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들려주는 말씀
자연이 들려주는 말씀
- 조한금의 《바람개비꽃》 -
□ 들어가며
조한금의 수필집 《바람개비꽃》은 삶의 족적이다. 자연이 들려주는 말씀을 받아 적은 ‘그냥 그대로’ 일상의 기록이다. 잘 쓰려는 마음도 없고 칭찬받으려는 욕심도 없다. 삶의 모습 그냥 그대로이다. 수필이 고백의 문학이라면 그냥 그대로 남김 없는 고백의 말이다.
자연(自然)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간단하다. ‘저절로 그렇게 된’ ‘의도적인 행위 없이 저절로’ ‘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은 저절로 된 현상’ ‘천연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지질적 환경과 조건’ 등으로 풀이한다. ‘그냥 그대로’란 말이다. 간단하지만 거기에 삶의 진리를 깊게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하여 노쇠하고 사멸하는 과정에서 ‘그 자체 안에 운동 변화의 원리를 가진 것’이라 풀이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자연은 우리네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이해한다. 자연은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자연은 우리네 살림과 살이를 뒤에서 보듬어주고 품어 안는다는 의미이다.
노자(老子)는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 먼저 땅을 법으로 삼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땅에는 하늘의 이치가 있으므로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했다. 자연이란 인위를 가하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듣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상에 억지로 이루어지는 사업은 없다. 우주는 자연의 원리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을 디디고 산다. 자연의 원리가 바로 땅의 원초적 에너지라는 사실을 이미 노자가 설파한 것이다.
조한금의 《 바람개비꽃》에 드러난 그의 삶은 ‘天之道 損有餘而補不足’이라는 노자의 자연 사상을 몸과 마음으로 실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의 삶의 출발이었던 완도에서나, 삶의 현장이었던 목포나 인천에서나, 자연에 파묻힌 장수에서나, 자신에게서 남는 것을 덜어 부족한 이웃에게 채워주는 삶의 여정이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이 책은 작품 30편을 부별 소제목 없이 4부로 나누어 실었다. 1부에는 7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표제작인 〈詩를 품은 닭〉을 중심으로 생태주의 사고를 담아냈다. 여기에서 남에게 덜어주는 인간애가 자연에 미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연으로부터 넘치는 인간애를 전수했다고 할 수도 있다. 자연과 인간은 따로 떼어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생명공동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2부에는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모아 실었다. 〈오월의 눈물〉을 비롯하여 작품 7편은 그가 역사의 길을 어떤 생각으로 밟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3부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맺어온 삶의 여적이 드러나 있다. 존재는 관계에 의해서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동양 사상가들의 생각이다. 여기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아버지, 남편, 자식, 가족, 친구 등에 대한 사랑을 담았다. 4부는 이 시대의 원로 지식인으로서 사회와 역사에서의 사명, 여인으로서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작품에 담아냈다. 모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 바람개비꽃》에 게재된 30편을 꿰뚫는 그의 메시지는 시대에 요구되는 페미니즘을 함유한 생태주의 사고이다.
흔히 자연이라고 하면 인위적인 것과 반대 개념으로 규정짓고 만다. 그러나 조한금은 좀 더 철학적인 자연의 의미를 작품에 담았다. 그는 대상이 된 어떤 사물이든 ‘그 자체 안에 운동 변화의 원리’라든지 ‘우주에 존재하는 원초적 에너지’로 해석하였다. 예를 들면 남편을 향하여 우주의 원리나 에너지가 ‘당신 한 사람으로 축소되어 있다’라는 고백이 그렇다. 맞다. 남편은 작은 우주이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작은 우주이다.
모든 문학 작품이 다 그렇듯이 수필은 인식과 형상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수필가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문학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한금의 《바람개비꽃》에 수록된 30편의 수필에 드러난 작가의 인식과 형상을 살펴보는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하는 징검다리가 될 것이다. 문학작품을 분석하여 작가의 인식과 형상의 방법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예술 작품의 미적 가치를 규명하는 것도 또한 쉽지 않은 일이기에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바람개비꽃》 전편에 실린 작품은 ‘자연의 말씀을 받아 적었다’라고 했다. 그 자연의 말씀을 생태주의 사고,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 사랑의 변환과 성장 등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기로 한다. 또 그는 이러한 철학적 인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동원하였을까. 상상의 전략적 단계와 형상, 유비구조, 섹슈얼리티의 수용 등에 대해 사례를 들어 살펴보겠다.
