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진연화의 <커튼>, <카페는 진화하는 중>/한국수필2022년 2월
심사평
진연화의 <커튼>, <카페는 진화하는 중>
이방주
진연화님의 <커튼>, <카페는 진화하는 중>을 당선작으로 한다. 진연화님의 작품에서 상관물을 통하여 사람살이의 면면을 사유하는 정제된 창작 기법을 엿볼 수 있다. 작품 <커튼>에서는 ‘커튼’이란 상관물을 통하여 교직에서 얼마 전 은퇴하여 인생 2막을 열게 된 자신을 성찰하면서 미래를 설계한다. 커튼의 본래적인 순기능은 ‘무엇인가를 보호하고 차단’하는 것이라는 물리적 사고에서 커튼 뒤에 숨어 있을 학생의 성장통을 교사로서의 자신이 할퀴고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았을까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커튼의 의미를 추상화한다, 아들의 방을 돌아보며 자신이 만들어 준 커튼을 열고 닫으며 단단해지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갔으며 꿈을 열어갔을 것이라 상상한다. 이런 상상은 궁극적으로 커튼의 원형성을 찾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누군가 펼쳐 놓은 것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을 박차고 무한대의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에너지라는 생각이다. 이에 자신도 인생 2막을 보랏빛 희망으로 새뜻한 커튼을 걸어놓을 생각을 하면서 커튼이란 상관물과 자신의 꿈을 환치한다. <카페는 진화하는 중>은 다방이 커피숍을 거쳐 카페로 진화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생살이의 변화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카페라는 작은 공간에 집약된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작품 <커튼>과 달리 기억을 소환하여 묘사하는 기법으로 잔잔하게 자신을 고백하는 속삭임이 깊은 공명을 준다. 지성을 수용한 예술적 미감이 돋보이는 작가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
수상소감
누군가의 마음에 1밀리미터라도 들어가기를
진연화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코로나19에 일상이 마비되었습니다. 주인 없는 교실에 들어가 벽에 덕지덕지 붙여 놓은 명언을 손으로 쓸어 보았습니다. 인생을 이렇게 저렇게 담은 글귀들이 지나온 시간을 되짚게 했습니다. 33년 교직의 길, 최선을 다했다는 나름의 자부심이 반짝였습니다. 그러나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니 생각 더미에 파묻혔습니다. 백세시대 운운하지만 내 앞에 남은 생이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가보고 싶은 인생길에 대한 도전을 위해 하나의 문을 닫았습니다. 인생 2막의 여러 도전 중, 첫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여고 시절, 국어 시간에 쓴 내 시 감상평을 읽어 주시던 국어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합니다. 그때의 작은 떨림이 마음 안을 내내 돌아다녔었나 봅니다. 내가 쓴 글, 아니 문장 몇 줄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1밀리미터라도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그 공감이 따뜻한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오래 간직하는 편입니다. 인생 후반전 첫 여정에서 만난 수필창작교실 선생님, 최고의 수필 강의를 접할 수 있어 영광이었고 부족함을 용기로 덮어주시고 이끌어 주셔 감사드립니다. 낯가림을 금세 털어낼 수 있도록 문우라는 울타리에 품어 주신 수필교실 문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글 쓰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자랑스러워하는 남편과 두 아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일상의 철학적 해석에 상상으로 오감을 수놓은 영롱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진연화 약력
청주 출생
공주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업
중등학교 교사 33년 근무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 수료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이메일 : minimouse2004@hanmail.net
커튼
진연화
