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META

道에 조화로운 技의 옷을 입혀야

느림보 이방주 2024. 5. 9. 11:22

한국수필 7월호 권두 칼럼

道에 조화로운 技의 옷을 입혀야

 

정치 행위는 도(道)와 기(技) 중 어디에 중심을 두어야 할까. 문득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어느 일간지에서 읽은 칼럼이 생각난다. 칼럼을 쓴 논설위원은 정치가 道보다 技에 의존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선거에서 技에 의존하려면 속셈이 시커멓거나[黑] 얼굴이 두꺼워야[厚]한다고 주장한 것 같다. 결국 현실은 道가 技에 말려들어가 속셈과 얼굴의 두께로 결판나 버렸다. 가치의 혼돈으로 인하여 유권자들은 道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본적 교양을 잃어버리고 후안무치한 곳으로 마음이 쏠린 듯하다.

‘政者正也’라. 정치라고 하는 것은 바른 것이다. 곧 ‘정치는 道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위정자가 도적질을 하지 않으면 백성도 도둑질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현실에 맞게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정자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백성도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정치가 어찌 道만 가지고 되겠는가. 道에 조화로운 技로 옷을 입혀야 보다 활기차게 상생하는 태평성대를 이룩할 것이다. 그러나 道와 技가 충돌할 때는 道를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정치인들이 지나치게 시커먼 속셈과 두꺼운 얼굴 감추기를 하려는 技에 국민들 판단력까지 마비 증세를 일으킨 것 같다. 이른바 ‘정치 IQ'가 마비된 것이라고들 평가한다.

정치 지도자는 도덕적이고 지혜로워야 하고 사회 문화의 가치 기준을 道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다. 중앙정치이든 지방정치이든 국회의원이든 지방의원이든 간에 성실하고 공정한 이념을 가지고 민주적이고 공평한 사회를 구축하려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지도자는 국민을 중심에 두고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성현들이 가르친 정치이념이다. 두고 보아야 할 일이긴 하지만 지난 선거에서는 자신이나 정치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저버리고 技를 앞세운 정치인은 물론 정치 지혜가 마비된 유권자도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 문인들은 정치를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일은 변해가는 문단의 현실이다. 예전에는 정치가 문학을 닮지 못해 안달을 했는데, 오늘은 문학이 정치를 닮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정치적인 문인들은 문학이 권력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예술성보다 힘 있는 사람과의 관계, 또는 자신이 힘 있는 사람이 되려고 신경 쓰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 또한 ‘문단 IQ’의 마비가 아닌가 한다. 문학의 세계에는 권력을 가진 영주도 없고 좋은 작품이라 해서 권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좋은 작품이란 창작 과정에서 작가 스스로 변환하고 성장하며 수용과정에서 독자에게 공명을 주어 함께 변환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학적 소통을 통해서 사회에 바른 가치를 제시하고 역사발전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이 아니라 예술적 감동이다. 아름다운 언어예술로 사회와 역사의 긍정적인 변환과 성장을 꾀하는 일이다.

정치가 道와 技의 조화 속에서 道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면, 문학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생각해볼 일이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다. 문채(文彩)와 드러내고자 하는 본질 즉 중심 사상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다. ‘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 연후군자(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내용이 문채보다 뛰어나면 너무 거칠어 질박하고 문채가 내용보다 앞서면 사치스러워 형식적이다. 문채와 내용이 조화롭게 어울린 후에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공자가 논어 옹야편에서 문화의 세련미와 내용의 질박미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제자들을 가르친 말이다. 공자가 지니고 있는 미학의 이상이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한 말이다. 요즘 정치 뿐 아니라 문학에도 시사점이 클 것으로 보인다.

수필은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고 한다. 철학적 인식을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필에서 대상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칫 철학적 주제에 치중하다 보면 예술성이 미흡해서 촌스럽게 보이고, 미적 형상에 치중하다 보면 내용의 철학성이 희미해져서 문장의 사치에 머물게 된다. 인식과 형상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공자가 말하는 ‘文質彬彬’에 이르렀다고 인정할 것이고 드디어 예술성을 지닌 문학작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수필도 문학예술이기에 인식과 형상이 조화를 이루는 ‘文質彬彬’이 이상이다. 그런데 수필은 세계에 대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인식을 보편적인 삶의 진리로 개념화하여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철학적 인식의 진솔함에 살짝 무게를 두어도 좋을 것이다. 문채의 아름다움보다 철학적 깨달음이 우선이라는 의미이다. 정치가 道와 技의 조화를 이루기 어려울 때 道를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와 같다. 그래도 현학적인 철학성은 읽는 이를 황당하게 하고 지나친 세련은 사치스럽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으므로 신중함은 잃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한국 수필 문학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한다. 수필문학이 문학을 선도하고 문학이 앞에서 정치를 이끌어 한국의 역사가 고급지게 꽃피울 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한다.

(2024년 7월호 권두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