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68-이방주 <광장이 일류가 되는 날>

느림보 이방주 2025. 6. 24. 15:04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68-이방주

노혜숙 적막이 풍경이 될 때 -에세이문학 2025년 봄호

 

광장이 일류가 되는 날

 

이방주

 


우리는 ‘적막(寂寞)’이라는 내면의 공간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적막은 고요하고 쓸쓸할 것 같지만, 오히려 번뇌를 내려놓고 진정한 자아를 마주하여 본질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며 공간이다. 접신(接神)하여 존재에 접근하듯 절대적 고독감을 느낄 수 있다.

노혜숙은 그의 작품 <적막이 풍경이 될 때>(에세이문학 2025년 봄호:169호 게재)를 통하여 자신이 체험한 적막을 고백한다. 본연의 비어있는 상태인 적막에 ‘풍경처럼 펼쳐진 상념’에서 ‘그늘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그늘이 맑은 물길로 흘러가길 바라는 욕심을 갖는다. 그러한 상념은 절대적 고독에서 자아의 참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삶에 역동성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된다. 이때 적막은 풍경으로 반전된다.

자아의 참존재를 늙은 소나무나 예쁜꼬마선충으로 구체화했다. 자아의 상념에 그늘의 흔적이 있듯, 소나무는 설해를 입어 찢어진 가지가 있고, 예쁜 꼬마 선충은 동면 상태에서 번데기로 주저앉는 두려움을 갖는다. 여기에서 ‘생은 대부분 견디는 것’이라는 이순의 깨달음을 얻는다. 자연의 생명체는 청소년의 방황과 철드는 과정, 그리고 생식을 위한 투쟁이라는 절대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존재의 원형적 본질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사실로 유추하여 표현하였다.

작가는 광장에서 연일 깃발을 들고 투쟁하는 역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좌든 우든 ‘칼바람 속에서 맨바닥에 앉아’ 나름의 정의를 외치며 살아내기를 하는 현실을 보았다. 자아가 성찰한 내면의 그늘이 시대의 현실로 확장된 것이다. 이처럼 수필은 내면의 성찰에서 삶의 환경이나 시대적 현실로 대상이 확장되고 보편화되는 데에서 장르적 우수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호랑나비 우화(羽化)를 떠올리면서 그늘의 흔적을 반전시킨다. 호랑나비는 알, 애벌레, 성충의 순환에서 자칫 번데기로 낙오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우화하여 기둥 끝으로 날아오를 목적을 갖는다. 이것은 광장에서 고민하는 인류의 모습으로 환치된다. 우화는 인류가 보편적 정의로 나아가는 역동적 에너지가 된다.

광장에서 부르짖는 나름의 정의를 생각해본다.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이 말씀은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준 가르침이다. 작가는 광장에서 펼쳐지는 시대에 대한 아픈 깃발을 바라보면서 역사를 걱정한다. ‘인간은 소나무의 결기, 미생물의 생존 전략’보다 진화된 공감 능력이 있으므로 안타까운 광장의 아픔도 ‘인류(人類)가 일류(一流)’가 되게 하는 동력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 작품은 상상과 사유를 단계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적막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상관물에 빗대어 구체화하여 표현하는 기법도 눈에 뜨인다. 적막이라는 상념의 그늘이 일류로 우화하여 풍경이 되는 원형적 원리를 발견한 작품이다. 수필문학에서 이러한 깨달음은 작가나 독자를 변환과 성숙으로 이끌어가는 역동적 에너지가 될 것이다.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2644

적막이 풍경이 될 때

 

노혜숙

 

적막이 풍경이 될 때가 있다. 침잠해 있던 내 안의 상념들이 적막의 한 모퉁이를 허물고 수런거린다. 풍경처럼 펼쳐진 상념의 언저리엔 그늘의 흔적이 농후하다. 어떤 상념은 오래 뒤척이며 떠나지 못한다. 쉽게 고요해지긴 어려울 듯싶다. 그런 중에도 떠도는 상념들을 사로잡아 맑은 생각의 물길로 흘러가길 바라는 욕심을 놓지 못한다.

새벽꿈처럼 오락가락하는 상념의 파노라마 속에서 늙은 소나무와 조우한다. 엊그제 산길을 걷다 만난 소나무다. 두 개의 중심 가지 중 한쪽이 찢겨진 형태로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지난번 내린 폭설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나 보다. 허옇게 드러난 속살에서 나무가 생으로 찢어지며 겪었을 고통이 헤아려졌다. 견디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무의 처지에 마음이 시렸다. 생의 대부분이 견디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이순(耳順)의 깨달음과 공명했기 때문일까. 죄 없이 몸의 반쪽을 잃고도 나무는 비관의 기미 없이 의연했다.

