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16] 초록으로 이루는 영혼의 광합성(강표성 수필 「초록을 품다」)

느림보 이방주 2024. 6. 13. 12:38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16] 이방주

강표성 수필 「초록을 품다」 ---『수필과비평』 2024년 4월호 게재

 

초록으로 이루는 영혼의 광합성

이방주

‘말없이 어깨를 다독이는 초록 물결, 풍경이 내 안으로 밀려온다.’

‘수필과비평’ 4월호에 게재된 강표성의 수필 ‘초록을 품다’를 읽으면 이성선 시인의 시 ‘미시령 노을’이 떠오른다.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가벼움은 인간이 스며든 자연의 존재 방식이다. 시인에게나 수필가에게나 자연과 우주의 존재 방식은 비슷하다. 인간은 자연과 소통하면서 자연의 이법(理法)을 배운다. 이렇게 터득한 이법은 우주를 이해하는 철학적 길잡이가 된다.

강표성은 인간과 자연은 운명적으로 도반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초록에 몰입하여 초록을 품을 줄도 안다. 사실은 초록이 작가를 품었는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는 자연과 하나 되는 사유의 과정이 전략적으로 숨어있다. ‘초록에 대한 인식, 초록이 주는 혜택, 초록이 스며든 자아’의 순서로 사유가 진행된다. 먼저 마음 비우기를 한 다음 초록에 몰입하여 자연과 우주를 통찰한다. 자연의 본질을 체득하면 진정성이 깨어나고 나아가 영적 사유로 자연과 합일에 이른다. 이쯤해서 독자도 작가의 사유에 빠져버린다.

작가는 갑사로 가는 길 들머리에서부터 초록의 다양함을 비유를 통하여 묘사하였다. 이 작품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자연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친근한 보조관념에 얹어서 보여주기로 미적 긴장감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시적 구성 방법을 수용하여 ‘초록’이라는 하나의 대상에 대하여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보조관념을 다양하게 확산해 나간다. 자아를 영적공간인 신전으로 이끌어 내면의 삿된 모든 것을 떨어내고 초록으로 채운다. 초록에 몰입하여 자연을 통찰하는 것이다. 드디어 나무 밑동의 보굿까지 ‘녹갈색으로 덧칠’이 된다. 자아가 초록으로 덧칠이 된 것이다. 당연히 독자도 초록의 숲에서 잠언에 심취한다. 초록은 신전이고 문장(文章)이고 카타르시스의 잠언이다. 은빛 음절의 시어가 입에 쓴물이나 마음의 쑥대밭을 정화한다. 침묵으로 주는 처방전이라고 초록을 인식한다. 이것이 작가의 눈에 띈 자연의 존재방식이다.

작가는 ‘삶의 현장에서 초록은 필수다’라면서 자연의 혜택을 체득한다. 초록에서 기다림의 지혜와 순환의 질서를 배운다. 초록은 색깔의 중화이다. 중용에서 말하는 희로애락의 중(中)과 화(和)를 초록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를 깨닫는다. 중화의 삶의 방식이 아버지로부터 작가에게 딸에게 손자에게 이어져 순환하는 우주의 질서에 합일을 소망하는 것이다.

‘순하지만 빛나는 생명과 손잡고 걷는 길’에서 초록을 통하여 영혼의 광합성을 소망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생태계의 모든 인간이 자연의 일부, 우주의 일부라는 이법(理法)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수필과비평 2024 4월호

초록을 품다

강표성

연초록 물결이 출렁인다. 절 입구에서 경내까지 오 리나 된다는 ‘오리 숲길’에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갈참나무 이파리들이 봄빛을 쟁이느라 부산하다. 춘 마곡 추 갑사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봄만 되면 나는 갑사 쪽으로 기운다. 초록이 고픈 게다.

매일 백색 풍경에 젖어 사는 에스키모인들은 흰색을 수십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데, 이 땅의 초봄이야말로 그렇다. 같은 나무도 며칠 전에 나온 이파리와 오늘 나온 것이 다르고, 앞뒤 혹은 위아래에 따라 색의 깊이와 파장이 제각각이다. 햇살이 미끄럼 타는 애채는 파릇파릇하고, 새싹을 피워낸 나무초리는 푸르스름한가 하면, 거친 줄기마다 푸르죽죽하고, 오래된 졸가리는 검푸레 하더니, 밑동을 감싼 보굿은 녹갈색을 덧칠한다. 이렇듯 저마다의 초록으로 봄을 찬양한다.

꽃은 피어 열흘 붉어도 초록은 날마다 새로운 그늘을 펼친다. 숲은 그들의 신전이다. 세상의 삿된 것은 끼어들 수 없는 깊은 그늘, 그 아래 서면 박하사탕을 머금은 듯 화안해진다. 가슴이 열리고 상큼한 기운이 온몸에 고이기 시작한다. 잠시 나무에 기대본다.

