어머니는 아랫목에서 따뜻한 밥을 꺼내 주셨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지만, 그런 일이 계속되자 나는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믿어지지 않아서 여쭈어 보았다.
"그래야 객지에서도 굶덜 않지."
나의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자식을 위해서는 하루 한 끼씩은 찬밥을 오히려 달게 드신 분이셨다. 고향 골짜기에서 자란 여덟 강줄기를 모두 객지로 내보내시고, 저녁마다 가물거리는 호롱불아래서 위로부터 막내까지 하나하나 건너기를 거듭하시다가 새벽을 맞으실 분이셨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그러나 아무리 가슴이 저리고 눈물을 백 사발 천 사발 흘린다 해도 마지막 줄기를 한 번 더 돌아보셨을 어머니의 마음을 알기나 할 것인가? 세상에 어느 자식이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성인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찬밥 잡수시는게 안쓰러워 그러시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들으실 분이 아니셨다. '남의 손 쌀밥이 내 손 보리밥만 하랴'하고 당신께서 손수 챙겨 주시는 끼니만 마음이 놓이셨던 그 사랑이 가슴을 덥게 한다.
인제 어머니께서 객지로 떠나셨다. 막내를 위해 찬밥을 달게 드셨던 어머니는 한 달이 넘게 죽만 드시다가, 열흘은 미음만 겨우 넘기시더니, 또 열흘은 맹물만 겨우 받으시고, 한 이레쯤은 혼수상태에서 맹물조차 못 받으시고 포도당으로 연명하시다가 이른 새벽 먼길을 떠나셨다. 자식들 걱정에 마지막 양식을 남기시느라고 그 고생을 하신 것이려니 생각하면 가슴을 저미는 듯하다.
어머니께서 저승 고개를 넘나드시던 그해 가을, 아버님과 숙부를 졸라 우리 아파트가 보이는 언덕에, 아니 고향집에 가려면 돌아야 하는 모롱이가 모두 보이는 언덕에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그 객지에 계신다. 아니,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객지인지도 모른다. 비나리는 오늘 같은 날은 유리창 너머로 막내의 노래 소리를 기다리실 지도 모를 일이다. 따뜻한 아랫목에 밥을 묻어 두시고 몇 번이나 꺼내 보시면서 말이다. 아니, 이제는 내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가 아닌가?
오늘밤, 고 3 때 듣던 눈물 섞인 그 목소리가 들린다.
"막내야, 얼렁 와. 얼마나 배가 고퍼 그래. 딱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