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이방주 2024. 4. 2. 13:53

적소(謫所)에서

 

적소에서 봄을 본다. 호수 가까이 버드나무 가지가 노릇노릇 연두로 물들었다. 소나무 숲엔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산은 마을을 가로막고 강은 산을 비집고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내어준다. 등잔봉 줄기가 호수에 잠기는 산자락 끄트머리에 노수신 적소인 수월정(水月亭)이 있다. 봄이 오듯 나도 적소에 왔다.

노수신(1515~1590)은 상주 사람이다. 중종 때 벼슬에 나아가 명종 때 유배되었다가 선조 때 풀려난 정치가이자 유학자이다. 열일곱 살부터 장인 이연경에게 십년공부를 하여 스물일곱에 급제했다. 이조좌랑까지 올랐으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을사사화 때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진도로 옮겨져 19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다. 다시 이곳 산막이 마을 달래강 가운데 작은 섬으로 옮겨졌다. 여기에 초막을 짓고 물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2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선조는 노사신의 학덕을 높이 보았는지 즉위하자 불러서 벼슬을 주었다. 대사간,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으로 할 만한 벼슬을 다 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진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이황, 김인후, 기대승 등 학자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자신만의 학문의 경지를 구축했다. 수월정 앞 유적비는 그의 행적이 우연이 아님은 시사했다.

수월정은 노수신의 후손들이 그의 적소를 기리기 위해서 연하동에 지었는데 괴산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이자 이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노수신이 유배생활을 한 작은 섬은 가시 담장이 없더라도 위리안치나 다름없다. 유배지는 섬이 아니라도 섬이다. 섬은 단절이다. 처음 유배지였던 진도가 그렇고, 추사의 유배지인 제주가 그렇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청령포는 섬은 아니라도 철저히 단절된 공간이다. 다산의 유배지도 그렇다. 김대중이나 신영복이 머물던 감옥도 단절이다.

유배지가 시공을 초월하여 단절을 의미하듯 단절의 시간을 살아내는 방법도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로 통한다. 다산은 강진에 유배되어 18년간 후학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는 한편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수백 권의 저서를 저술하였다. 초의선사를 통하여 제주에 있는 추사 김정희와 소통하고 형인 자산과도 소통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감옥에 있는 동안 책을 읽으며 세계와 소통하였다. 신영복 교수도 감옥에서 책을 읽고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아서 몇 권의 저서를 남겼다. 노수신은 20여 년간의 유배생활 중 독서가 그의 학문적 경지를 굳게 만들어서 사면과 동시 조정에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소에 봄이 왔다. 적소라지만 수월정에 나도 와서 물을 보며 달을 그리니 단절은 아니다. 여기는 괴산에서도 경치가 빼어나다는 연하협이다. 달래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바라보면 병풍처럼 둘러친 바위 사이로 낙랑장송이 하늘을 가린 그 아래 맑은 물이 흐른다. 연하협에서 지류를 따라 올라가면 바로 갈은구곡 들머리 갈은동문에 들어선다. 노수신도 강선대, 칠학동천을 지나 선국암에 이르러 신선과 마주앉아 바둑을 두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퇴계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주자를 따르지 않고 선가를 따른 것이 선국암 대국에서 얻은 깨달음일지도 모를 일이다.

적소는 끊어짐이 아니라 이어짐이다. 요즘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소통하지만 옛사람들도 알음알음으로 통하며 살아냈다. 산막이 마을은 산이 막아섰지만 강이 길을 일러 준다. 노수신은 이곳 괴산에서 고향인 상주로 통하는 큰길이 난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영령이 있다면 쌓은 학덕으로 배향된 괴산 화암서원, 충주 팔봉서원 뿐 아니라 상주 도남서원에서도 달 밝은 밤이면 수월정에 다녀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어디든 적소이다. 규범이 가로막고 관계로 얽매인다. 혼자서 산막이에 온 나도 서 있는 곳마다 적소이고 단절이라면 단절이다. 하고 싶은 일은 늘 규범이라는 멍에에 매어있다. 그러나 단절이 곧 이어짐이니 굳이 벗어나려 발버둥 칠 까닭도 없다. 씌워진 멍에야 벗고자 하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냥 옛 사람이 하던 대로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하면 될 일이다. 막아서는 산의 덕이든 틔어주는 강의 덕이든 천지좌우로 이어지리라 믿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