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희 수필문학상의 당위성 확보를 위하여
20240620제43회한국수필국내심포지엄(강화)
발제 최원현 : 한국수필의 어머니 월당(月堂) 조경희
지정 토론 : 이방주 조경희 수필문학상의 당위성 확보를 위하여
월당 조경희 선생님께서 한국 수필문학에 세운 문학사적 의의와 한국수필가협회의 오늘을 이루신 공적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신 권남희 이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오늘 조경희 선생님의 삶과 문학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심도 있는 발제를 해주신 최원현 명예이사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심포지엄은 조경희 선생님의 수필문학을 이해하는 것과 동시에 중단된 조경희 수필문학상의 지속에 관한 당위성 확보에도 목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1998년 당시 격월간이었던 한국수필 9,10월호로 수필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신인상 등단작에는 조경희, 서정범, 이철호 선생님의 심사평이 실렸습니다. 등단패는 한국수필가협회 조경희 회장님 명의로 되어 있습니다.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수필작가회 모임 때 참석하셔서 좋은 말씀 해주시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이러한 인연에도 불구하고 조경희 수필문학상을 지속적으로 시상하고 시상 주관기관을 조경희수필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한국수필가협회로 이전하기 위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몇 가지 짚고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에 두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발제자께서 말씀하신 중에 조경희 선생님은 1939년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계시다가 1940년 조선일보가 일제 강압에 의해 폐간되자 매일신보 문화부기자로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매일신보는 ‘대한매일신보’라는 민족지로 출범했으나, 1940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후에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꾸고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되었습니다. 한글을 매체로 했지만 조선의 식민지화, 내선일체, 일제 침략전쟁의 합리화 등 우리 동포를 황국신민화 하는 정책의 앞잡이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월당선생께서 문화부기자로 근무하셨다니 근무하게 된 계기와 근무 과정에서 이념의 성향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한 6공화국에서 여성정책을 담당하는 정무 제2장관이 되셨고, 이에 앞서 1984년 전두환 정권 당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고 했는데 1987년 5공화국헌법으로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생님은 권력에 순응하는 문화인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판의 경우에 우리 협회에서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음에 조경희수필문학상 운영위원회에서 조경희 수필문학상이 14회까지 시상하고 중단된 이유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을 것이라 이해하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궁금한 것은 14회 수상하는 동안 월간 한국수필 출신은 몇 분이며 만약에 한 분도 없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며 한국수필가협회에서 주관하여 시상하게 되면, 수상자 작품성이나 수필문학에 대한 기여도 외에 출신 문예지도 고려할 것인지 궁금합니다.
이러한 저의 질문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혀둡니다.
이방주
20240620제43회한국수필국내심포지엄(강화)-조경희 수필가의 문학세계와 활동 조명
한국수필의 어머니 월당(月堂) 조경희
최원현
1. 들어가며
한국현대수필문학사에서 많은 좋은 수필가를 거론할 수 있지만 한국수필 문단이 이만큼 있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분을 찾는다면 당연히 월당 조경희 선생이 아닐까싶다. 월당 조경희 선생은 수필작품으로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분이지만 그가 활약해서 이룩해 놓은 한국수필문단은 어느 누구도 그 공을 넘어설 만한 분이 없다.
탄생 106주년 그리고 가신 지 내년이면 20년이 되는 언론인이요 문인이요 행정가인 월당 조경희 선생을 그가 태어난 곳 강화에서 그의 삶과 문학을 상고하고 조명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 매우 의미롭다. 언론인으로뿐 아니라 문인으로 그리고 행정가로도 혁혁한 업적을 남기셨는데 본 발제는 주로 그런 조경희 선생의 삶과 문학적 활동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조경희의 삶과 문학
조경희 선생은 호가 월당(月堂)으로 1918년 4월 6일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전등사가 있는 해랑당이란 마을에서 독립유공자인 성공회 신부 한양 조씨 조광원(趙光元·노아) 과 파평 윤씨 윤의화(尹義和) 사이에서 5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40호 정도 되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는 열세 살 때 강화도를 떠나 1926년 길상소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1932년 서울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39년 졸업하고 바로 조선일보사 학예부 기자가 되었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시절인 1938년 잡지 《한글》에 수필 <측간단상(廁間斷想)>이 당선되고 『조선일보』 학생란에 <영화론>이 당선하여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194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 강압으로 폐간되자 매일신보 문화부 기자로 옮겼다.
