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수필창작 교실/등단 추천작품

조정순 <손톱>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한국수필] 2024 3월호

느림보 이방주 2024. 2. 10. 21:00

심사평

수필은 변환과 성장의 문학

이방주

조정순의 <손톱>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한다. 수필 창작은 수행의 과정이라는 문학적 효과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수필 창작에 임하는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로 삼는다. 이와 같은 사유의 과정에서는 대상이 된 체험에서 모순을 발견하고 현실적 삶에서 자아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설정하여 내면의 변환과 성장을 가져온다.

<손톱>은 입원한 남편의 손톱을 깎아주다가 어머니의 손톱을 떠올리며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참사랑을 깨닫는 순간이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는 시어머니의 차별 대우에 대하여 항의했던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인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의 참뜻을 깨닫는다. 두 작품 다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했지만 그 사유의 과정이 변증법적 변환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독자에게 주는 울림이 크다.

수필은 일상에 대한 해석이고 그 해석은 자아의 성숙과 변환을 가져오는 수행의 문학이라는 양식적 특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조정순의 문체는 잔잔하고 따뜻하다. 꾸밈없는 문장이지만 결코 촌스럽지 않다. 일상을 소재로 이만한 공명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수필의 구조를 이해하고 쓰기 때문이다. 수필 창작의 기본 상식을 지닌 작품이라 추천한다. 큰 걸음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수상소감

12월에 핀 장미처럼

조정순

글을 쓰고 수상소감을 쓰다니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도, 꿈도 못 꿨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나하고는 상관없는 특별한 사람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던 나였습니다. 다만 책을 읽는 것은 좋아해서 내일이 시험인데 빌려온 책을 밤새워 읽는 불량학생이 되기도 했고 한때는 닥치는 대로 꽤 열심히 읽기도 했지만, 그 또한 옛일이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 친구가 몇 년 동안 끈질기게 권유하여 글 마당에 발을 들여놓고 또 운 좋게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교재 표지에 철학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움츠러들었습니다. 수필교실 문우들의 경력에 나는 더욱 작아졌지만, 선생님의 설명은 용기를 갖게 했습니다. 글은 쓰기 이전에 사물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깊은 사유로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30년 전에 따 놓은 운전면허증이 장롱면허입니다. 등단도 장롱면허 만들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쓰자고 다짐해 봅니다.

12월에 아파트 울타리에 장미가 피었습니다. 크게 눈길 주는 이 없고 언제 스러질지 몰라도 스스로 보람이겠지요.

글 마당으로 불러준 문우 김선옥 시인과 이끌어주신 이방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약력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강좌 수강

서원대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 수료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시집 《수탉과 엄마》 《오래된 일기장》

E-mail : dydkssk1126@naver.com

 

손톱

조정순

남편 손톱을 깎아주었다.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아 찡그리고 깎는 것을 보고 민수가 다가온다. 민수는 바로 옆 병상에 있는 교통사고 환자로 붙임성 좋고 애교도 많은 청년이다. 내가 환자 옷을 갈아입히거나 휠체어에 태우느라 쩔쩔매면 부탁하지 않아도 “이모 내가 도와줄게” 하며 와서 도와준다.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늙은 나를 보고 ‘이모’라고 부르는 것도 처음엔 좀 당황했지만 나쁘지 않다. 오늘도 또 자기가 깎아주겠다고 다가온 것이다. 고맙다. 나는 사양하는 것도 없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편하게 손톱깎이를 건네주었다.

민수 손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민수의 보드라운 손끝에 갖가지 예쁜 무늬로 장식한 반짝반짝 빛나는 인조손톱을 붙인 게 아닌가, 여자들이 손톱을 가꾸는 것은 보통이지만 인조손톱을 붙인 남자 손은 처음 보았다. “아니 남자도 이런 거 해” 하고 물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친구가 서울에서 네일숍을 하고 있어서 청주 내려오면 해주고 간다고 한다.

“여친 있으면 빨리 결혼하지 그래” 하는 내 말에 연애만 하고 결혼은 안 하겠단다. 얽매이는 것도 싫고, 결혼해서 아기 낳아 키우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데 그 돈으로 즐기면서 살겠단다. 매스컴을 통해 많이 들어본 얘기지만 뒷맛이 씁쓸하다.

민수가 남편 손톱을 깎아준다. 남편은 손톱에도 무좀이 생겨 손톱이 누렇고 갈라지고 두께도 일정하지 않다. 민수 손과 비교가 된다. 저 못난 손으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고 생각하니 안쓰럽다. 그리고 오래전에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이 난다.

