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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창세기의 ‘내력’ 이야기 구조를 수용하여 -이승애 [환생]

느림보 이방주 2024. 7. 28. 15:34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22] 이방주

이승애 수필 환생---수필과비평20246월호(272) 게재

 

창세기의 ‘내력’ 이야기 구조를 수용하여

이방주

이승애 수필가의 「환생」(수필과비평 6월호(272)을 읽으며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미켈란젤로가 그렸다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 그림의 ‘천지 창조’중 ‘아담의 창조’가 보이는 듯했다. 창세기 2장 4절의 아담의 창조를 잘 보여준 그림이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다. 흙으로 빚어 형상만 갖추어졌을 뿐 아직은 무기력한 아담에게 창조주가 영혼과 생명을 전해주려고 오른손 검지를 뻗는다. 아담은 힘없이 왼손을 뻗어 기운을 받으려는 찰나이다. 인간의 탄생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다만 성경에서는 흙으로 빚어 ‘하느님의 형상’을 만든 후에 코를 통하여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아담을 창조했다고 했는데, 생명의 기운을 손가락으로 전달하는 모습이 달랐다. 그러나 손가락 전달이 더 신비스럽고 현대적 의미가 보인다. 창세기 2장 4절은 주요 서사에 의미를 추가하는 구조, 즉 ‘내력을 이야기하는 구조’로 되었으니 미켈란젤로가 예술적 상상을 의미화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이승애의 「환생」은 작가가 종이 인형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기로 서술한 서사구조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창조주가 아담을 창조하고 아담을 통하여 아담의 도움반려자인 이브를 창조하는 서사구조를 철저하게 닮았다. 약간 길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작가는 ‘창조주의 마음으로 결을 맞춰’ 숨결을 불어 넣고 영혼을 깨워서 자신의 미완의 꿈까지 담아냈다. 게다가 도움반려자인 소까지 인형의 손에 쥐어주었다.

작품의 서사구조를 보면, 먼저 철사를 꾸부려 뼈대 만들기를 한다. 그리고 닥종이로 살을 붙인다. 이쯤해서 애정을 퍼붓는다며 의미를 덧붙인다. 다음에는 활기(活氣) 불어넣기를 한다. 이때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고 어린 시절 친구를 모델로 삼는다. 살아 있는 인간을 모델을 삼은 것이다. 눈, 코, 입, 귀, 두상, 콧구멍까지 훌륭한 인간의 덕목을 생각하며 영의 환생을 그린다. 여기서 인형에게 속잠을 재운다. 인형은 깊게 잠들어 있는 동안 말도 할 듯하고, 해맑은 웃음, 살가움이나 웃음까지 배워올 것이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인형에 정신을 불어넣는다. 새로운 피돌기가 되면서 자아와 하나가 된다. 자아의 ‘미완의 꿈’도 불어넣는다. 인형이 되기까지 닥은 뜨거운 물에 삶기고, 잿물에 뼈와 살이 녹아나고, 매질을 당하면서 고통을 받고 종이로 환생한다. 인간의 고통과 환생에 비유된다.

이 작품은 인형 만드는 과정서사를 통하여 인간의 탄생을 그대로 담아냈다. ‘나도 새 출발이다’라고 결미에서 토로함으로써 자신의 탄생을 말했지만, 성서의 구성법을 배워 우리 모두의 육체적 탄생과 정신적 깨달음의 과정을 의미 깊고 재미지게 형상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수필과비평 2024년 6월호

환생

이승애

철사를 세 뼘 길이로 두 개 잘랐다. 하나는 가운데를 둥글게 휘어 머리를 만들고, 양쪽으로 쭉 펼쳐 팔의 뼈대를 만들었다. 또 하나는 머리와 팔 부분에 끼워 넣어 단단히 감은 뒤 아래로 내려 몸통과 다리의 뼈대를 세웠다. 얼추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