1945년 광복을 맞으면서 1946년 서울신문 사회부 기자, 1947년 중앙신문 사회문화부 기자를 하다 1948년 이미 결혼하여 두 아이가 있지만 혼자가 된 홍태식과 1948년 10월 10일 결혼을 한다. 1949년에는 손소희·전숙희와 함께 계간 종합지 《혜성》을 창간하지만 6.25전쟁으로 인해 4호로 중단하고, 이때 아버지는 하와이에서의 교회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지만 전쟁으로 대전에서 길이 막혀 도로 하와이로 돌아가고, 선생은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부산일보 문화부장을 하게 된다. 1952년 월간 《여성계》 주간과 월간 《희망》 문화부장을 하면서 1955년 첫 수필집 《우화》를 출간한다. 전쟁 후 폐허가 된 서울에서 수필집을 낸다는 것은 화제거리였다. 해서 선생의 첫 수필집 《우화》는 문단에 화제가 되었는데 특히 표지화는 수화 김환기 화백이 그려주었고, 최정희 선생이 서평을 써 주었으며, 출판기념회를 지금의 서울특별시의회 사무실 지하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노천명 모윤숙 오상순 선생 등 문단의 선후배들이 함께 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후 평화신문 문화부장(1956),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1960), 새나라신문 편집국장(1962), 한국일보사 주간한국부장(1962), 한국일보 논설위원(1974) 등으로 두루 언론계에서 활동하였으며, 1961년 4월 발족한 한국여기자클럽에선 1965년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57년 제28회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펜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59년엔 서독 프랑크푸르트 국제펜대회 한국 대표로, 1966년엔 미국 뉴욕 국제펜대회(제33회) 한국 대표로, 1969년엔 프랑스 망통 국제펜대회(제36회) 한국 대표, 1971년엔 아일랜드 더블린 국제펜대회(제38회) 한국 대표로, 2000년엔 모스크바 국제펜대회(제67회)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 등 세계 무대에도 발을 넓혔다.
1962년에는 미 국무성의 각국 지도자 초청 프로그램으로 4개월 동안의 미국 여행과 이어서 가진 2개월의 유럽 여행 기록을 담아 1963년 미국·유럽기행수필집 《가깝고도 먼 세계》를 내기도 했다.
1966년엔 이러한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국제펜클럽한국본부의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그 해 두 번째 수필집 《얼굴》을 발간했다.
1971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바로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된 것이다. 1971년 2월 12일 종로2가에 있던 낙원장에서 창립총회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바로 그해 4월 10일에 《수필문예》라는 제호의 협회지를 창간 발행했다. 《수필문예》의 제호는 서예가 일중 김충현이 써 주었는데 7호부터는 한자인 《韓國隨筆》로 바꿔 발행했으며 이때의 제호는 수필가이면서 서예가인 김사달이 썼고, 1981년 겨울호(통권 제27호)부턴 다시 일중 김충현이 한글제호 《한국수필》을 써주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월당 조경희 선생은 한국수필가협회가 한국 수필 문단에 더욱 활발한 수필 열기를 불어 넣어주기를 바랐다. 해서 1999년 10월 《한국수필》 통권 제100호를 내면서 문단의 조병화·차범석·홍윤숙 등의 축하 메시지를 싣고, 100호 기념으로 제5차 한국수필가협회 국제심포지엄을 서울 롯데호텔에서 개최하여 한국 조경희(한국수필가협회 회장), 미국 필립 로페이드(뉴욕타임즈사 자유기고가), 일본 무라오 세이이치(일본 에세이스트클럽 이사장), 중국 백화(시인. 수필가.희곡작가) 등을 초청하여 발제케 했다. 또한 해외심포지엄도 기획하여 1995년부터 제1회는 북경, 2회는 도쿄, 3회는 미국 시카고, 4회는 영국 런던, 5회는 서울, 6회는 미국 뉴욕, 7회는 미국 로스엔젤레스, 8회는 중국 서안 등에서 개최하며 문학적 지평을 넓히는가 하면 국내 심포지엄(1982년부터 시행)은 국내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개최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개최했다. 1971년엔 세 번째 수필집 《음치의 자장가》를 내기도 했다.