견디는 일은 모든 생명체의 숙명일까. 극적인 상황을 살아내는 ‘예쁜꼬마선충’의 다큐가 소나무와 오버랩 된다. ‘예쁜꼬마선충’은 길이 1mm의 미생물이다. 현미경이 아니면 그 실체를 자세히 보기 어렵다. 그들에게도 생로병사가 있고 생식을 위한 투쟁이 있다. 청소년기의 방황과 어른이 되어 철드는 과정도 사람과 비슷하게 겪는다. 녀석은 인간 유전자의 30%를 닮은 신경회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냄새로 개체의 밀도를 파악하고 밀도가 높으면 다른 존재의 몸에 얹혀 이동한다. 치열한 경쟁을 피해 먹고 살기 수월한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도 저도 어찌 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에선 성장을 멈추고 생식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다. 아예 입을 막아 목구멍으로 먹이가 넘어가지 않게 한다. 죽은 듯 동면 상태로 여섯 달 동안 목숨을 이어간다. 그들의 평균 수명이 한 달인 것을 감안할 때 엄청나게 긴 연장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의 고육지책이 매일 먹는 한 끼 밥과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낸 하루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살아내는 것은 선충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절대 명제다. 근래 날마다 깃발을 들고 광장에 선 이들의 외침 속에도 그 명제는 뜨겁게 살아 있다. 좌(左)든 우(右)든 칼바람 속 맨바닥에 앉아 나름의 정의를 외치는 저 목소리들 역시 생존 투쟁의 한 방식이리라. 어떤 말은 상대의 목을 겨누고 어떤 말은 교활하게 어부지리를 노린다. 공존을 모색하기 위한 고뇌의 말은 들릴 듯 말 듯 미약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게든 되겠지,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말도 있다. 그 모든 소리 중 압도적인 건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한 높은 양반들의 말이다. 모양과 각이 다른 성난 말들을 어떻게 수렴하고 조화롭게 할 것인지 정말 난감해 보인다.

내 목소리는 어떤 모양과 각을 가지고 있을까 생각하다 문득 호랑나비 애벌레 우화를 떠올린다. 하늘까지 닿은 유일한 기둥에 오르기 위해 밟히고 밟으며 기어가는 애벌레. 마침내 도달한 기둥 끝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세상엔 또 다른 기둥들이 있었지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애벌레. 기둥 끝에 도달하기 위해선 기어 갈 것이 아니라 날아서 가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지만 번데기가 되는 시간이 두려워 망설이는 애벌레. 그 우화는 오직 하나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자화상을 닮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소시민의 안이하고 나태한 삶 속에서 자기 목소리는 내 본 적도 없이 습관적 반성 뒤에 숨어 살아온 건 아닌지.

상념의 여울을 징검징검 건너다 해묵은 질문 앞에 마주 선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이 미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에 수많은 사람들의 번뇌와 공부가 있었으리라. 전문성이 겹치는 영역에서까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과 교양을 가지고 있으면 답을 찾는 일이 수월할까. 답을 찾았다 한들 그 깨달음을 실천할 정도의 지성과 도덕성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깨달음 없는 열정은 위험하고 결단 없는 깨우침은 무의미하다던가. 종종 권력을 가진 이의 무모한 결단으로 세상이 황폐된 역사를 떠올린다면 한 개인의 선택과 결단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사유가 필요한지 알 것 같다.

방황과 고뇌가 불완전한 인간의 숙명이라면 지금 저 광장의 날선 함성도 아름다운 하모니를 위한 과정이라고 희망을 가져도 될까. 밟히고 밟으며 올라가다 추락해본 사람만이 자신의 진면목과 대면할 수 있고 호랑나비 애벌레처럼 번데기의 시간을 거치면서 마침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리라. 그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일은 인생에 바치는 제물인지 모른다. 저 광장의 다양한 말들이 서로 피 흘리지 않고 언젠가 이 땅을 일으켜 세우는 서사로 완결될 수 있기를 꿈꾼다. 인간은 소나무의 결기, 미생물의 생존전략에 더해 공감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믿기 때문이다. 공감이야말로 인류(人類)가 일류(一流) 되게 한 동력 아니겠는가.

동토에 유예된 봄꿈을 불러내는 일은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적막 속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내 안의 상념들이 모서리를 지우고 가지런해진다. 비로소 그늘진 적막의 한 모퉁이가 둥글게 환하다.

 

 

 

약력

2006년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그늘의 독법》 외 5권

수상: 황의순문학상, 에세이포레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한국산문문학상 외

활동: 전) 좋은수필 편집장, 현) 수필과비평작가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