집과 여자는 꾸미기 나름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30년 이상 직장에 몸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차림새를 무시할 수 없으니 나를 위한 외적인 치장에 부지런을 떨었다. 그 덕분인지 패션 리더라느니 나이에 비해 동안이라느니 외모와 관련하여 듣기 좋은 말들이 늘 따라붙었다. 반대로 가정과 일 두 가지를 병행하여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을 겉꾸리며 단장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퇴직 후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니 방치했던 집안 풍경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며 마주 보이는 창을 응시한다. 거실 한쪽 창에는 커튼을 달고 다른 한쪽 창에는 블라인드를 설치했다.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부를 상징한다는 금빛 문양의 커튼과 블라인드에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해달라는 소망을 함께 매단 것 같다. 15층 아파트의 맨 꼭대기 층이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다. 연한 황금빛 레몬 색깔의 반투명 속 커튼이 수줍은 새색시의 속치마처럼 하늘거린다. 그 위로 미친 듯이 내리쬐는 불볕더위를 차단하는 암막 커튼이 진한 골드 빛깔로 묵직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겉과 속이 의기투합하여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는 지구의 여름을 지켜왔다. 또 살을 에는 겨울 한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 한 점 새어들지 못하게 완전 무장하여 동장군의 침입을 온몸으로 막아내었다. 그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 춥지 않은 겨울나기와 덥지 않은 여름나기를 해냈으리라.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커튼과 블라인드에도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나붙어 있다.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강렬한 태양과 맞서려니 흐느적거리는 질감의 속 커튼은 여기저기 해어져 있다. 짙은 골드 빛깔의 겉 커튼도 색이 바래 옅어지고 세월의 때가 묻어서인지 촉감도 거칠고 자르르 흐르던 윤기도 찾아볼 수 없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내리는 줄을 연결하는 고리도 하나둘 고장이 나니 삐딱하게 말려 올라가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월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없나 보다. 십여 년을 군말 없이 자기 소임에 충실하고 외부의 모진 환경으로부터 우리 집안의 요추와 같은 곳을 꿋꿋하게 지켜내고 퇴장하려는 말년병장에게 박수를 보낸다.
33년 교직 생활이 영화의 필름처럼 흐르다 멈춘다. 점심시간 텅 빈 교무실에서 즉석 죽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있었다. 잠시 후 학생들이 들락날락하고, 담임 반 학생이 왜 급식소에 가지 않고 죽을 먹는지 물어 왔다. 그냥 속이 안 좋다고 짧게 대꾸했던 것 같다. 며칠 뒤, 그 아이는 배가 아프다며 병원을 가야겠으니 외출증을 끊어달라고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교무실에 들른 아이의 손에 참치 죽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장염이니 죽을 먹으라 해서 편의점에서 원 플러스 원 행사 상품을 샀다며 멋쩍게 하나를 건넸다. 말도 행동도 다소 거칠고 호시탐탐 조퇴나 외출을 할 핑곗거리를 찾아다니는 아이였다. 거친 성정(性情) 뒤에 가린 저마다의 성장통의 시간을 어른이라는 기준과 잣대를 들이대며 할퀴어 놓은 것은 아닌지…. 마음의 커튼 뒤에 숨겨놓은 고민과 갈등 그리고 상처를 제대로 읽어 내려고 했는지…. 그 순간 마음에 써 내려갔던 반성문이 떠다닌다. 따뜻한 햇볕으로 어루만져 주고 편견이나 폭력의 비바람을 막아주는 교사이고자 부단히 노력했었다고…. 우리 집 거실 커튼처럼. 그냥 혼잣말을 주절거려본다.
거실을 지나 아들 방을 쓱 들어가 본다.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나 있기에 주인 없는 방이다. 아들과 학창 시절을 함께 부대껴온 책상과 침대와 책장은 지금 그 자리에 없다. 다만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만이 이 방의 지나온 시간을 담고 아련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군데군데 칼로 벤 듯 찢긴 부분이 세월의 자국을 들여다보게 한다. 아들은 성마르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편이었다. 한 단계 도약할 때마다 적응의 몸살을 심하게 앓기도 했다. 익숙한 환경, 정든 친구들을 떠나 낯선 곳에서 중학 생활을 시작해야 했기에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커튼을 선택할 때도 잔신경을 많이 썼다. 자연을 품은 ‘초록’ 안에서 안정감과 평온함을 베게 삼아 잠들었으면 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 주며 인내심을 갖게 한다는 ‘파랑’이 너울지는 감정선을 다스려주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엄마의 욕심을 한 스푼 넣었다. 좌뇌를 자극하고 창의력을 팡팡 터뜨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노랑’을 끼워 넣었다. 세 가지 색상이 파스텔톤으로 넘실대며 망망대해의 수평선을 연상하는 이미지를 담아내려고 했다.