□ 순환의 생태 원리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는 지난 100여 년간 문명의 엄청난 변화를 이루어냈다.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성장’ 또는 ‘발전’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상의 왜곡이다. 개발이란 말로 포장된 근대문명은 ‘도발’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미래 세대와 공유해야 할 한정된 자원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앞당겨서 흥청망청 소비하며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미래 세대의 보금자리를 끊임없이 할퀴고 파헤치는 난폭한 문명은 이제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자연의 가르침은 남는 것을 덜어서 부족한 곳을 채워야 하는데 부족한 것을 계속 훼손하여 넘치는 곳으로 퍼 나르는 행위로 지구 생태계는 재생 불가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바람개비꽃》은 근대문명의 파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전환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자연에서 생태계를 이루는 한 개체로 살면서 자연의 순환질서와 흙의 문화가 소중하다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이 작품 속에 드러나고 있다.
작품 〈봄맛〉은 친구 딸의 혼인에 참석하러 장수에서 목포로 가는 중에 보이는 ‘자연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다. 어릴 때 느끼지 못했던 ‘봄맛’을 새삼 느끼면서 봄에 깊이 들어가 자신을 돌아본다. 대개 수필가들은 대상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성찰한다. 그런데 그러한 성찰은 자신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생의 일반적 원리로 개념화 된다. 작품의 말미에서 작가는 인생을 사계절에 빗대어 비추어 본다. 앞으로 맞이할 남은 봄과 아울러 봄에 피어날 ‘내 땅’에 많은 꽃들과 생명들에 대하여 베풀어야 할 일들을 다짐하기도 한다. 내 땅이라는 삶의 영역에 있는 모든 생명을 수평적인 존재로 여기는 사유가 이 작품에 담겨 있다.
작품 〈밥이 되는 아비〉에서는 새끼의 양생(養生)을 위해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 놓은 사마귀 수컷에게서 자연은 순환한다는 생태 원리를 발견한다. ‘우리네 생명은 끝이 없으나 지식에는 끝이 있다.’는 장자(莊子)의 일설을 체험한다. 우리네 생명은 순환의 원리대로 두면 끝이 없이 순환하는 것이지 어떤 지식으로 규제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교미를 끝낸 암컷이 수컷을 ‘맛나게’ 먹는 것이 아니라 새끼의 양생을 위하여 수컷이 자신의 몸을 영양으로 헌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아비가 죽어 영양이 됨으로써 자식을 양생하는 순환의 원리를 발견한다. 작가는 ‘서로 밥이 되어 주는 삶’을 독자에게 권하고 있다. 순환의 생태원리를 인격(人格)에 대비하여 ‘당랑아비의 존귀한 충격(虫格)’이라 규정하였다. 〈땅의 사람, 바람의 사람〉에서는 농사의 기쁨을, 〈이장댁〉에서는 풀꽃 같은 인생과 인간애를 담았다.
〈시를 품은 닭〉은 닭을 기르면서 스스로를 생태주의자. 나아가서 에코페미니스트로 단단하게 다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21세기 화두는 근대의 물질주의 문명에서 벗어나 생태문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생태주의는 지구상의 생태계에서 인류를 중심으로 삼아 인류의 삶을 윤택하고 안전하게 하기 위한 환경 보존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류는 지구 생태계의 일원이고 다른 개체들과 수평적인 지위를 가지고 공존하고 상생해야 한다. 동등한 순환원리로 생성-성장-소멸을 지속하는 것이라는 사고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시를 품은 닭〉에 설정된 닭장은 작은 우주이고 축소된 생태계이다. 여기에 자아가 있고 닭이 있고 칠면조가 있다. 닭에는 암탉도 있고 수탉도 있다. 닭들의 세계는 생태주의 뿐만 아니라 에코페미니즘을 실현하기 위해 설정된 영역이다. 칠면조와 닭들에게는 자아가 인(因)이고 연(緣)이고, 자아에게는 닭과 칠면조가 인과 연이다. 그들은 서로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 사료를 주교 달걀을 받는다거나 달걀을 주고 사료를 받는다는 의미를 초월한다. 자아는 닭들에게서 행복을 받고, 닭들이 풍자하는 인간 세계 삶의 원리를 깨달음으로 받는다. 여기에서 생태계의 수평적 원리가 실현된다.
