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이방주 2025. 7. 18. 20:49

유리와 투명

 

그제 밤부터 어제까지 큰비가 내렸다. 비가 잠시 그쳤기에 새벽에 산책을 나갔다. 아침 시간이 바빠서 간단한 체조를 하고 겨우 아파트 정원 한 바퀴 걷는 것이 아침 산책이다. 바람이 많이 불어 나뭇잎이 흩날려 구석구석 쌓였다.

체조를 하고나서 하늘을 보았다. 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구름이 솜처럼 하얗게 부풀어 올랐다. 정원에 난 짧은 오솔길을 걸었다. 오솔길 끝에 쉼터가 있고 나무 데크 가장자리에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서 난간을 만들어 놓았다. 밑에서 50cm 정도는 콘크리트로 성첩처럼 쌓고 그 위에 아래층 정원이 보이도록 투명한 유리로 사람들 키 높이에 맞추어 마감했다. 투명해서 답답하지 않으면서 안전을 배려한 설계이다.

거기서 딱한 주검을 보았다. 비둘기도 아니고 콩새도 아니다. 며칠 전에 처음 본 후두티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어이없이 죽은 생명이 안타깝다. 지난밤 큰비가 마구 쏟아질 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허둥대다가 유리벽에 부딪힌 것은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유리가 투명하여 저쪽이 훤히 보이니 거침없이 날다가 머리를 부딪쳤을 것이다. 투명이 죽음을 부른 것이다. 말하자면 믿었던 투명에게 속은 것이다. 새는 죽어 어둠의 세계로 갔다. 투명한 유리, 유리의 투명함이 사람들에게는 보호벽인데 새들에게는 죽음의 벽이고 어둠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15, 6년 전 백두대간 신선암봉에 오른 적이 있다. 일행은 친구 내외와 우리 내외 넷뿐이었다. 바위벽을 만났다. 높이는 한 30m쯤 되고 기울기도 60도나 되어서 두렵고 난감했다. 바위벽 아래 절벽을 간신히 기어올라 반 평도 안 되는 난간에서 서서 올라갈 길을 가늠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다행히 생명 줄처럼 낡은 밧줄이 매어 있었다. 플라스틱 밧줄은 비를 맞고 볕을 받아 하얗게 보푸라기가 피어 있었다. 세 사람이 무사히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이다. 밧줄을 잡는데 이상하게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간다. 유격훈련 때를 생각하며 바위벽과 몸을 수직으로 서서 밧줄을 잡고 20m쯤 잘 올라갔는데 갑자기 밧줄이 ‘툭’ 끊어졌다. 반 평쯤 되는 난간 아래는 그냥 절벽이다. 절벽은 곧 죽음이다. 짧은 순간 나는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쳐서 내팽개쳐졌다. 이렇게 죽는구나. 그 순간, 출발점에 서 있던 작은 소나무가 나를 붙잡아 세웠다. 배낭이 소나무 가지에 걸린 것이다. 소나무에 매달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소나무가 없었으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오늘의 새가 되었을 것이다. 절벽 위에 있는 세 사람은 하얗게 질려 있었으나 나는 ‘히히’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밧줄을 버리고 바위벽을 짚으며 기어서 올라가는 게 더 안전했다. 믿었던 밧줄이 내게는 새처럼 투명 유리가 되었다.

유리는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생명 줄이 될 수도 있다. 사람에게도 죽음이 있다. 새처럼 어이없는 죽음이 있다. 사람에게도 유리가 있고 투명이 있다. 투명은 밝음으로 우리에게 내려지기도 하고 어둠으로 내려지기도 한다. 유리가 주검을 만드는 것도 투명이 어둠을 부르는 것도 우연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삶의 길에는 우리 뜻대로 규정할 수 없는 유리도 있고 투명도 있다.

(2025. 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