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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세이와 한국의 수필

느림보 이방주 2025. 4. 19. 14:23

수필미학 여름호 권두언

K-에세이와 한국의 수필

 

한국의 전통수필이 2020년대에 이르러 ‘k-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문단에 새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는 한국 수필의 맛을 세계가 먼저 알아본 것이다.

지난 3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2025년 아르코문학작가펠로우십 지원사업 공모 결과를 발표했다. 기존의 아르코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을 대폭 수정하여 공모하고 지원대상자를 선정 발표한 것이다. 종전에 원고를 심사하여 작품집 발간비를 지원하던 방식과 달리 문학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진 작가를 집중 지원하기로 하고 종전의 2배 정도의 활동비를 배정하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작가들의 그간 업적을 바탕으로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 입체적인 활동을 하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그간의 활동 실적을 평가하였으며, 그 실적에 따라 선정된 이후 펼치게 될 활동의 성과와 잠재적 능력에 따른 기대효과를 중심으로 심사했다고 덧붙였다. 수필 희곡 평론분야 심사위원은 3명이었고 수필가가 한 분이라도 참여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르코문학작가팰로우십 지원사업 공모에 신청한 작가들은 총 837명이었고 최종 선정된 지원대상자는 30명으로 소설 8명, 시와 시조 9명, 비평 2명, 수필 2명, 희곡 2명, 동화 5명, 동시 2명이다. 수필 부문에 다만 2명이 선정되어 수필 인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적어서 수필가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이는 수필문학에 대한 문학계의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심사위원들은 심의 총평에서 “수필은 일견 형식과 내용에 경계가 없다고 할 만큼 광범위한 주제를 아우르는 측면이 있기에 어떤 분야보다 뚜렷한 문학적 성취에 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라고 언급하였다.(한국문화예술위원회 누리집 https://www.arko.or.kr) 이와 같은 설명이 수필가를 단 2명만 선정한 이유로 충분할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수필문학에 관한 심사위원의 인식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필문학이 형식과 내용에 경계가 없어 주제가 광범위하다고 한다면 오히려 다방면으로 문학적 성과를 거두기 용이한 양식이 아닐까 한다. 문학적 성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에 지원할 대상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는 말로는 섭섭한 수필가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오히려 광범위한 소재나 주제를 다루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수필가를 선정하여 지원한다면 사회에서 더 다양한 활동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심사평 가운데 수필은 ‘형식과 내용이 경계가 없다’라는 말은 수필의 장르 개념이 모호하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한국의 수필은 이미 삼국시대에 발생하였고, 비록 표기 수단이 한문이었지만 고려시대에는 문학으로서 형식의 틀을 갖추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한문으로 쓴 수필은 물론 국문으로 쓴 수필도 우수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초에 들어 우리 전통수필을 바탕으로 서구의 에세이를 받아들여 수용함으로써 더욱 활발하게 진화하여 1930년대는 한국 전통수필의 고유한 형식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수필 인구가 시인, 소설가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일부에서는 수필이 다른 양식에 비하여 전문성이 없어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수필의 문학성을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유 있는 비판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생각해보면 문학적 성과 즉 문학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단 수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소설은 다소 문학성이 떨어지더라도 소설이고, 시는 시적 장치가 부족하더라도 시라 할 수 있지만, 수필은 사유, 언어, 구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의미의 보편화도 이루지 못하면 수필이 아니라 넋두리나 잡문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수필문학의 양식적 모호성 때문에 예술적 성과를 얻기 어렵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이런 주장은 수필은 문학적 이론이나 창작 이론이 정립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 답답하다. 또 2000년 이후 수필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서 한국 고유의 전통수필에 대한 정의를 다져가고 있음을 간과한 결과이다. 수필 전문 비평가들이 최근에 발표되는 작품을 대상으로 문학으로서의 예술적 미감을 우수하게 평가하면서 수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수필문학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찾아내느라 노력하는 현실도 간과한 졸렬한 편견이다.

