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발문]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용기- 강현자의 《욕망과 희망 사이》

느림보 이방주 2024. 7. 23. 14:14

《욕망과 희망 사이》 출간에 부쳐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용기

 

이방주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삶의 여정

珠蓮 강현자 수필가가 그새 두 번째 수필집을 낸다고 한다. 그는 2019년 11월, 월간 《한국수필》에 〈관계〉, 〈나를 보내며〉를 발표하면서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등단한 지 채 2년이 되기도 전인 2021년 5월에 충북문화재단의 창작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어 수필집 《나비가 머무는 이유》(2021, 도서출판 직지)를 출간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바 있다. 그런데 3년 만에 두 번째 작품집을 묶어낸다고 한다. 우리가 놀라는 것은 짧은 기간에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동안 얼마나 인식의 도(道)를 담금질하고 형상의 기(技)를 벼리어왔는지 작품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수필을 향한 그간의 천착은 표면에도 드러나 사단법인 한국수필가협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한국수필》의 올해의 좋은 수필에 선정된 것은 물론이고, 발걸음 에세이를 연재하여 지역의 문화유적을 알리고 기행과 수필의 관계를 바로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계간 《수필미학》에 생태수필을 연재하여 생태수필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는데 또한 이바지하고 있다. 소속된 문학단체에서 발간하는 계간 《수필미학》 편집장으로 좋은 책을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다. 청주시 1인1책 펴내기 지도강사로 3년째 봉사하며 재능기부에 앞장서고 있다. 그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진정성을 가지고 정진하는 것 외에 어짊을 담아 남을 가르치는데 정성을 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알게 모르게 가르치며 서로 배우는 덕도 보고 있는 것이다.

珠蓮을 우리 수필교실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몇 시간 강의를 듣자마자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문학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문학에 대한 사유가 얼마나 깊었으면, 쌓였던 미감이 강물처럼 흘러넘쳤을까 짐작이 간다. 처음 그의 글은 구성이 서툴고 문장은 매끄럽지 못했지만 사물을 인식하는 시선만은 색다르고 예리했다. 게다가 고백이 진솔하고 용기 있었다. 수필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독창적이고 대상의 본질을 바로 알면 형상은 절로 이루어진다. 그가 나를 만나 수필을 공부하게 된 것이 수필의 덕이라면, 훌륭한 후학으로 그를 만난 것은 수필에 쌓은 내게 돌아온 복이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수필문단에 크게 기여할 재목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이미 겨울 냉이가 더 단단하고 상처받은 뿌리에서 나는 향기가 더 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문학은 겨울을 견디어 이겨내야 단단해지고, 받은 상처를 치유한 사람이 향기로운 수필을 쓸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처한 삶의 세계가 겨울인지를 알고 상처를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감춤 없이 고백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곧 거대한 검은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가 어디에 드리워져야 할지 잘 아는 작가이다. 존재의 근원을 알아야 빗장을 열고 세계로 나아가 존재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근원을 알지도 못하고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서성이다가 날 저무는 길가에서 서리병아리가 되어 ‘삐악삐악’ 영혼 없는 푸념으로 삶을 허비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정겹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도 유복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생활의 영역은 어린 시절과는 다른 어둡고 커다란 그림자 안에 머물러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 안에 있으므로 자신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나서야 밖에서 바라보게 되고 비로소 선명한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하얀 그림자〉 그것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겨울이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겨울 안에서는 그의 향기도 보이지 않았다. 존재의 근원을 알아야 자신의 꿈이 욕망인지 희망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인지 희망인지 구별해야 깨진 자아를 추슬러 수행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림자를 벗어난 후에도 부당한 세계로부터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을 받았다. 좌절의 위기를 겪으며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학을 향한 열정에 의하여 그에게 닥친 고난과 시련은 진한 향기를 가진 겨울로 승화되었다.