서 있는 문장들이다. 읽고 읽어도 질리지 않는 명문장에 눈맛이 시원하다. 온몸으로 읽는 줄글이 얼마나 아늑한지. 괜찮아 괜찮아, 속삭이는 잎새에 파묻혀 몸과 마음을 부린다. 새들도 은빛 음절을 튕겨내고 바람은 음유시인이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 때면 녹색을 기웃거린다. 입에 쓴 물이 고일 때, 마음이 쑥대밭 같을 때면 나무를 찾는다. 울울창창할수록 좋다. 거친 숨결을 다스리며 헉헉대노라면 그들은 내 몸의 신호를 경청한다. 호들갑 떨지 않고 억지로 연민의 표정을 짓지 않고 묵묵히 지켜본다. 말없이 어깨를 다독이는 초록 물결, 풍경이 내 안으로 밀려온다.

푸른 잠언의 숲이다. 거기서는 행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밑줄을 긋거나 괄호 표시할 필요가 없다. 시간이 그린 그림 앞에 선다. 일체를 벗어 놓고 존재 자체가 되어 본다. 침묵과 대면하니 마냥 고요해진다. 솜털 하나하나 열리어, 온몸으로 스며드는 기운을 받아들면 그만이다. 더할 나위 없는 위로의 편지, 따뜻한 처방전이 거기 있다.

이 세상에 초록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보이는 곳마다 하얀 알래스카 지방, 회색으로 빛나는 툰드라 지역, 붉은색에 빠져드는 사막 지대는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풀빛의 넉넉함과 나무의 생기를 맛볼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먼 유배지에 내몰린 듯하다.

삶의 현장에서도 초록은 필수다. 길을 가다 보면 곳곳에 신호등이 있다. 성급한 마음에 길목을 지나치려면 금지표시가 발목을 붙잡는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작은 길 하나 건너는데도 그런데 하물며 인생은 어쩔 것인가. 머잖아 초록 불이 나오겠지, 그 믿음으로 생의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이럴 때의 초록은 희망의 색이자 질서의 색이다.

빨강이 뜨겁다면 파랑은 차가운 색이다. 이를 중화시켜주는 것이 녹색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는 한발 물러나 중립을 지킨다. 어디서나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참을 줄도 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포용력이 있기에 보색인 밤색과도 잘 어울린다. 나무와 땅처럼 서로를 받쳐주니 주위에 생기가 흘러넘친다. 하여 조물주도 해가 바뀌면 연둣빛 붓을 제일 먼저 드시나 보다.

초록을 볼 때마다 내 삶도 그리 물들기를 바란다. 어디서나 편안하고 넉넉한 배경이었으면 한다. 꽃처럼 주목받지 않으면 어떤가, 존재 자체로 바탕이 되는 것도 좋다. 온화하고 믿을 수 있는 분위기면 족하다. 잠시 반짝이는 것보다 오래 바라볼 수 있는 편안함이 좋고, 비바람에 쉬 흔들리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어린 시절부터 녹색은 특별했다. 대여섯 살 무렵에 아버지가 새 옷을 사 오셨다. ‘아빠가 간따앙구 사왔당’ 하며 한걸음에 달려가 자랑했더니 ‘아따, 참말로 이쁘다잉’ 하는 추임새가 이어졌다. 원추리 이파리 같은 그걸 입고 얼마나 깡충거렸던지. 원피스보다는 ‘간따앙구’라는 일본말에 익숙하던 시절이라, 나일론 소재의 연초록 원피스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이다. 치마 부분에 자잘한 주름이 달려있던 그 옷은 나를 소공녀로 만들고도 남았다. 내 아이를 키우면서도 초록색 계열을 보면 손이 먼저 갔다. 얼마 전에 딸애의 옷장에서 비슷한 원피스를 발견했다. 순간, 작은 요정이 내게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보석 같은 날들이 떠올랐다. 내 아버지가 그러신 것처럼 나도, 딸애에게 연초록 원피스를 입히면서 뿌듯했다. 그 애 인생이 봄날 같기만을 바랐고, 맑고 부드러운 성정으로 어디서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길 빌었다. 삼십 년도 더 된 옷을 장롱에 다시 넣으며 새로운 주인공을 기다리기로 한다. 머잖아 우리에게 올 또 다른 생명.

나이 들수록 초록을 탐한다. 이와 비슷한 시간대가 많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나무들이 광합성을 하듯, 사람도 해마다 푸른 시간이 돌고 돌면 좋으련만. 나무로 치면 밑동이 두툼해지고 거친 옹이도 여기저기 보인다. 속절없이 속만 비어가는 그루터기를 닮을까 봐 눈길은 우듬지를 더듬고 더듬는다.

숲에 와서 인생을 다시 생각한다. 사람 또한 새순일 때가 있고, 울울창창 빛나기만 할 것 같은데 낙엽으로 내려앉을 때가 있다. 주어진 시기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때를 즐길 줄 아는 것, 미련 없이 자리 내어줄 준비를 하는 게 바로 초록빛이 주는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시간을 아끼며 즐기려 한다. 머잖아 기회가 오면 딸을 빼닮은 아이를 앞세우고 갑사의 오리 숲길을 거닐고 싶다. 순하지만 빛나는 생명과 손잡고 걷는 길, 상상만으로도 봄물이 고인다. 내 영혼이 절로 광합성을 한다.

 

 

 

강표성 약력

수필문학등단.

원종린 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마음싸개, 와디에 서다

전번 : 010-5183-0737 이메일 : kps75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