한국 수필의 개념 규정에 가장 큰 걸림돌은 또 있다. 연원을 중국이나 서구 문학에서 찾으려고 하는 태도이다. 한국 수필의 뿌리를 찾는 것은 한국 수필의 범위를 정하는 바탕이 될 뿐 아니라 수필문학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비허구문학인 수필은 다른 문학 양식과 달리 작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삶의 철학은 물론 그의 개성과 감성이 중심이 된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깝지만 언어 체계 자체가 국어와 다르다. 언어 체계가 다르다는 것은 사유 체계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의 에세이가 우리 수필과 다른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한국의 전통수필은 고려시대 수필에서 그 양식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고려 수필의 구성은 일상의 체험에 대한 해석과 그에 따른 삶의 의미 발견이라는 양분된 구조라는 것이 일반적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 체험과 의미 해석으로 양분된 구조를 바탕으로 조선에 이르러 작가의 개성과 정서까지 담아내는 인간적 속삭임으로 진화하였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이 20세기에 들어 한국 수필은 뿌리 깊은 전통수필을 바탕으로 서구의 에세이나 미셀러니를 수용하여 현대적으로 재창조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서구의 에세이와는 다른 우리의 수필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 전통수필은 개인의 감성과 가치관이 마치 김치나 된장 고추장처럼 발효되어 숙성된 발효과학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1세기에 들어 한류가 세계 문화를 선도하게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문학은 공동체의 모든 문화의 흔적을 담아낸 결과라고 볼 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그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세계 문단에서 한국문학의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한강의 소설은 물론이고, 이에 따른 한국 작가들의 소설이 해외 출판계에서 붕새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수필이 ‘k-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계 곳곳에서 출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동아일보<k-에세이 열풍… 억대 선인세 받고 세계 독자 속으로> 2025. 2. 24.) 국내 작가들의 수필집이 억대 선인세를 받고 해외에서 출판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기사를 요약 인용하여 그 사례를 들어보겠다.

김금희 소설가의 《식물적 낙관》 (문학동네, 2023.)은 미국 3대 출판사로 꼽히는 사이먼앤드슈스터 산하 서밋북스에서 1억 원 이상의 선인세를 받고 《The Diary of a Korean Plant Parent》라는 표제로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또 영국,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폴란드의 출판사와도 판권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이야기장수, 2024.)는 이례적인 액수의 선인세 계약을 영미권 대형 출판사와 체결했고, 2024년에는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1개 면을 할애하여 조명했다. 윤이나 작가의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세미콜론, 2021.)는 라면을 소재로 한 수필로 영국 펭귄랜덤하우스 산하 트랜스월드와 억대 선인세 계약을 맺고 2025년 현지 출간 예정이라 한다. 소설가 성석제의 《소풍》(창비, 2006.)도 러시아 최대 규모 출판그룹과 수출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해외 출판 기획자들은 한국의 역사와 젠더, 응원봉 문화, 사회문제에 관한 2030세대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에세이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또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 식민 지배와 억압에서도 문화를 보존하고 재건한 과정, 역사를 통해 형성된 한국인의 창의성과 예술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접하고 네 권을 구입하여 모두 읽었다. 《식물적 낙관》은 정원을 가꾸며 식물을 기르는 과정과 함께 그런 과정에서 사색한 내용을 담았다. 물론 자신이 체험한 사실의 기록에 그치지 않고 식물과 우리네 삶과의 관계에서 오는 의미를 함께 담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두 여자가 공동체를 이루어 문제를 해결하며 사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행복을 담았다. 특히 작가 둘이서 교대로 글을 수록하여 읽는 재미를 더한다.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는 라면에 대하여 그 종류와 끓이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역시 삶의 문제를, 《소풍》도 다양한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통하여 인생의 문제를 비쳤다.