 

관계를 바탕으로 상생의 씨앗을 심는 수필

수필은 무엇일까.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일까. 책머리에 비교적 짤막한 작가의 말에서 어디에 시선을 두고 수필을 쓰는지 분명하게 밝혔다. 첫째는 비록 바람에 흔들릴지라도 두께는 도톰해지고 색깔은 짙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변환과 성장을 가져오는 수필을 의미한다. 둘째로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서성이면서도 내려놓을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고 말한다. ‘손을 내려놓으라.’라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집착에서 벗어나 욕망으로 향하는 손을 내려놓고 순순한 마음으로 희망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수필을 수행의 문학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문득 아파트라는 그림자를 벗어나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첫 수필집 《나비가 머무는 이유》를 출간한 이후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날아갈 이유를 찾은 것이다. 그래서 암울한 그림자도 없고 어둠 속에서 오히려 별이 많이 뜨는 ‘별마루’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한다. 별마루라는 터전에서 텃밭을 갈며 수필의 씨앗을 심는 일을 일상으로 한다. 당연히 자연의 깨우침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그냥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른바 생태수필에 관심을 갖고 생태계라는 커다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그림자를 찾아가고 있다. 그의 수필에는 에코페미니즘의 사유가 담겨 있는 것이 셋째이다. 이와 같은 수필관은 그가 평소 지니고 있는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다시 말하면 존재자는 걸어놓은 빗장을 풀고 대문을 나서야 세계를 만나고, 세계를 만나야 자아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고, 그림자를 찾아야 세계 속에서 상생(相生)하며 참다운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작가의 말에서 밝힌 그의 수필에 대한 관점을 바탕으로 이 작품집을 읽노라면, 자아를 발견하고, 세계로 나아가 관계를 지으며 욕망을 내려놓고, 희망을 찾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욕망을 내려놓고 희망으로 나아가기

그는 ‘무엇을 이루려고 아등바등 모으려고만 했던가. 그래서 남은 게 무엇인가.’라며 존재에 대한 뼈아픈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삶을 한탄한다.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 다른 이들처럼 꿈을 이루고 좋은 날을 맞아 여유 있게 사는 꿈을 꾼 적도 있지만 생은 자신에게 좌절만 남겨주었다고 토로한다.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무엇이 평상시의 모습일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일까’,〈버리지 못하는 버릴 수 없는〉라면서 의문을 반복한다. 이것은 곧 존재에 대한 의문이다. 존재에 대한 의문은 극심한 고난과 시련에 부닥칠 때 갖게 된다. 그래서 시인 유치환은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유치환의 생명의 서〉 이처럼 강현자 수필가도 육체의 아픔이라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마음의 극심한 아픔’으로 ‘원시의 본연한 자태’에 대한 ‘독한 회의’를 품게 된다.

원시의 본연한 자태에 대한 독한 회의는 작품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서성이는 자아를 발견하면서 풀리게 된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서리태 농사를 실패한다. 그리고 씨앗을 심으면서 ‘나누고 싶었던 얼굴을 떠올린’ 꿈을 희망이 아니라 ‘무모한 욕망’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작물을 돌봐주지도 못하고 결과만 기다렸기에 허황된 욕심이라는 것이다. 빈 콩대를 태우면서 욕망의 유골을 자연에 맡겨 희망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깨닫는다.

 

천지지간은 풀무와 같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도 그 작용은 무궁무진하다 했다. 바람을 만들고 그 바람은 계절을 만들고 계절 속에 만물은 피고 지고…
허공도 그러한데 마물며 재가 품고 있는 희망은 말해 무엇 하랴. 욕망의 무게에서 산화된 영혼 없는 재는 하얀 희망이 되어 다시 찬란한 봄을 기억하리라. 초보 농군의 첫 가을이 그렇게 흩어져 간다. 〈욕망과 희망 사이〉

 

모든 것은 자연이 이루는 것이지 인간이 올리는 욕망의 손길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스스로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욕망과는 다른 희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태주의 사고이다. ‘욕망은 재가 되고 재는 하얀 희망이 되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단순하게 보이는 이 글에서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확인하고 순환하는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법칙을 가늠하게 된다. 그 결과 뜬구름 잡기 같던 욕망 내려놓기를 한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하얀 구름 아래 거대한 악어 떼가 호수를 향해 기어들어가는’ 명품 사진을 꿈꾸며 높은 곳에 올랐지만 실패한다. 구름은 역시 뜬구름이었다.〈뜬구름 잡으러〉 여기서 그는 이른바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을 내려놓는다. 방하착이다. 욕망을 넘어서는 희망을 확인한다.