1972년 아버지가 75세로 별세했다. 그리고 《수필문예》를 7호 발간으로 종간하고 1974년 《한국수필》로 제호를 변경 창간했다. 1975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78년 한국일보 소년한국 부국장으로 있으면서 수필집 《면역의 원리》를 발간했다. 다음해인 1979년엔 한국여성문학인회장과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 되었고, 다음 해인 1980년은 한국일보를 정년 퇴임했지만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권한대행(1984년까지)을 하였으며, 평통 자문위원, 5.16민족상 이사 및 심사위원, 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을 하면서 1984년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에 당선하여 1987년 재선까지 했다. 1986년 문예진흥원협회 부회장 때 수필선집 《골목은 아침에 나보다 늦게 깬다》와 영문 수필집 《Three Essayist from korea》를 발간했다. 1987년 예총 재선과 함께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부문)을 수상하였으며, 딸 성미가 결혼(사위 노진준)했다.
다음 해인 1988년 제6공화국(대통령 노태우)이 출범하자 여성 정책을 전담하는 정무제2장관이 신설되면서 초대 정무제2장관에 발탁되었는데 장관이 되자 전국 13개 시·도의 여성가정복지과장을 모두 국장으로 승진 발령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해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 해에 수필집 《웃음이 어울리는 시대》를 발간하였으며,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지냈다. 그 외에도 1991년 서울예술단 이사장, 교욱정책심의위원, 한국여성개발원 이사장(1995)을 지냈으며, 일붕문화상(1995), 한국수필대상(1996), 올해의 자랑스런 미술인상(2000), 이화문학상공로상(2000), 20세기 1천 명 세계지도자상 및 20세기 200명 세계작가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엔 영광스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수필선집 《치자꽃》(1999)과 《하얀꽃들》(2000) 그리고 수필집 《웃음이 어울리는 시대》(2003), 《조경희 자서전》(2004)과 《조경희수필집》(2005)을 연이어 출간했다. 그리고 2008년 현대수필가 100인선21로 《작은성당》이란 선집이 좋은수필사에서 나왔다.
대한민국문화예술상(1987), 청조근정훈장(1990), 은관문화훈장(1996), 프랑스 예술문화공로훈장(1992), 대한민국예술원상(2005)을 수상하였으며, 2003년엔 강화를 빛낸 사람에 선정되고 강화에 조경희문학관(강화읍 관청리 강화문학관 2층)이 세워져 책과 그림 및 소장품이 전시되고 있다. 2005년 8월 5일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으로 재임 중 향년 87세로 별세하여 천안시 광덕면 선영에 잠들어 계신다.
3. 조경희의 수필문학
조경희 선생의 주요 수필 작품집으로는 《우화》(1955), 《가깝고 먼 세계》(1963), 《얼굴》(1966), 《음치의 자장가》(1971), 《면역의 원리》(1978), 《골목은 아침에 나보다 늦게 깬다》(1982), 《Three Essayist from Korea》(1982), 《웃음이 어울리는 시대》(1988), 《낙엽의 침묵》(1994), 《치자꽃》(1999), 《하얀꽃들》(1999), 《언제나 새길을 밝고 힘차게: 조경희 자서전》(2004) 《조경희 수필집》(2005) 등이 있으며, 상훈으로는 한국문학상,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본상, 청조근정훈장, 프랑스 예술문학공로상, 춘강상, 은관문화훈장,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이 있다. 서울여자대학교와 청주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희 선생은 대학 재학 때인 1938년 갓 스무 살 때 잡지 《한글》에 수필 <측간단상(廁間斷想)>이 당선된 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에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런 글을 모은 첫 수필집을 37세인 1955년 《우화(寓話)》로 출간했다.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화백의 장정(245쪽)으로 중앙문화사에서 발간했다.