엄마의 보이지 않는 염려와 소원을 커튼에 실었음을 알았던 걸까? 여린 마음은 단단해졌다. 감정의 널뛰기도 잦아들었다. 주변에 친구도 넘쳐났고 알게 모르게 배려와 존중을 배우며 잘 자라주었다. 지금은 패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감성과 창의력이 받쳐주어야 가능한 일이다 보니 엄마의 욕심도 져버리지 않은 듯해 괜히 뿌듯하다.
커튼의 순기능은 무엇인가를 보호하고 차단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나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아들은 커튼을 여닫을 때마다 아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유를 얻고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가 미래의 꿈을 꾸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 스칼렛 오하라가 녹색 벨벳 커튼을 찢어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고향 타라를 향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라고 희망을 말하는 것처럼. 배우들에게 무대 위 커튼콜이 주는 찬사와 함성의 기대처럼. 단순히 수동적으로 누군가 걸쳐 놓은 그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공간을 박차고 무한대의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머금고 있을지도.
겉보기에는 퇴직을 기점으로 인생 1막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과거의 커튼 뒤에서 쭈뼛거리며 인생 2막의 휘장을 떠들치지 못하고 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는데, 이제껏 나를 떠받치고 있던 타이틀을 걷어내고 순연한 내 모습을 찾아 나서야겠다. 이제 겉모습보다는 내면이 화려하게 영글어가는 인생 후반전을 드리우고 싶다. 이참에 새뜻한 커튼으로 창갈이를 하고 보랏빛 희망을 걸어놓아야겠다.
카페는 진화하는 중
진연화
주위를 돌아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교회 첨탑의 십자가와 미용실 앞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 간판이 그랬었다. 요즘은 세계적인 프랜차이즈부터 개인의 소박한 취향을 내건 커피 가게들이 친근한 지인처럼 손짓하고 있다. ‘아메리카노 좋아 좋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쌉싸름한 커피 맛에 중독되어 가고 있다. 진한 에스프레소 향에 묻어 나오는 ‘노스탤지어’의 끝을 따라가 본다.
내 경험의 공간은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친숙한 듯 은밀한 대화와 만남이 피어나던 일명 다방이란 곳이 동네 사랑방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랫동안 달여낸 듯한 한약 내음 위로 달걀노른자가 동동 떠다니는 쌍화차가 시그니처 음료였다. 쓰디쓴 맛과 냄새에 감기는 단내, 그 위에 언젠가 터질 노란 희망이 우리네 인생사를 닮은 듯하다. 단순한 차 한 잔이 아니라 고달픈 현실과 내일의 달콤한 약속을 마셨는지도 모르겠다. 허허실실 주고받는 상투적인 말의 힘을 빌려 어떤 이는 ‘화’를 털어내고 어떤 이는 삶의 페이소스를 달랬는지도…. 우리 부모님 세대의 아련한 추억팔이의 아지트는 서서히 유행의 시류에 밀려났다.