위에 제시한 네 권의 수필집은 대부분 수필가가 아닌 다른 장르 작가들의 작품이다. 그리고 표제 외에 장르 명칭이 없거나 ‘산문집’ ‘산문’으로 표기했다. 수필가들이 ‘수필집’ ‘에세이집’으로 장르 명칭을 쓰는 것과 다른 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수필’이란 장르를 독자들이 ‘따분하다’거나 ‘식상하다’거나 지나치게 ‘교시적이다’라거나 ‘의미 없는 일상의 기록’이라고 여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들이 품고 있는 내용의 공통점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소소한 일상에서 가장 한국적인 삶의 의미의 발견’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재가 되는 서사는 소소한 일상이고 주제는 한국적인 삶의 의미이다. 일상의 서사를 기록하는 가운데 우리 겨레의 삶의 모습, 서구와는 다른 공동체 의식, 역사와 고통을 견디고 해결해 내는 지혜, 가족 또는 가정 내의 문화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나를 버리고 남을 모방했을 때 수필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삶의 문제와 아픔을 해결하고 치유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은근히 시사하고 있어서 얻을 수 있는 미적 감동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작품들이 해외에서 환영 받는 이유는 사실 체험과 해석이라는 양분된 형식과 거기에 담긴 한국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정서나 인간사랑, 공동체 의식 등 끊임없이 진화해온 한국 전통수필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전통수필을 고수하는 많은 수필가들의 작품이 빛을 볼 날도 머지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수필은 작가가 자신을 고백하고 드러내는 문학 양식이지만 그 대상인 독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제 오늘날 수필이 독자를 어떻게 유인하고, 그들의 삶에 어떤 지남차를 제시할 것인가 고민할 때가 되었다. 국내 문단이나 세계 문단이 한국 수필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소소한 일상에서도 남은 보지 못하는 문제를 발견하여 슬쩍슬쩍 보이는 삶의 지혜일 것이다.

넷플리스에서 지난 3월 방송한 한국 오리지널 드라마 16부작 《폭싹 속았수다》가 국내는 물론 세계 안방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 드라마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 역사 속에서 여성이 살아온 여정을 보여주는 휴머니즘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서사, 대사, 배경, 인물이 내품는 수필적 향기를 발견하였다. 특히 서사의 중간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거의 수필 문장이었다. 한류의 전도사라고 인정받는 샘 리처드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 교수는 이 작품을 통하여 한류가 해외에서 각광받는 이유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피력했다.(동아일보 2025. 4. 16.) 그 중에 수필 창작 방향에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방법을 요약 소개하겠다.

첫째 수필은 소소한 일상을 소재로 하되 소중하지 않은 일상 가운데 감추어진 소중한 것을 찾아낸다. 가족, 우정, 인간애 같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단순한 물질이나 정보보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의 결을 찾아 섬세하게 표현한다. 셋째 도덕이나 차원 높은 철학보다도 공동체적 삶의 인정을 소중하게 다룬다. 사회 공동체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넷째 가장 한국적인 문화나 정서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조용한 역동성, 속삭임처럼 들려주는 웅변으로 형상화하는 방법을 연구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 전통수필은 일상의 소소한 체험에서 깊은 삶의 의미와 해결방법을 찾아내어 가까운 이웃에게 시끄럽지 않게 들려주는 구성이다. 또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진정성 있게 남김없이 고백하여 감동을 준다. 가르침이 아니라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전통수필의 형상화 방법이었다. 어떤 사물이나 주제의 바탕으로 삼을 서사를 소재로 하더라도 우리 문화 우리 겨레의 공동심의를 담아 표현한다. 그것이 바로 독자에게 큰 울림을 주고, 기회가 되면 세계의 독자에게도 큰 공감을 불러올 것이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 김치, 된장을 비롯한 발효에 의한 음식을 먹고 살았다. 그 결과 발효된 사유로 대화하고 글을 쓰고 읽는다. 발효과학, 발효문화 속에서 발효된 사유를 형상화하는 수필을 기대한다.

(2025. 4.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