이 《우화(寓話)》는 7부로 구성되는데 1부에선 봄물, 五月의 편지, 自動車, 陽地의 그늘, 古木과 季節, 얼굴, 寓話, 旅行, 속힌 이야기, 大田行, 母校를 찾아서 등 11편, 2부에선 하얀꽃, 納凉斷想, 「나이론」과 계, 平生에 무서웠던 일, 양산, 소내기, 生活苦의 辯, 치자꽃, 生活과 奇蹟, 還都의 魅力, 목물 등 11편, 3부에선 冊, 秋夕, 握手, 出版記念會, 流行, 戰線을 다녀와서, 迎秋有感, 오동잎 등 8편, 4부에선 선물, 古書와 古畵, 재떨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의 하루, 구두, 甲午年을 보내면서, 「아트리에」에서,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하꼬방, 貧困 등 11편, 5부에선 戀愛에 關한 것, 誠實과 親切의「모랄」, 未亡人의 모습, 雅量있는 女性, 사바사바, 奢侈品과 家庭, 女性과 選擧, 女性과 社會意識, 愛情과 幸福, 女性과 讀書, 염려되는 父母들의 生活 등 11편, 6부는 愛人「쥬리엩」, 戀愛映畵의 主人公 등 2편, 그리고 7부는 判官과 그들의 夫人, 衣裳의 美, 글에 對하야, 古典風景 등 4편 등 총58편을 싣고 있다.
이 첫 수필집은 조경희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얼굴> <우화> 등이 실려 있으며 이 수필집의 출판기념회는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 당시로는 파격적이라 할 만큼 시민회관 지하홀 고급 레스토랑에서 성대히 치렀다고 한다.
뿐아니라 수필가인 윤형두(도서출판 범우사) 사장의 수필 애정에 힘입어 1975년 《한국수필전집》 및 《세계수필전집》을 출간했고, 《여백의 미술》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 《한국수필 75인집》 등의 연간집을 한국수필가협회 편으로 발행했고, 이 여세로 도서출판 범조사에서 《한국수필문학대전집》 전20권을 펴내기도 했다.
<우화(寓話)>는 1955년에 펴낸 첫 수필집 《우화》의 표제작이다. 선생은 ‘《우화》에 수록된 글들은 8.15해방에서 6.25동란시 부산 피난 그리고 수복을 배경으로 쓴 글이 많다.“고 했는데 도원정이라는 빈대떡집에서 세 친구가 술을 먹다가 갑자기 흥이 나서 노래를 하는데 그걸 본 주인이 ‘비와불득명(非蛙不得鳴)’이라며 꾀꼬리 부엉이 까마귀의 노래 심사를 늙은 호랑이가 한 이야기를 해 준다. 15일 후의 심사 때까지 꾸준히 개구리 뇌물을 바친 까마귀가 이겼다는 내용인데 옛날이야기로만 그치지 않고 오늘에도 모두 산중 늙은 호랑이가 되어서는 어찌 흑백을 가릴 수 있으며 양심과 정의의 길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교훈적 수필이다. 여기에 대해 서정범 교수는 ”풍자는 인간과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매섭게 꼬집어 비판을 하는 동시에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는 수법의 하나“가 된다면서 ”풍자는 사회적으로 불안전하거나 가치관이 흔들리는 시대 또는 폐쇄화한 사회나 언론이 제약을 받고 있는 환경에서 더욱 활발하게 작품에 사용되는 것이 특징“이라며 우화에 대한 시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얼굴>은 1966년에 펴낸 두 번째 수필집 《얼굴》의 표제작이며, 1977년 ‘범우문고 251’로 나온 수필선집 《얼굴》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얼굴>만큼 진솔한 수필이 있을까 싶게 선생의 글맛을 느끼게 하는 수필도 없을 것 같다. “지금도 내 생김이나 인상이 나쁘다고 여기고 있다. 나는 일찍이 얼굴이 예쁘지 못해서 비관까지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던 언니도 친구도 빼앗겨 버려서 미국에 계신 아버지께 원망과 항의의 편지까지 보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얼굴보다 마음이 아름다워야 사람 노릇을 한다며 타일렀다. 그 훈시가 생활신조가 되었다. 아름다운 인품을 느낄 수 있으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미남 배우 로버트 테일러보다 희로애락의 곡절이 배인 조화의 미로 어우러진 버나드 쇼의 얼굴에서 인간으로의 매력을 느낀다는 <얼굴>은 선생을 대표하는 상징적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음치의 자장가>는 1971년에 펴낸 세 번째 수필집 《음치(音癡)의 자장가》 표제작이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면서도 노래를 부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자평하는 작가가 노래를 배우려 애쓰는 것은 사교모임 때 목침돌림이 되기 싫어서란다. 