육이오 전쟁 직후 오륙십 년대는 전 국민이 다 힘들게 살았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남의 집 사랑방에서 피난 보따리로 시작한 살림이니 그 고생이 어떠했겠는가? 부모님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다. 손끝 야무지고 빈틈없는 아버지는 추수가 다 끝나고 초가집 지붕 잇는 일까지 끝나 온 동네 지붕이 노랗게 새 옷을 입어야 일손을 놓으셨다, 엄마도 여름에는 농사일하시며 채소를 길러 시장에 내다 파셨다. 겨울에도 쉬지 않으셨다. 콩을 맷돌에 갈아 두부를 만들어 팔고, 메밀묵을 만들고, 콩나물을 길러 집집이 팔러 다니셨다. 그 추운 겨울에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콩나물 광주리를 이고 나가셨다. 양은 다라이에 묵을 이고 나가시고, 두부를 이고 나가셨다. 그러니 그 손이 온전했겠는가?

엄마 손엔 금가락지 대신 늘 헝겊 쪼가리가 감겨 있었다. 특히 겨울이면 손가락 끝이나 손마디가 쩍 하니 입을 벌리고 나도 좀 쉬자고 애원했지만, 엄마는 들은 척도 않으셨다. 그 손으로 밤낮없이 일하셨다. 벌어져 아픈 손가락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은 헝겊 쪼가리로 감아주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무쇠처럼 부려먹던 육신도 힘이 빠지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손도 놓으셨다. 어느 날 손톱을 깎던 엄마가 무심히 한마디 던지신다.

“이제 손톱을 다 깎는구나!”

그동안 엄마 손톱은 늘 찌그러진 반달이었다. 엄마의 이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찌그러진 엄마 손톱에 무심했다, 늘 그러니까 왜 찌그러졌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나는 손톱이 좀 빠짝 깎여도 아프다고 하면서 항상 찌그러진 엄마 손톱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손가락엔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아프다고 하면서 벌어진 엄마 손마디는 아프겠다고 할 뿐 그냥 일상이었다. 엄마는 생선 대가리만 좋아하신다는 자식처럼 엄마의 찌그러진 손톱을 보고도, 헝겊 쪼가리로 동여맨 손마디를 보고도 엄마는 그러려니 했다. 그때는 지금만큼도 아파하지 않았다.

긍정적이고 흥이 많은 엄마는 늘 입가에 흥얼거림을 달고 사셨다. 내 육신 아픈 건 보이지 않고 주머니에 들어오는 몇 푼의 돈으로 어린 딸의 배를 채워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셨다. 한 푼 두 푼 모아 논을 장만하고, 오두막집을 사고 희망으로 사셨다. 마실방에 엄마가 들어가면 웃음소리가 담을 넘는다. 아줌마들이 모인 자리에 엄마가 바빠서 못 가면 정순이 엄마가 와야 재미있다고 엄마를 부르러 오신다. 엄마는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바쁘게 달려가 한바탕 웃음을 주고 다시 와 일을 계속하셨다.

“이제 손톱을 다 깎는구나!”라고 하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때의 고생을 생각하셨을까 아니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라고 생각하셨을까? 나에게 그 말은 손톱이 닳도록 고생한 엄마가 먼저 떠올라 가슴에 못으로 남아 있었다.

‘사랑이 있는 고생은 고생이 아니고 행복이다.’ 어느 책에서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다. 비로소 엄마의 흥얼거림의 원천이 사랑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난했지만, 마음을 모아서 살았으니 ‘엄마는 죽도록 고생만 한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살아낸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고쳐 생각하기로 했다. 엄마도 아픔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행복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실 것 같다. 무심했던 딸의 잘못은 오래전에 잊으셨을 테니까

혼자 즐기면서 살고 싶은 젊은이들이 엄마가 맛본 또 다른 행복의 맛을 알면 좋겠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조정순

나는 당돌한 며느리였다. 결혼한 지 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흥분하지 말자. 흥분하지 말자.’를 외며 쿵당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는 모처럼 오신 시어머니 옆에 다가가 앉았다. 전날 밤부터 ‘떨지 말자. 흥분해서 목소리를 키우면 절대 안 된다.’를 주문처럼 외우고 겨우 앞에 앉은 것이다. 말하지 않고는 못살 것 같았다. 그동안 참고 쌓아온 휴화산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가 이러이러하실 때 섭섭하고, 저러저러하실 때 섭섭했노라고 목소리를 낮추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나는 어머니가 우리 식구를 홀대하신다고 생각했다. 명절이나 제사 등 집안 행사 때 다른 아들네가 오면 어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가셨다. 우리는 들어가며 인사를 드려도 “왔니?” 하면 그만이시다. 남편은 명절 때 숙직이나 일직을 하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형님과 같은 청주에 살고 있어서 명절 쇠러 멀리 가는 사람들 대신 남편은 늦게까지 사무실에 있다가 다저녁때 들어왔다. 좀 전에 버선발로 반기시던 어머니는 안방에 혹은 주방에 계시면서 떠들썩한 현관에 별 반응이 없다. 다른 손주들 보고 반색을 하시던 어머니는 우리 애들에게는 대범한 할머니시다. 이런저런 섭섭한 이야기를 조심조심 풀어놓았다. 어머니는 어떤 말엔 “내가 언제 그랬니?”하시고, 어떤 말엔 “안 그러려고 해도 그리 되었다.”라고 하신다.