〈시를 품은 닭〉은 연작 수필이라 할지 중편수필이라 해야 할지 총 아홉 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렇다.
닭장을 축소된 생태계 영역으로 의미화 한다.
닭의 생태를 통하여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닭들이 저만의 안락한 삶을 위해 쌈닭이 되고 화해하는 과정 묘사를 통해서 인간사회를 해학적으로 비판한다.
성계가 된 닭들이 가지고 있는 남성 중심주의를 풍자한다. 수탉은 암탉에게 제왕처럼 군림하려 하고, 암탉은 수탉의 눈치를 보면서 ‘무너진다.’며 닭의 생태가 인간의 작은 사회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칠면조와 닭의 관계 묘사를 통해 생태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칠면조의 부부싸움에서도 ‘칼로 물 베기’인 인간의 부부싸움을 발견한다.
입원한 남편을 생각하면서 병든 닭을 치료해주며 생명의 소중함을 실천한다.
수탉들의 윤간으로 암탉이 숨지자 인간 사회 성범죄자들의 추악한 현실을 개탄한다.
태풍을 통하여 닭이나 인간이나 생로병사의 고통이 있음을 실감한다.
암탉 수탉, 칠면조들은 자연 그대로 두면 알을 낳고 잘 먹고 잘 놀면서 영역을 지탱한다. 자연 그대로 두면 생태계는 유지되고 순환한다는 원리를 발견한다.
이 작품의 인식과 해석의 과정은 [관찰의 대상 설정( ), 관심-관찰-현실 풍자(), 현실 인식(), 인식과 해석(), 인간애(), 사회 현상에 대한 고민() 우주적 통찰과 개념화(), 자연의 말씀()]과 같이 요약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이처럼 수필 〈시를 품은 닭〉은 조한금의 수필집 전편에 담긴 인식과 형상을 하나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가 생태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바탕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해학, 풍자, 비유, 묘사를 여기에서 거의 볼 수 있다. 닭이나 칠면조를 대상으로 하는 중에 남편에 대한 애정과 주변에 대한 인간애도 담아냈다.
〈번개의 외사랑〉에서 자연과 자아의 교감은 절정에 달한다. 번개는 ‘하늘의 벌’이라고 생각했던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나 ‘그가 외사랑 하다가 돌아가’버린 것으로 인식한다. 천계(天界)와 지계(地界)가 다르지만 그가 찾아온 것이라 인식한 것은 매우 독창적 사고이다. 작가는 천둥까지도 하늘이 내리는 사랑의 말씀으로 듣는 귀를 가졌지만, 그것을 외사랑으로 해석하여 ‘일방적인 뜨거운 포옹’에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돌려보내는 지혜로 대처하였다. 자연의 말씀에 순응하고 적응하는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
문학은 시대정신과 역사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야 한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이 없이 문학이 어떤 효과를 지니고 민중에게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문학예술의 본질은 미적 가치의 구현이라고 하겠지만, 인간사회의 불평등, 부조리, 권력의 횡포, 왜곡된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고발은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한금의 문학 세계에는 자신이 아프게 체험한 현실에 대한 기록과 고발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부조리한 역사를 비판하고 있다. 〈오월의 눈물〉에서 오월을 ‘덧나는 아픔’으로 규정하였다. 이 작품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목포에 살면서 겪은 일을 소재로 한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목포에 근무하던 남편은 광주로 취재차 출장 가 있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이 작품에 담긴 당시의 상황은 다음 단어를 통해서 모두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월이면 덧나는 아픔, 촛불, 시가행진, 광장, 조기 하교, 불통, 공수부대/데모대, 생필품, 전두환 물러가라, 유비통신, 대검, 쇠 곤봉, 여고생 유방, 대학생, 끓어 앉히고, 군홧발, 헬리콥터, 고립무원, 무정부 상태, 도청 앞, 총성, 시신, 관(棺), 사태