그래서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로 시작하는 부루스곡을 연습한 덕에 망년회 석상에서 인정을 받았고, 이에 ‘진주조개잡이’ 같은 노래 몇 곡을 더 익히면서 다른 사람까지 부추기까지 한다. 하지만 밤길의 콧노래와 넋두리의 노래를 부르다가 집에 오면 자장가를 부르게 되는데 그 자장가를 듣고도 아이는 잠이 드니 아이의 자장가를 위해서라도 음치에 가까운 사람에게도 노래를 지도해 주는 모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수필이다.
1978년에 펴낸 네 번째 수필집 《면역(免疫)의 원리(原理)》 는 수필만이 아니라 소설 <양(羊)>도 실려있으며, 기행수필 6편도 실려있다. 표제작 <면역의 원리>는 1974년 작이다. 선생은 면역의 원리를 일곱 가지 색을 섞어 힘껏 저으면 백색이 되는데 이런 변하지 않는 백색의 상태가 면역의 경지라고 본다.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을 위해서는 ‘지랄 외에는 다 배워두라’는 말처럼 뜻하지 않은 세상일을 이겨내는 방법은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고 그 이치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며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면역의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골목>은 1982년에 펴낸 다섯 번째 낸 수필집 《골목은 아침에 나보다 늦게 깬다》란 선집의 표제작으로 1982년 작인데 그 <골목>의 첫 문장을 제목으로 했다. 한데 이 문장은 선생 삶을 보여주는 가장 진실한 표현일 수 있다. 그만큼 열심히 성실히 부지런히 사신 것이다. 골목은 모든 삶의 현장이다. 권력이 있는 곳, 부와 영광이 있는 곳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 대부분의 삶이 이뤄지는 삶의 현장이다. 물건을 파는 사람, 사는 사람, 그것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터다. 부드러운, 거센, 가는, 기운 빠진 목소리, 젓갈, 무, 두부, 엿 장사, 칼 가는 사람, 구공탄 찍는 사람, 80년대의 우리 모습이다. 골목을 봐야 그 나라와 국민의 생활 실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데 선생은 골목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하고자 했다.
선생은 이 수필집의 후기에 ”지나간 날을 돌이켜 볼 때, 나는 골목 안에서 살았던 때가 가장 좋았던 때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내가 <골목>이라는 수필을 구상할 때는 그 골목은 숱한 역사의 인물들이, 특히 ‘일제시대에 지하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지나가던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골목>을 썼다.“고 회고했다.
<웃음이 어울리는 시대>는 1988년에 펴낸 여섯 번째 수필집 《웃음이 어울리는 시대》의 표제작으로 1982년 작이다. “늘 일하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커온 우리들의 구부러진 두 다리처럼 얼굴의 표정도 무표정으로 굳어지고 만 모양이다.”처럼 “여자 웃음소리가 담 너머까지 들리면 집안이 망한다는 심한 말도 있”던 우리나라 여성들의 예의범절은 웃음도 제한을 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너털, 비웃음, 눈웃음, 코웃음, 미소, 폭소, 홍소(哄笑) 등의 웃음들을 들면서 우리 국민이 웃기를 좋아하는 국민이었을 거라고 한다. 요즘은 어떤가. 자유분방하다. 하지만 여성의 아름답고 즐거운 미소는 웃음이 어울리는 주위 환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펴면서 1980년대 위축되어 있던 당시 여성의 권익을 염려한다.