20여 년 참았던 말을 쏟아놓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빵빵한 배를 끌어안고 억지로 참았다가 사람들을 피해 뀌어대는 방귀만큼이나 시원하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쾌변을 보고 일어설 때만큼이나 시원하다.

동시에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가르치신 친정아버지 말씀이 전광석화처럼 떠오른다.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엔 나보다 네 살 어린 조카가 방학 때마다 내려왔다. 할머니 할아버지만 계시는 외갓집이니 방학 다음 날 내려와서 편하게 있다가 개학 이삼일 앞두고 올라갔다. 네 살이나 어린 조카지만 힘으로는 항상 내가 졌다. 아버지는 내가 져준다고 생각하셨는지 늘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을 그저 ‘싸우지 말고 잘 놀아라.’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이 내 머리를 후려치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어떻게 며느리에게 내가 잘못했노라고 말하겠는가, 나 역시 그 말을 들으려고 말을 꺼낸 건 아니다. 그저 내 속에 쌓여 썩고 있는 찌꺼기를 배출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아 어렵게 용기를 낸 것뿐이다.

‘안 그러려고 해도 그리 되었다.’라고 하신 말씀은 “내가 잘못했다”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며느리 앞에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아프고 힘드셨을까. 어머니가 어떻게 사셨는지 잘 알면서 품어 안지 못하고 터뜨린 좁은 내 소견이 부끄러웠다.

남편은 사남이녀 중 둘째다. 시댁 동네는 사백여 년 전에 뿌리를 내려 번성한 전주 이씨 집성촌으로 타성(他姓)은 가을 볏논의 피 이삭처럼 한두 집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전통을 고수하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운 편이었다. 직업 또한 국가에서 녹을 받는 공무원을 옛날 양반들의 벼슬쯤으로 여겼다. 아무리 좋은 회사에 취직을 했어도 ‘돈은 잘 번다대’ 하고 여운을 흐릴 뿐 말단 공무원만 못하고 교사만 못하게 여겼다.

형님은 나보다 18년 전에 결혼해서 농사를 짓고 사셨다. 셋째와 막내며느리도 초등학교 교사와 보건직 공무원으로 국가에서 주는 월급을 받고 살았으니 어른들 기대치를 충족시켜 주는 직업이다.

나는 네 자매 중 막내로 결혼 후에도 친정엄마와 함께 살았다. 친정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오라비도 없고 허물을 덮어 줄 비단도 없다. 딸은 출가외인이라고 생각하는 시가에서는 물려줄 재산 한 푼 없는 장모님과 함께 사는 아들 며느리가 고울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다른 며느리는 다 돈을 버는데 둘째인 나만 먹고 놀면서 남편 등골 빼먹고 사는 며느리니 백 가지를 잘한다 해도 바탕이 거슬리는 사람이었다.

손자들도 어머니가 키우셨다. 큰아들네 손자는 물론 셋째와 막내아들 손자도 바깥일 하는 며느리 대신 함께 사시며 키워주셨다.

핏덩이부터 당신 손으로 키운 애들한테 정이 더 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알면서도 내 새끼 예뻐해 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렸고 빈약한 친정 때문에 홀대한다고 따져 물은 것이다. 그것은 내 자존심이었다. 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어머니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낸 것이다. 오십이 훨씬 넘은 나이에 이처럼 사고를 치고 나서야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아버지 가르침의 참뜻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이 세상 소풍 마지막 5년은 나와 함께 하셨다. 나는 특별히 잘한 게 없다. 머지않은 날 내 모습이라 생각하며 함께 산 것뿐인데 어쩌다 경로당 할머니들을 만나면 어떻게 그리 잘하느냐고 칭찬을 하신다. 내가 잘해서 칭찬을 듣는 게 아니다. 어머니가 내 허물을 덮어주셨기 때문이다. 며느리에게 대접받는 시어머니, 그것은 지혜로운 어머니의 자존심이기도 했을 것이다.

며느리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의 흠을 덮어드릴 손수건 하나 마련하지 않고 폭탄을 터뜨렸는데 어머니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자식의 흠을 열두 폭 분홍 치맛자락으로 덮어 다독이신 것이다.

어머니에게 폭탄을 터뜨려 상처를 안겼던 당돌한 며느리도 이제 그때 어머니 나이가 되었다. 나도 이제 치마폭을 넓혀가며 아버지가 가르치신 ‘지는 것이 이기는 것’ 의 참뚯을 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