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재 마을을 지키는 낙락장송
산양재 마을을 지키는 낙락장송
비하동 강서초등학교 뒷산을 넘어가면 산양재 마을이 있다. 반송리에서 조치원 가는 큰길을 건너 신작로를 따라 서촌동으로 가다 보면 산양재 마을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산양재는 열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 심부름으로 몇 번 가 본 것이 전부이다. 죽림동 고향집에서 5리가 좀 넘었는데 고개를 넘고 개울을 건너 아버지가 일러주신 대로 그 마을을 찾아갔다. 반송에서 신작로로 몇 걸음만 걸어가면 되었다. 지금 강서1동 중심지인 반송리는 그 시절 1960년대 후반에도 가게가 있고 장이 섰다. 등잔불 켜는 석유를 사러가거나 식구들 생일이 돌아오면 심부름으로 물오징어나 꽁치를 사러 가기도 했었다.
부모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 우백호 자락에는 낙락장송이 늠름하고, 좌청룡 자락이 된바람을 막아주는 그런 마을이었다. 좌청룡 우백호 끄트머리가 어긋나게 마을 어귀를 감싸고 있는 그 안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빼곡했었다. 그 기와집들에 약간 기가 눌리기도 했었지만 심부름 간 집 어른께 아버지 말씀을 드리니 매우 공손하고 정중하게 맞아주셔서 굳은 몸이 풀어졌다. 그때는 순천박씨 세거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복대 진대마루에 공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산양재 마을도 개발의 바람이 불어 시나브로 옛 모습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세기도 더 지난 이즈음 갑자기 산양재 마을 기와집들이 생각났다. 지금도 남아있다면 얼마나 고풍스럽고 멋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 한가운데 옛 마을이 문화재 대접을 받을 것이다.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옛 물건들이 집집마다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40도 가까운 폭염에 얼린 물 한 병만 들고 출발했다.
큰길에서 보면 옛 모습은 하나도 없지만 옛 기억을 더듬어 육감으로 마을을 찾았다. 마을을 지키던 낙락장송이 아직도 성성한 근력으로 서있는 모롱이를 돌아갔다. 국민연금공단을 지나니 강서순복음교회가 나온다. 유학의 후예들이 살던 마을 어귀에 들어선 교회가 변천을 대변한다. 어귀에서 바라본 마을에는 옛것이라곤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찾아보자. 어느 아파트 앞 길가에 차를 세웠다. 복사되는 열기에 얼굴을 데일 것 같다.
강서초등학교 뒤편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마을 뒤로 산책로가 났다. 가로등까지 있다. 호젓하다. 길을 따라 걸었다. 산책로엔 복사열은 없었다. 길은 옛길이 아니고 아름답던 기와집은 보이지 않는다. 빌라, 원룸이 빼곡하다. 편의점, 미용실, 어린이집, 곰탕집이 골목을 채웠다. 부모산에서 내리뻗은 좌청룡 우백호는 중부고속도로가 잘라 먹었다. 그러나 낙락장송 위엄은 옛 그대로이다. 장송 아래 순천박씨 묘소가 있으리라. 백호(白虎)가 엎드린 그 아래 마을 입구로 다시 내려갔다.