현대사에 며칠 동안이지만 고립된 한 도시에 이러한 어휘들이 한꺼번에 존재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서운 낱말들이다. 부끄러운 우리의 현대사이다. 지금은 모든 것이 밝혀지고 해결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일을 겪은 사람들의 가슴에 묻힌 아픔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겠는가. 광주의 아픔은 〈〈택시운전사〉를 보고〉라는 작품에서도 다시 한 번 소재로 삼았다. 푸른 눈의 목격자인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가광주의 상황을 본국에 송고하여 세계에 알려졌듯이 기자였던 남편의 취재수첩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2011년 조한금 수필가의 일기장과 남편(당시 동아일보 최건 기자)의 불발된 취재 수첩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편이 군부에 의해 강제로 해직되었던 가정의 고통을 일부 보상 받기는 한 셈이다. 작가는 이런 부당하고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직접 비판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상황을 ‘보여주기’ 기법으로 적나라하게 고발하였다. 이 또한 수필의 역할이라고 할만하다.
〈혼상(魂床)을 이고〉에서는 분단이라는 역사의 비극을 소재로 했다. 여성 기업인으로 개성공단을 방문하면서 분단 이전 황해도에서 엿 공장을 운영하던 이모의 삶을 생각한다. 국제 정치는 무심하게 화해와 냉전을 반복하지만, 세월이 지나 저승의 문턱까지 와 있는 이산가족 노인들은 애간장이 녹아든다. 직접 겪은 역사의 비극이 잘 드러나 있다.
□ 사랑법의 변환과 성장
이 작품집에 나타난 사랑을 그냥 편하게 ‘사랑법의 변환과 성장’이라 하려고 한다. 동양에서는 공자의 인(仁)이나 석가모니의 자비(慈悲) 사상이 사랑과 통한다고 본다. 불교에서 자(慈)는 우정과 자애 같은 수평적이거나 하향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비(悲)는 연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仁)은 혈연관계에서의 사랑으로 관계에 따라 조금씩 다른 사랑의 유형을 보인다. 예수는 참된 사랑은 자기희생에서 온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그리스어에서 사랑은 에로스(eros), 아가페(agape), 필리아(philia)로 표현되는데 아가페는 사람의 신에 대한 사랑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존재를 존중하면서 목적을 두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 아가페적인 사랑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두 사랑의 주체가 마주하여 존재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마찬가지고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공존해야만 가족 사랑도 이웃 사랑도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필리아는 친구나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 사회적 공감이나 교감을 말한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은 자신과 생각이 같거나 같은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 또는 가치관이나 정서가 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필리아적인 사랑은 자기 친구나, 동료, 동인회에 대한 사랑으로 이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이 이기적이라는 나락에 빠지지 않으려면 필리아적인 사랑이 끊임없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지향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원로 여성이며 문인인 작가의 작품집 《바람개비꽃》에서 이러한 사랑이 발견된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 친구, 이웃, 동료뿐만 아니라 닭(계순이), 칠면조(미스터 칠) 같은 동물들이나 꽃, 주변 산야 등 생태계의 숨탄것들, 사회, 역사, 조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그것이다. 그의 사랑은 삶을 함께하는 남편이나 자식들, 조카에서 시작하여 생각을 함께하는 친구, 사업을 함께하는 동료로 확산한다. 이렇게 시작한 사랑은 다시 생태계의 모든 것은 물론 역사나 몸을 담고 있는 사회로 확장된다. 장수에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며 흙과 가까이 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목적 없는 사랑을 배웠기에 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에서 시작하여 대상에 따라 필리아적 사랑을 배우다가 결국 모든 대상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돌아온다. 사랑법의 순환이다. 그의 사랑의 학습은 자연이 스승이다.