<낙엽의 침묵>은 1994년 펴낸 일곱 번째 수필집 《낙엽의 침묵》 표제작으로 1994년 작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떨어져 나간다는 일이 마치 우리들의 사정같이 생각되”고, “단풍과 낙엽은 우리들의 삶과 죽음을 상기시킨다.” 낙엽의 침묵은 순탄할 수 없는 우리 삶을 생각게 한다. 선생은 벌레에 뜯긴 낙엽처럼 상처투성이의 생애를 생각하고 나아가 지구촌 안의 수많은 비극까지 넓혀 생각한다. “떨어지는 것은 비참하고 슬픔이 뒤 따른다.”며 안타까워하지만 “낙엽도 썩어져 나무의 거름”이 되고, 흙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고도 본다. 낙엽의 침묵은 겸허하게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삶을 상기시킨다.
<치자꽃>은 1999년 펴낸 여덟 번째 수필집 《치자꽃》의 표제작으로 1952년 작이다. “치자꽃은 경이 그것이었다.” “백합이나 찔레꽃에 지지 않는 강렬한 향기를 담고 있었다.” “길게 말아 세운 머리 송이 하나하나가 풀리면서 꽃이 되는” 치자꽃을 실제로 본 느낌과 놀라움을 정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른 열매로만 보았던 치자와 실제 꽃으로 본 선생의 놀라움은 제대로 알아야 진실을 본다는 것이다. “치자꽃의 높은 화격(花格)은 내음에 있다.” 외모보다도, 육체보다도, 정신과 높은 교양과 양식은 꽃에서 향기를 제일로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선생의 세상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 그리고 선생의 생각을 치자꽃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얀 꽃들>은 1999년 펴낸 아홉 번째 수필집 《하얀 꽃들》의 표제작이다. 옛날 어느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데 좋아하는 꽃이 뭐냐는 질문을 했다. 다들 화려한 꽃의 이름들을 댔지만 한 규수만 목화의 아름다움을 들었단다. 꽃으로만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유익한 꽃이라는 데서 덕스러운 규수로 인정되어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선생은 “꽃이면 으레 울긋불긋해야만 아름답다고 느껴진 때도 있었지만 아카시아꽃, 정향, 찔레꽃, 치자꽃, 하얀꽃들은 그 색체의 혼란한 것을 자랑하지 못하는 만치 향기가 일품이다. 하얀 꽃치고 향기롭지 않은 꽃은 없다.“면서 ”꽃은 자연이요 자연은 곧 우리들 생활과 연관된다.“고 했다. 하얀 꽃 같은 친구를 그리워하는 작가의 마음은 바로 인격을 중시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상으로 조경희 선생의 수필집 표제작들을 통하여 어떤 성향의 글쓰기를 하는가를 살펴보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삶 속 이야기이면서도 깊은 사유가 있고 따뜻한 정이 있고 간절한 소망들이 들어있다. 특히 선생의 수필들은 읽기에 참 쉽고 편한데 그것은 우리와 공유되는 이야기들이고 글감을 멀리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가져오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고 늘 보고 겪는 이야기인데도 진부하지 않게 읽어지게 쓰는 선생만의 독특한 글쓰기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글이란 절대로 자기를 속일 수 없을뿐더러 남을 속일 수도 없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낀다. 아무리 자기를 가식하고 허장성세의 곡필을 휘둘러 봐야 그것은 문면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래서 문학은 인간의 양심이라는 말이 이뤄지고 글은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 성립되는지도 모르겠다.’(조경희의 <글을 쓰는 어려움> 중)는 진실함의 글쓰기 때문일 것 같다.