다방이 커피숍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그 위에 매달린 간판까지 촌스러운 듯하지만, 정감 가는 다방의 흔적을 싹 걷어냈다. 풋내기 대학생의 어설픈 사랑놀이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짝짓기 수를 맞춘 남녀 대학생들이 어색한 눈 맞춤을 하며 앉아 있다. 각자의 소지품이 테이블 위에서 간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향한 화살표는 직진으로 날아갔지만 얄궂은 운명의 장난은 늘 엇갈려야 제맛 아니겠는가. 파트너가 정해지기 직전의 긴장과 직후의 허탈함이 블랙커피와의 첫 만남이었으리라. 사실은 설탕 두 스푼, 크림 두 스푼을 넣은 달콤한 커피 속에 청춘의 시름을 휘휘 저었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학 생활에 온전히 끼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래서였는지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나이 차가 별로 안 나는 이모를 불러냈다. 새로 오픈한 커피숍을 발 빠르게 찾아다녔다. 분위기에 반하고 음악에 취하고 청춘의 고뇌에 빠져 나만의 시간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이모의 마음이 안 보였다. 이모는 결혼 전 양장점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자투리 천에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마름질하는 줄 알았는데, 다소 이른 나이에 중매로 결혼했다. 이모부는 착하고 건실한 사람이었다. 성공적인 결혼의 전제조건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착한 이모가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동화 속 주인공이기를 바랐다.
이후에도 내가 목마를 때는 이모를 자주 찾았고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며 설탕과 크림의 황금 비율을 즐겼다. 이모는 그저 내 말을 들어만 줄 뿐,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 이제야 생각이 난다. 나는 정해진 로드맵을 따라 달려갔다. 시간이 흘러 흘러 결혼식장에서 이모와 마주했다. 그냥 눈물보가 터졌다. 얼굴에 그려진 삶의 무늬에 그동안의 살아온 시간이 읽혀 너무 가슴이 아렸다. 타인과 타인의 만남에도 이름을 건네고 취미를 묻고 꿈을 말하며 소통이 이루어지던 곳에서 나만 일방통행이었나 보다. 그곳은 내겐 위안이자 동시에 죄책감이 그림자로 남아있다.
어느 틈엔가 커피숍의 규모가 대형화되고 커피도 브랜드화 되면서 카페라는 또 다른 공간에서 우리의 취향을 사정없이 저격하고 있다. 그곳이 담아내는 사회적 역할에도 시선이 닿는다. 각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정점을 향해 바닥난 열정을 쏟고 있는 취업준비생들은 사이렌 여신의 머리 위에 얹어진 별을 보고 희망을 꿈꾸는지도 모르겠다. 백세시대를 살아가는 노년들은 커피 한잔에 공간을 사고 시간을 파는 물물교환 같은 느낌으로 하루의 반나절을 벌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잠시 떠나왔다는 여행의 감성을 서비스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 채무자의 압류 딱지처럼 혹은 범죄 현장 보존을 위한 바리케이드 줄처럼 한쪽으로 의자와 테이블이 쌓아 올려 있다.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일깨우는 잦은 안내 방송이 코로나 시대의 로고송처럼 들려온다. 그런데도 아메리카노 한잔에서 불안한 세상 속 한줌의 평화를 건져 올려 카페를 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에 희망이 출렁인다.
다방에서 커피숍으로 카페로 화려한 변신을 했지만,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커피 너머의 것을 갈구했다. 살며 사랑하며 부대끼며 위로와 꿈과 희망을 찾으려 했으리라. 지금 거기엔 사람들이 루틴처럼 정박하고 있다. 타인의 정서에도 마음이 닿아야 하지 않을까? 사진작가 요시고는 ‘풍경을 즐기기보다는 놀러 왔다고 주변에 알리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관광객’을 ‘동물적 관광객’이란 말로 꼬집었다. 그들은 자연의 포식자가 되어 자연환경의 질감과 색상을 침략한다고 한다. 아무도 코로나 세상의 끝을 예견하지 못한다. 어쩌면 카페는 갇힘의 탈출구로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카페 ‘인증샷’이 SNS를 달구며 여행의 대리만족을 과시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자연스러운 삶의 연출이라 하겠다. 그러나 혹시 최적의 앵글을 찾는 번잡스러움이 카페 안 사람들의 필요나 기대를 해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카페는 이제 공공의 쓸모를 열어가고 있다. 마스크 너머의 대화 속 위안을, 쉼을, 또는 꿈 사다리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배려의 품 안에서 따뜻한 시간을 기록했으면 좋겠다. 같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먼저 아름다운 피사체로 잡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