그의 사랑의 변환과 성장은 전 작품을 통하여 고르게 진행된다. 예를 들면 작품 〈양파와 아버지〉 〈거, 누구 없수?〉 〈큰일 낼 아이〉 〈에머랄드 혼의 호사〉 〈혼상(魂床)을 이고〉 등에서는 부모나 자식, 혈육, 그리고 남편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작품 〈井山, 그가 가던 날〉 〈이장댁〉 〈참 좋다잉!〉 같은 작품에서는 동료나 생각을 함께 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작품 〈땅의 사람, 바람의 사람〉 〈밥이 되는 아비〉 〈흙, 그 변신의 미학〉 〈빙그레 웃는 섬〉 〈날개와 검은 비닐봉지〉는 자연과 고향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5월의 눈물〉 〈〈택시운전사〉를 보고〉는 시대와 역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담아냈다.
그의 사랑의 변환이 절정에 이른 작품은 표제작인 〈詩를 품은 닭〉이다. 이 작품에서 사랑은 전원생활을 하며 닭과 칠면조를 기르면서 시작된다. 처음 시작은 ‘땅에 가하는 노력 대비 성능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서 시작했다. 밭을 줄여 닭장을 짓고 손쉽게 닭을 기르면서 달걀을 먹으려는 계산이었다. 일종의 목적이 있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닭의 생태를 보면서 그들에게 친근감을 갖게 된다. 남편 병구완을 하는 중에 병든 닭에 대한 치료는 가히 희생적이다, 조건도 없고 계산도 없다. 아가페적 사랑으로 변환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사랑의 변환과 성장은 수필이 수행의 문학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전략적 상상 구조와 형상
지금까지 작품을 통하여 드러난 세계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순환의 생태원리,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 사랑법의 변환과 성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형상하기 위해 독창적으로 도입한 전략을 알아보기로 한다. 문질빈빈(文質彬彬)이란 말이 있다. 인식이 형상을 따르지 못하면 촌스럽고, 형상이 인식보다 화려하면 사치스럽다는 말이다. 곧 인식과 형상이 황금비를 이루어야 독자의 공명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대상에 대하여 본질을 추구하고 작가만이 볼 수 있는 독창적인 인식을 했다 해도 좋은 그릇에 담아내지 못하면 문학적 미감은 보장되지 않는다.
이 작품의 형상의 특징은 첫째 상상의 전략적 단계, 둘째, 유비구조, 셋째 섹슈얼리티의 표현이다. 이 밖에도 변증법적 전개라든지 특이한 비유와 묘사, 풍자적 표현이 개성을 보이고 있지만 남겨 두기로 한다.
첫째 상상의 전략적 단계는 작품 〈여기, 누가 나와 같이〉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시인인 가스통 바술라르(Gaston Louis Pierre Bachelard 1884~1962)는 문학적 상상의 전략적 단계는 물질적 상상-역동적 상상-원형적 상상의 단계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작품의 상상의 단계를 알아보기 위하여 문단 내용을 요약해 본다.
故 최하림의 ‘보다 진정한 감정은 눈물이다.’라는 시구를 소환하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세 식구 살림을 맡아하며 눈물을 참고 쌓아왔다.
눈물을 최루(催淚), 산루(酸淚), 함루(檻淚), 고루(孤淚)로 자아의 인생 역정과 비유하다.
최근 자아의 처지와 환치되어 유폐된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진정한 감정은 눈물임을 깨닫다.
수녀님의 종신 서원식에서 예수님의 ‘가시관의 의미’를 깨닫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다.