이런 선생의 수필세계는 ”탑을 쌓아올리듯 생활에서 얻은 경험의 이삭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진실한 자세로 수필을 쓴다고 하겠“으며, 그래서 ”그의 수필을 읽으면서 잃었던 인생의 이삭들을 다시 줍게 되며 그 인생의 이삭들에 대해 애정의 눈을 뜨게 하여 나의 인생 탑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곧 독자와 일체감을 갖게 하는 글쓰기인 것이다. 따라서 조경희 수필세계를 요약한다면 ”관조의 세계를 통해 현실과 사물에 대한 해석으로서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 내어 자기라는 탑을 쌓고 있는 하나의 인생기록“이라고 볼 수 있고, ”그 인생의 탑에는 내면으로 응결된 울음과 웃음이 서려있는 열매들이 가득“한데 ”이 안에 있는 열매는 화려한 빛깔과 사치한 맛을 내는 과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를 평했듯 수수한 모양과 맛을 지닌 배(梨)“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수필은 새삼 수필의 본 자태가 무엇인가를 생각게 해주는 글들이다. 또 그의 수필에서 우리는 현란한 수사학을 결코 볼 수 없다. 평범한 언어로 빚은 야산의 들꽃 같은 소박한 향내가 있을 뿐이다. 작가 스스로 글을 업으로 삼고자 쓴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소위 수필이라는 형식의 글을 계속 쓰다 보니까 수필가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다고 실토한다. 조경희 수필의 특징은 한마디로 일상생활에서 느끼게 되는 자잘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반성하는 사색의 거울인 셈이다.“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이처럼 조경희 수필에는 자신의 삶에서 체득한 삶의 진실 내지 진리를 아낌없이 누군가에게 주고싶어 하고 실제 그리하려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의 수필 전반에서 풍기는 향기 내지 보여지는 이미지는 수수한 모양과 맛을 지닌 순박한 배(梨)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다 할 정도로 장관이라는 최고위직, 여러 기관장들을 지낸 분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고 겸손한 분으로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일 것 같다.
오래전 정릉의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그 겸손함과 근검함에 크게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장관직에 계실 때도 도우미는 있었지만 직접 살림을 살고 남편을 섬기는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시던 분인 것을 잊을 수가 있다. 오늘 이렇게 선생의 고향에서 선생의 삶과 문학을 살펴보게 된 것이 선생으로부터 너는 어떤 인생의 탑을 쌓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 것 같아 심히 송구스럽고 부끄럽다. 이런 선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4. 나가며
조경희 선생을 기리는 사업으로 조경희수필문학상 운영위원회(운영위원장 김성수 주교)가 ‘한국 수필가들의 사기 진작과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한국 수필문학 발전에 기여하고자 조경희 수필문학상을 제정, 시상’(조경희수필문학상 취지)한다며 2008년 1회부터 2022년 14회까지 시상한 바 있다.
수상자는 1회(2008) 허세욱, 2회 정목일, 3회 이경희, 4회 유혜자(해외작가 김영중), 5회 윤재천(해외 이정아, 신인작가 김미원), 6회 맹난자(해외 유숙자, 신인 김명희), 7회 이정림, 8회 정호경(신인 김창식), 9회 염정임, 10회 홍혜랑, 11회 반숙자(신인 정진희), 12회 지연희(2019), 13회(2021) 최민자, 14회(2022) 문혜영이었다. 코로나로 2020년과 2021년을 쉬었고, 14회로 사정상 시상이 종료되었다. 종료된 상황이 어떤 것이든 속히 해소되어 선생의 수필 사랑 뜻을 계속 펼쳐갈 수 있었으면 한다.
‘한국수필가협회’ 하면 ‘조경희’이고, ‘조경희’ 하면 ‘한국수필’이요, ‘한국수필가협회’다. 그런데 어떤 사유로든 선생의 뜻을 제대로 기리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중단된 조경희수필문학상은 한국수필가협회에서도 시행할 수 있다. 다른 어떤 사유로도 선생의 뜻이 왜곡되거나 그 공로가 폄훼되면 안 될 일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강화군이건, 한국수필가협회이건, 유족이건, 어떤 이해타산도 접고 오로지 월당 조경희 선생의 공과 뜻을 기리는 일에 당장이라도 나섰으면 싶다.
한국수필 문단을 이만큼이나 되게 한 분, 한국수필 문단이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 뿐 아니라 창립 50주년을 넘어 53년을 맞은 이 즈음의 한국수필가협회와 월간 한국수필이 조속히 선생의 이름을 높은 수필문학의 탑으로 세워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