먼저 앙상한 뼈대에 닥종이를 동그랗게 뭉쳐 머리와 얼굴을 만들고, 그 위에 닥종이를 한 겹 한 겹 뜯어 붙였다. 살이 붙고 조금씩 모습을 갖추어 갈수록 내 세포가 분열해 전이 되는 것 같았다. 온종일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애정을 퍼부었더니 나부죽하고 복스러운 얼굴과 둥그스름한 머리 모양이 만들어졌다. 이제 누구를 만들까. 모형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몇 시간째 낑낑대도 뾰족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막막하기만 했다. 동네 어귀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한참 서성대도 내 영감에 와락 안기는 이가 없었다. 아쉬움을 안고 골목길을 휘돌아 오는데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너덧 명 남자아이들이 좁은 골목길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고 있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아이들은 서로 공을 빼앗으려고 요리 뛰고 저리 뛰었다.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아이들의 몸짓이 싱싱하고 활기가 넘쳤다. 순간 내 안 우물이 찰랑이며 옛 벗들의 얼굴이 봇물 터지듯 솟아올랐다.

그래, 저거야.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숨을 쉬며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혹여 아이의 눈이 우는 눈이 될까, 째보가 될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정성을 기울였다. 내 영의 환생인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콧방울을 도독하게 쌓아 올려 콧구멍을 냈다. 입은 너무 크면 야심 차 보이고, 너무 작으면 소심해 보이니 알맞은 크기로 만들어 활짝 웃는 모습을 담았다. 두상은 모난 곳 없이 동그스름 하게 다듬고, 머리칼은 곱실곱실하게 붙였다. 귀는 좋은 말만 듣고 가슴에 새기라고 살집을 도톰히 붙여 약간 크게 하였다.

얼굴만 만들어졌다고 사람이랴. 자근자근 구긴 닥종이를 펴서 목뼈를 감싸고 삐쭉하게 드러난 뼈에 차근차근 살을 붙였다. 어깨는 살짝 아래로 내려 팔과 몸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가슴과 배는 홀쭉하면 볼품없으니 살짝 튀어나오도록 불렸다. 팔, 다리는 누가 봐도 탐스러울 정도로 오동통하게 살을 찌웠다. 뜀박질할 때 넘어지지 말라고 종아리에 근육을 단단하게 붙였다. 이 정도면 어딜 가도 기죽지 않을 녀석이다.

며칠 속잠을 재웠다 다시 붙이고 다듬기를 반복한 끝에 제법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었다. 돌덩이같이 굳은 관절을 하나하나 풀어 형태를 잡아주고 피부색은 가무잡잡하게 하여 건강미를 주었다. 오동통한 두 볼은 분홍색 한지로 생기를 주고, 눈꼬리를 살짝 올려 웃음기를 더했다. 입술은 좀 더 도톰하게 하여 연한 앵두 빛을 주었더니, 말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해맑은 웃음에 적막하던 집안이 왁자해진다. 나만 보면 싱글대는 녀석이 왜 그리도 살가운지, 녀석을 품에 지그시 안아본다. 나무의 따뜻하고 온화한 기운이 전해왔다. 녀석을 품에 안고 들마루로 나왔다. 까무잡잡한 살성에 어울리는 옷을 짓기 위해 닥종이를 뒤적이다 상앗빛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셔츠보다는 티셔츠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아 만들어 입혔다. 바지는 보랏빛이 감도는 갈색 통바지를 입히고 바짓가랑이를 둥둥 걷어 올려 검정 고무신을 신겼다. 영락없이 옛 벗이다.

버들강아지처럼 몽실몽실한 녀석을 보고 또 바라본다. 인정이 두터운 붓돌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우직한 영식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꼬물꼬물 올라오는 그리움을 따라 손을 조몰락대다 보니 어느새 꼴망태 하나 뚝딱 만들어졌다. 그것을 녀석의 등에 메어주고 얼마 전에 만들어 놓았던 소를 끌고 와 녀석 옆에 세웠다. 생글생글 웃는 녀석과 우직한 소가 썩 잘 어울린다. 내친김에 소 목에 끈을 길게 달아 손에 쥐여주었다. 녀석이 소를 몰고 금방 풀밭으로 나설 기세다.

