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이방주 2025. 7. 7. 12:51

복권

 

오랜만에 복권을 샀다. 아니 기억에도 없으니 처음일 수도 있다. 저녁에 마을길을 산책할 때 복권가게 앞이 북적이는 것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결국 나도 샀다. 그런데 꽝이다. 기다란 줄 뒤에 서서 기다려서 샀는데 허사다. 나는 받을 복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헛돈을 쓰는 것 같아 딱 두 장만 사기를 잘했다. 하긴 고것밖에 안되는 그릇인데 어찌 큰 복을 받아 담겠나.

꿈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변의를 느꼈는데 참고 참다가 그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해버렸다. 속이 후련하고 아랫배가 시원했다. 그런데 완전히 황금빛이다. 되직하지도 않고 질척하지도 않으면서 빛나는 황금이 천천히 굳어가는 중이었다. 하나도 창피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찬란한 빛깔이 자랑스러웠다. 꿈을 깼는데도 기억이 새뜻하고 생각할수록 소중했다. 돈 나올 꿈이다. 복권을 사자.

좋은 꿈을 꾸고 나면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 꿈의 구조로 잘 짜인 고소설 구운몽에서도 꿈꾸기 전, 꿈속, 꿈 깬 후의 주인공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꿈꾸기 전의 주인공 성진은 꿈속에서 양소유이었다가 꿈을 깬 후에 다시 성진으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성진이 아니다. 성진이란 말이 불가의 해석대로 견성을 의미한다면 주인공은 꿈속에서 진리를 보고 꿈을 깬 후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이다. 그럼 나도 꿈에 황금을 낳았으니 뭔가 새로워져야 한다. 그건 복권밖에 없다.

아내와 좌구산 바람소리길을 걸으며 꿈 얘기를 했다. 그리고는 복권을 사볼까 눈치를 봤다.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복권 살 마련을 하고 있었다. 살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복을 받은 다음에 쓸 곳까지 미리 머릿속에 지출계획표를 마련했다. 대충 복금이 20억 원쯤이나 된다는데 그렇게 큰돈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머리가 심하게 복잡해졌다. 우선 13년이나 된 차를 바꾸어야겠다. 그런데 20만 킬로나 탔는데도 아무 까탈을 부리지 않는다. 그래도 GV로 시작하는 멋진 SUV차로 바꾸자. 다음에는 누구에게 얼마를 줄까 리스트를 작성했다. 평소 왕창 용돈을 지르고 싶은 피붙이들이 다 드러났다. 아끼는 문학회에 기금을 충분히 내 놓아서 회장이나 사무국장이 문예진흥기금에 굴굴대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자. 계산은 끝났다. 이제 복권을 사기만 하면 된다.

바람소리길에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서늘했다. 매미가 마구 울어댄다. ‘메엠 메~엠 메~~~엠’하더니 ‘메롱 메~롱 메~~~롱’하는 것처럼 들린다. 아내에게 ‘복권을 살까’하고 말해 보았다. ‘그래요. 사 봐요. 복권 사는 것도 복을 짓는 일이니까요.’ 가볍게 말한다. 복을 짓는다니 무슨 말인가.  한 순간에 SUV의 꿈이 날아간다. 바람까지 ‘휘~익’ 불어 씻어간다. 머리가 서늘하다. 나는 20억 꿈을 꾸는데, 아직도 그 꿈속에서 빙글빙글 웃으며 지출할 전표를 점검하고 있는데 복을 짓는 일이라 한다.  "복권이 꽝이면 그만큼 돈이 나가는데 무슨 말여"  "콩 한 되 심으면 콩 한 되박 손해인가요?" 어, 콩이 달리겠지. 말이 되잖아.

저녁에 당첨 번호를 확인해보니 진짜 복을 짓고 말았다. 모두 꽝이다. 아내 말이 맞다. 복은 심는 것이지 심지도 않은 복의 열매를 따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직 나는 꿈속이다. 황금덩이가 된 내 분신이 어른어른하더니 SUV가 되어 달려든다. 심을 줄 모르고 받을 줄만 아는 내 복 마당은 큰 복이 내리기에는 너무나 비좁다.

 

(2025.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