동양촌 산양재 경로당이 보였다. 경로당 연혁비가 서 있다. 대략 마을의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산양재를 동양촌이라고도 했단다. 순천박씨 교리공파 세거지이고 임진왜란 때 유공자인 박춘번(朴春蕃)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박춘번은 임진왜란 당시 형 춘무(春茂) 조카 동명(東命)과 함께 복대에서 모병하여 의병 700명으로 저항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순천박씨 문중에서는 이들의 공을 인정하여 2001년 주봉마을에 민충사(愍忠祠)를 건립하고, 박춘무, 박춘번, 박동명과 함께 박홍원, 이시발, 한혁, 정순년, 민여함 등 칠백의용사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당시의 청주성 탈환은 관군보다 옥천의 조헌, 공주의 영규대사, 청주의 박춘무 형제가 일으킨 의병과 승병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산양재는 청주성 탈환의 영웅들과 그 자손의 세거지라는 것을 알게 되니 더욱 아쉽다. 그러나 편의점이나 곰탕집 주인은 여기가 산양재라는 것도, 영웅과 그 자손의 세거지라는 것은 물론 옛날에 기와집이 빼곡했던 것도 모른다. 강서순복음교회 맞은편에 박춘번의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묘소 관리가 잘 되어 있다. 부인과 쌍분으로 모셨다. 묘비 세 기가 있었다. 오른쪽에 오래되어 풍우에 거의 마모된 비가 있고, 그 옆에 최근에 다시 세운 비가 있다. 그래서 두 비석의 비문이 같이 ‘贈叅判平陽朴公春蕃之墓’라 세웠다. 기록에는 호조판서에 추증된 것으로 나오는데 비에는 증직 ‘참판’으로 새겼다. 비문에는 임진왜란 중 세운 공훈으로 호조참판을 추증 받았다고 했다. 좌측에 있는 오래된 비에는 ‘行副部將贈資憲大夫戶曹判書朴公春蕃之墓’라 했다. 아마도 증직으로 호조 참판을 제수했다가 다시 호조판서를 제수한 것 같다.
묘정에서 내려다보니 원모단(遠慕壇)이 국민연금관리공단 옆에 보였다. 원모단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벼슬에 올랐던 순천박씨 문중의 후손 8명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이다. 잔디를 심어 가꾼 뜰에서 신도와 솟을삼문을 지나 단정(壇庭)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솟을삼문 중앙에는 ‘원모단(遠慕壇)’이란 편액을 달았으며 동쪽을 향하고 있다. 삼문이 잠겨 있어서 담장 너머로 들여다보았다. 제단은 8기를 옆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는데, 상석과 향로석 및 위패비를 세웠다. 잔디가 깔린 원모단 뜰에는 몇 개의 비석이 서 있었다. 너무 덥기도 하고 물때가 많아 읽을 수 없었다.
원모단을 보고 나서 봉죽마을 민충사를 가려 했으나 너무 더워서 포기하고 커피라도 마실 곳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마을을 한 바퀴 더 돌았다. 카페는 없었다. 청주산업단지가 개발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산양재 사람들은 농지를 팔아 집을 크게 짓고 작은 방을 여러 개 들였다고 한다. 산업단지에 사람이 모여들고 주변 대학에 학생이 늘어나니 방세를 받는 것이 농사보다 쉽게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직장을 따라 외지로 나가고 대신 외지 사람이 늘어났다. 산업화는 산양재가 순천박씨 세거지라는 의미를 퇴색시켰다. 우마차가 다니던 마을 앞 신작로는 6차선 자동찻길이 되고 아이들이 줄어 걱정되던 강서초등학교는 주변에서 가장 큰 학교로 변모했다. 강서초등학교는 대를 이어 다니던 산양재, 주봉마을 순천박씨와 용정 여흥민씨들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냥 추억의 학교로 변모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고 인정도 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산양재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삶이겠지만 옛날의 생활문화가 그리운 타인은 그냥 그 시절이 꿈이고 아쉬움의 대상일 뿐이다. 경로당 앞에서 연혁비를 다시 한 번 읽었다. 경로당 뒤에 낙락장송은 아직도 고층아파트 사이에서 지키미가 되어 하늘을 찌른다. 장송의 위엄을 뒤로 하고 옛 산양재 마을이 아닌 원룸 마을을 떠나 현대 병원을 지나 산양재 전설이 묻힌 그 위에 들어선 롯데마트, 현대백화점을 뒤에 두고 현대자동차서비스주식회사 옆으로 복대사거리를 돌아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진 비하동, 복대동을 빠져나왔다.
(2024. 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