닥종이 인형은 닥나무라는 생명이 근원이다. 그것도 혈기가 넘치는 일 년생 어린나무로 한창 푸른 피로 들끓을 때다. 베어진 닥나무는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기 위해 고되고 힘든 여정을 마다하지 않는다. 뜨거운 물에 삶긴 몸체는 두세 개로 갈라지고, 잿물에 뼈와 살을 녹이는 고통을 겪는다. 방망이의 매운 매질을 받으며 온전히 으깨진다. 닥나무는 마디마디 끊어져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한치의 저항도 없다. 오히려 한없이 부드럽고 순응적이다. 이들의 살과 세포를 닥풀로 이어주어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닥종이에서 닥나무의 혼을 깨우는 일은 쉽지 않다. 너무 성급하게 굴거나 욕심을 부리면 손끝이 둔해진다. 내 아이를 키우듯, 깊은 속정으로 토닥이고 어루만지다 보면 화답하듯 서서히 깨어난다. 마음이 흐려지거나 다른 것에 마음이 기울면 닥종이는 아이가 투정 부리듯 삐뚤어지고 만다. 창조주의 마음으로 결을 맞춰야 한다. 힘겹지만, 그 여정이 있어야 닥종이는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온전한 인형으로 환생한다. 만약 손재주만으로 만들면 닥종이 인형은 생명을 잃고 장식장에 갇혀 볼거리만 될 뿐이다.

닥종이 인형은 또 다른 나이다. 인형에 한 겹 한 겹 살을 입히고 숨을 불어넣을 때마다 내 마음과 정신이 그대로 옮겨진다. 그래서 나는 손가락 하나, 옷 하나 지어 입힐 때조차도 아이와 눈을 맞추고 마음을 주고받는다. 인형과 정이 도타워질수록 내 생명수는 인형 안으로 흘러 들어가 새로운 피돌기를 한다. 인형은 자기 몸을 활짝 열어 나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가 된다. 인형 안에는 지나간 내 삶의 이야기가, 지금의 내가, 살아가고 싶은 미래에 대한 꿈이 꼼지락거린다.

녀석을 다시 한번 꼭 껴안아 본다. 이제 막 태어난 녀석치고는 꽤나 힘차다.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출산한 기분이 이랬을 것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만의 방에 가둬놓고 싶은 사사로운 욕심이 치밀어 오른다. 하지만 인형의 맑은 눈빛 속에 숨겨진 간절함을 읽는다. 내 좁은 울타리 안에서는 꿈을 꾸지도, 자유를 누릴 수도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그가 나와는 다른 숨결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며 울타리를 걷어낸다.

닥종이의 지고한 순응성은 인仁이다. 나는 닥종이 구석구석에 흐르고 있는 닥나무 인仁에 혼을 불어넣어 사람을 만들었다. 체온을 지닌 사람으로 환생했으니, 사람들과 어긋나거나 부딪침 없이 서로 잘 어울려 사랑도 받고 자기의 꿈도 마음껏 이루었으면 좋겠다.

그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은 내가 완성하지 못한 삶을 그가 완성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나는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웃음을 잃은 사람에게 웃음을 주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상처받은 사람을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가슴을 내어주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내 미완의 업을 그가 완성해 주길 바란다.

인형을 마주하고 눈빛을 주고받는다. 앞으로 맞이하게 될 새 삶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흥겨워 보인다. 나는 그에게 ‘너는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라고 힘을 북돋아 준다. 나도 새로운 출발점에 선다.

 

이승애

2014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충북수필문학회, 내륙문학회 회원

포항스틸에세이문학상 수상

저서 《아버지의 손》 《신호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