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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호윤의 <뿌리> <그냥> 한국수필 2021년 11월호

느림보 이방주 2021. 10. 12. 13:49

심사평

 

이호윤의 <뿌리> <그냥>

이방주

 

이호윤의 <뿌리> <그냥>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한다. 두 작품은 마음의 뿌리로부터 그냥으로 연결되는 삶의 세계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수필 창작에서 체험을 소환하여 현재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예술적 언어로 형상화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뿌리>에서 소나무 뿌리를 보며 거기서 가정의 뿌리를 연상하고 다시 삶의 뿌리를 보게 된다.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지 못한 자신이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든든한 남편을 만나 자신도 뿌리를 내리고 사랑의 빗물 받으면서도 영혼의 갈증에 목말랐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뿌리’에서 초연하게 되고 ‘그냥’ 이라는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작품 <그냥>에서 인간사랑의 지혜가 ‘그냥’이란 말로 함축될 수 있음을 담담하게 술회하고 있다. 가르치는 아이들에게서 남편을 보고 남편에게서 인간의 본성을 보면서 표현할 수 없는 큰 사랑, 큰 기쁨을 ‘그냥’이라는 큰 그릇에 담아낸다. 두 작품을 읽으면서 그의 과거 현재 미래가 ‘뿌리’에서 시작하여 ‘그냥’으로 함축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작가의 현재를 해석하는 철학적 시선과 생각을 표현하는 잔잔한 목소리가 미적 울림을 준다. 훌륭한 작가의 모습이 엿보여 추천한다.

 

 

 

수상 소감

 

노을이 번져오는 세상 끝자락에서

 

이호윤

 

어릴 적부터 마음에 습濕이 들어 불우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가까이하지 않았나합니다. 독서로 무언가를 채워 넣었다면, 일기를 쓰며 덜어내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엉터리 습작도 하면서 문학에 기대어 외롭고 힘든 시절을 견뎠습니다. 초목은 본래 소리가 없는 것인데 바람이 흔들어 소리를 내고, 물 역시 소리가 없는 것인데 바람이 흔들어 소리를 낸다는 한유의 불평즉명 不平則鳴으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오랜 방황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오니 이미 제 삶의 해는 기울기 시작합니다. 노을이 번져오는 세상 끝자락에서 수필과 스승을 만났습니다. 수필이 작가의 체험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인식, 통찰을 통해 영혼을 치유하는 문학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린아이같이 미숙한 제게 큰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님께 감사드립니다. 낯선 수필 마당에서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문우 김일복 선생님과 무심수필문학회 문우들께도 감사합니다. 곁에서 묵묵히 응원해주는 가족들에게도 사랑을 전합니다.

 

약력

sugarqn1203@naver.com

서울 출생

충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 수료.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뿌리

 

이호윤

 

‘다시 태어나면 나무가 될 거야. 한번 뿌리내리면 절대 움직이지 않는 나무.’

오래전 방영된 드라마 ‘가을동화’의 주인공 소녀의 나직한 대사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인 소녀의 동화 같은 일상은 태어날 당시 산부인과 병원에서 다른 아기와 바뀐 것이 밝혀지면서 줄곧 비극으로 치달았다. 친어머니이지만 전혀 다른 환경의 낯선 사람에게로 삶의 뿌리를 옮겨야 했던 그녀. 눈물로 토해낸 그녀의 대사에 내 안 깊숙이 잠들어있던 갈망이 꿈틀거렸다. 표류하며 낯선 이방인으로 살았던 내가 품었던, 뿌리내리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성장하면서 나는 한곳에 오래 산 적이 없다. 네댓 살 무렵엔 할아버지 댁에서 지냈고, 중고를 다닐 땐 고모, 외삼촌, 나중엔 어머니 친구한테까지 맡겨졌다. 부모님과 사는 동안에도 몇 번의 이사를 했다.

부모님은 내가 대학입시를 끝낼 때까지 버티려 애를 쓰셨지만 결국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이사로 교복을 미처 사지 못한 나는 눈에 띄는 전학생일 수밖에 없었고 내성적이었던 내겐 이것이 몹시 힘들었다. 더구나 학년말에 전학하였기에 겨울방학 때까지 이전 학교의 교복을 입고 다녀야 했다. 한 살 터울의 동생 교복까지 동복을 두 벌이나 맞추는 것이 우리 집 형편엔 어려웠을 것이다. 두꺼운 안경을 쓴 창백한 얼굴로 말도 표정도 없는 전학생인 내가 나도 싫었다.

다행히 짝꿍인 과수원집 딸 경희는 유쾌한 웃음과 구성진 사투리를 가진 스스럼없는 성격의 다정한 친구였다. 나는 곧 그녀의 말투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본관과 따로 떨어져 있던 교실 창문으로 그녀와 함께 폴짝 뛰어넘어 다녔고 야간자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친구들과 학교 앞 분식점에서 떡볶이도 사 먹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전학생 꼬리표를 떼고 뿌리를 내리고 싶었던 것이다.

결혼하게 되었을 때도 ‘이제 이 가족의 일원이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제일 먼저 들었다. 또한 아직 잉태하지도 않은 내 아이가 ‘고향’을 갖게 될 것이 설레었다. 명절에 찾아올 이도, 찾아갈 이도 없는 외로운 친정과는 달리 육남매나 되는 남편의 가족은 수시로 모여 희로애락을 나눴고 손님도 많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자연 일이 많은 법이지만 그럴 땐 요리며 청소, 육아를 함께 분담하여 신이 났다. ‘서울’이나 ‘청주’라는 외지 이름을 떼어버린 채 ‘아무개 집 막내며느리’가 된 것이 퍽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니면서 또 한 번 나는 깨달았다. 일하느라 다른 자모들과 어울리지 못한 나와 내 아이는 낯선 이방인이라는 것을…. 딸아이는 누구와도 친했으나 단짝 친구는 없었다. 어릴 적 나처럼 딸애가 외로울까봐 나는 몹시 마음이 쓰였고 미안했다.