수도자라 할지라도 하루아침에 욕망 내려놓기를 실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종교적 수행자들도 평생 방하착을 목표로 보내기도 한다. 작가가 욕망과 희망 사이를 알고 내려놓기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수행의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관계’라는 소통의 방법을 발견한다. 존재자가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빗장을 열고 상대의 손을 잡고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그것이 관계이다. 이러한 사실을 그는 유리벽을 기어오르는 나팔꽃 덩굴을 상관물로 확인한다. 유리벽을 뚫고 나가고 싶은 나팔꽃은 유리벽이 답답하다. 유리벽은 자신의 주장대로 따르지 않는 나팔꽃이 불안하다.〈나팔꽃과 유리벽〉 작가는 소통이 없는 두 사물이 답답하다. 여기서 노자의 무지무욕(無知無欲)을 생각해낸다. 열린 광장으로 나가야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 자신이 유리벽으로 살아온 삶을 되돌아본다. 치유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치유란 바로 광장으로 나아가 열린 사고를 하는 것이다. 대문의 빗장을 풀 듯 마음의 가시를 빼는 것이 광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애초에 욕심이 없으니 누굴 밟고 일어서려는 마음도 없고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는 의식도 없는 허릅숭이에게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많은 생각 끝에 이것은 그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란 결론을 내렸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판단을 내리든 그건 상대의 소관이지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내게 가시였다. 내 마음도 내게 가시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박혀온 통증이었다. 평소엔 무심히 지나치다가도 문득문득 생각나 나를 괴롭히던 가시의 통증, 내 오늘 드디어 가시를 뺐다. 〈가시를 빼다〉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대문의 빗장이 아니라 마음의 가시이다. 가시를 빼내는 것이 치유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그는 지름길만을 원하지 않는다. ‘관계는 소통이다.’라고 규정하면서도 느림의 여유를 추구한다. 굽은 길로 느릿느릿 걸으며 굽은 길처럼 관계를 부드럽게 한다.〈굽은 길을 걸으며〉

변환과 성장을 기대하며

珠蓮의 작품을 읽으며 결코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인간 강현자를 발견한다. 그는 수필을 쓰면서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고 욕망과 희망 사이라는 고통의 근원도 발견한다. 여기서 그는 욕망이라는 ‘삼독 내려놓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관계를 짓고 소통하고 마음 가시 빼내기라는 것을 깨닫고 오늘도 정진한다. 수필은 수행과 치유의 문학이라는 그의 수필관이 생태계에서 모든 개체와 수평적으로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있다.

작품집을 몇 권씩 펴낸다 하더라도 변화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두 번째 수필집 《욕망과 희망 사이》는 첫 수필집에 비해 변환과 성장을 이룬 수필가로서의 강현자를 보여준다. 그 하나는 사유의 폭과 깊이가 매우 두터워졌다는 것이다. 그의 일상은 그저 일상으로 치부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발견하고 삶의 철학으로 개념화되었기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수평적이다. 시선은 직관이지만 사유와 상상은 굴절된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처럼 영롱하게 변환된 메시지로 전해진다. 그림자를 벗어나는 용기가 있었기에 인식의 범위가 유리벽을 뚫고 열린 광장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 한다. 주제와 문채(文彩)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욕망과 희망 사이》는 형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글은 다양한 구성법을 수용하였다. 교차구성, 유비구성, 시점, 서술자의 이동 등 수필에서 실험적으로 적용되는 구성법을 수용하여 성공하였다. 문장은 짧고 단순하나 품은 의미는 넓고 광활하다.

珠蓮은 부지런한 작가이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지만 게으르지도 않다. 두 번째 수필집 《욕망과 희망 사이》 출간을 축하하면서 사제(師弟)의 연을 맺은 문우로서 기대하는 일이 있다. 창작의 열매는 행복의 향유이다. 행복의 뿌리는 사랑이다. 자기와 이웃은 물론 삼라만상을 모두를 사랑하면서 상생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욕망과 희망 사이》에서 깨달은 것처럼 진정성을 가지고 자신을 사랑하고 어짊으로 세계를 대하면 문학은 절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진실을 깊이 새겨두시길 바란다.

珠蓮 강현자 수필가가 훌륭한 문인으로서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국 수필문학의 역사를 쌓아올리는데 작은 벽돌 하나가 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