눈물은 하느님이 태초에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각 문단의 내용을 요약하면 상상의 단계를 파악할 수 있다. , 문단은 눈물이라는 소재의 물질적 본질을 천착하는 과정이다. 물질적 상상의 단계는 대상의 물질적 속성을 천착하여 거기에 숨겨진 이미지를 환기하는 단계이다. , 문단은 역동적 상상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역동적 상상의 단계는 대상에 숨겨진 물질적 본질을 통하여 자아를 성찰하는 단계이다. 눈물을 거울삼아 자아의 인생 역정을 비추어보는 단계이다. 눈물의 성격을 빗대어 자아를 표현함으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통하여 인간이 지녀야 하는 가치 있는 삶의 개념을 규정한다. , 문단은 원형적 상상의 단계이다. 원형성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환기되는 초월적 의미의 세계를 말한다. 수녀의 서원식을 통하여 예수의 가르침을 깨닫고 눈물은 하느님이 인간에 내린 선물이라는 원형 상징성을 찾아낸다.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가치의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둘째, 유비구조는 사물과 사물의 유사성을 찾아 생각과 느낌을 확장하는 구조이다. 수필은 상관성이 있는 사물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지적 정서적 의미를 확대하는 표현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공명이 큰 수필 작품은 대개 상관성이 큰 사물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냄으로써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작품 〈참 좋다 잉!〉은 어린 시절 완도에서 삶의 기억을 소환하여 친구들과 영동 양산팔경 여행의 행복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전반부에 완도의 삶을 후반부에 양산팔경 관광을 배치하였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상관성 있는 사물의 일화-표현하고자 하는 일상’을 교차적으로 배치하여 그 표현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셋째, 섹슈얼리티를 수용한 작품을 찾아본다. 에코페미니즘이 수필 창작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형상의 한 방법으로는 섹슈얼리티(sexuality)의 수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성(性, sex)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질서이다. 고려 말부터 우리 문학에는 섹슈얼리티의 표현이 비교적 자유스럽게 수용되었다. 고려 말의 속요, 조선의 사설시조, 판소리, 소설 등에 현대문학 못지않게 매우 사실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렇지만 수필문학에서는 금기시 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수필은 서술자가 작가 자신이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이다. 21세기 수필이 생태주의 또는 에코페미니즘을 지향한다면 섹슈얼리티한 표현이 배제되는 것은 온전하게 미적 표현을 하는데 족쇄를 채우는 격이라 할 것이다.
작품 〈詩를 품은 닭〉에 닭이나 칠면조의 교미 장면에는 에로틱한 묘사가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재미를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풍자하여 인간 세계의 남성의 횡포나 부당한 성윤리를 비판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생태계의 모든 개체가 수평적으로 상생하듯이 남성과 여성도 공존 공생해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다.
□ 휘갑치기
수필집 《바람개비꽃》은 자연이 들려주는 말씀을 받아 적은 작품이다. 자연의 말씀을 듣고 순환의 생태원리를 깨닫고, 시대와 역사의 길목에서 고민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자연의 사랑법에 따라 자아의 변환과 성장을 이루어 독자에게 전하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독창적인 문체는 전략적인 상상 구조와 유비구조와 아울러 섹슈얼리티한 표현법을 수용하여 문학적 미감을 더하였다.
조한금 수필가는 민주화운동가이며 에코페미니스트이며 기업가이며 역사를 기록한 우리 시대의 원로이다. 그는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어른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한국 경제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여성 경제인으로 국가발전에 기여한 바도 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가운데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면서 많은 공모전에서 우수한 작품으로 입상하였다. 등단한 이래 다수의 저서를 내고 창작문인회를 비롯한 문학단체에 참여하여 우리나라 문학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번에 수필집 《바람개비꽃》이 수필미학에서 시상하는 제 5회 수필미학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을 축하드리며 좋은 작품이 수상할 수 있어 회원의 한 사람으로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한편 아둔한 붓으로 우수한 작품에 흠집을 내는 것 같아 두렵지만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나름 최선을 다한 이 글이 작가에게 누가 되지 않고, 작가의 문학혼이 독자에게 원활하게 전달되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어린 시절을 어른으로 지낸 작가가 노년에는 젊은이의 열정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앞으로도 더욱 매진하여 세상을 울리는 좋은 작품으로 큰 발걸음을 성큼 내딛기 바라는 마음이다.
(2023 수필미학상 수상작 선집 부문 조한금의 《바람개비꽃》 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