어느 날엔가 아주버님이 꽤 오래된 소나무를 세 그루 사 오신 적이 있다. ‘소나무 전문가’라는 이들이 몰려와 앞마당에 옮겨 심었다. 나는 마대에 싸여있던 거대한 뿌리에 먼저 눈이 갔다. 이식에는 중장비가 동원되었고 몇 시간의 수작업이 필요한 까다로운 작업이었다. 전에도 두어 번 옮겨 심었다가 고사한 터라 옮겨 심는 순간부터 착근하기까지 모두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다. 몇 달 전부터 뿌리돌리기를 해두는 등의 수고로움과 분 뜨기, 가지치기 등 식재 방법에서 착근하기까지 많은 공이 들어가는 소나무에 관해 알고 나니 그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나무 이식이 이렇게 공이 많이 드는 일인데 하물며 사람이 자리를 옮겨 뿌리를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이 들어갈까!

뿌리는 나무의 키만큼 깊다고 한다. 어린 시절 일찌감치 고향에 뿌리내리고 살았던 남편을 보면 사람의 뿌리도 그런 걸까 싶다. 공부를 위해 타지로 나갔다 돌아온 고향이지만 남편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동창회까지 챙기며 친구들과의 끈을 이어나간다. 새로운 무리에 끼어도 곧 가까운 사람들이 생겨난다. 아니 그 무리의 일원이 된다.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가 부러웠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감정의 흔들림 없이 무덤덤한 것도 역시 부러웠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에 허전하고 외로웠던 난 늘 불안했고 살바람에도 쉽사리 흔들렸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사람도 아니요, 청주에선 괴산 사람이고 괴산에선 청주 사람이었다. 뿌리가 얕은 나는 사랑의 빗물에 늘 목말랐다. 또, 흠뻑 받은 사랑에도 부실한 내 영혼의 뿌리는 종종 갈증으로 타오르곤 했다. 나는 뿌리에 집착하였다.

어느덧 나이 오십을 훌쩍 넘기면서 더는 ‘뿌리’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色이나 공空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실체를 꿰뚫어보라는 명구名句 앞에 내 몸뚱어리도, 그 뿌리도 공空이었다. 그저 잠시 주어진 이 삶을 충실히 살아내려 애쓸 뿐이다.

나무는 그가 세상에 머무는 만큼 뿌리가 깊고 꽃은 또 그가 머무는 만큼 뿌리가 깊은 법이다. 나무도 아름답고 꽃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꽃도 사람도 잠시 세상에 다녀갈 뿐 굳이 아름답지 않아도 될 터인데 어쩌면 이토록 아름다운지 늘 감탄스럽다.

 

 

그냥

 

이호윤

 

복도에서 친구를 때려서 불려온 희수, 굵고 까만 곱슬머리, 가무잡잡한 얼굴의 희수는 이제 막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왜 그랬어?”

“그냥요!”

뻔뻔스러울 만큼 당돌한 태도로 나를 쏘아본다. 이 적대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성급하게 주먹을 휘두르던 아이는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하거나 이해받지 못한 채 꾸지람을 받곤 했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냥’ 친구를 때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함께 불려온 경준이는, 잔뜩 겁먹은 창백한 얼굴로, 훌쩍이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경준이가 먼저 가방을 일부러 발등에 떨어뜨리고 비웃었단다. 경준이는 맘이 여리고 겁이 많은 아이, 희수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아이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짐작되는 게 있었다.

“혹시 희수 발에 실수로 가방을 떨어뜨린 게 미안하기도 하고 어떡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서 웃음이 나온 게 아닐까?” 수긍하는 표정의 아이들. 서로 사과하고 나서도 열적은 표정이다. 경준이는 놓아 주고 희수를 잠깐 남게 하여 ‘폭력’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

밖에서는 더없이 너그럽고 온유한 남편이 집 안에서는 옹졸하고 치기어린 언행을 할 때가 있다. 물론 대개는 무던하고 넉넉한 마음의 가장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만 말이다. 그럴 때 나는 한발 물러서서 남편이 평정심을 찾기를 기다리지만, 때론 맞받아쳐서 집안에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 이래서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는가 보다. ‘아니 사과하면 죽나? 뻔히 잘못한 줄 알면서 대체 왜 뻗대는 건데? 내가 언제까지 엎드려 사과를 받아야 하냐고!’ 한껏 성난 목소리는 속엣말일 뿐 남편의 사과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면 그제야 남편이 슬며시 손을 잡는다.

미안하단 말도 없이 ‘화 풀어~’가 고작인 남편. 그런 남편의 사과가 미덥지 않았다. 미안하긴 하냐,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면 빙긋 웃거나 ‘그냥’이라는 대답이 돌아오기를 수십 번. 상처받은 내 맘을 헤아리고 진심어린 사과를 바랐던 나는, 내 맘은 아랑곳없이 대충 넘어가려는 심산인가 하여 서운하고 화가 났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에서처럼 달라도 너무 다른 우리였다. 마음이 중하지 표현이 무에 중하냐는 남편과 달리 나는 마음을 대화로 함께 나누길 원했었다. 우리도 여느 부부와 다르지 않은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이십여 년의 세월을 돌아와 ‘그냥’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뜬금없이, 앞뒤 설명 없이 불쑥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라 말하고는 왜냐고 묻는 남편에게 ‘그냥’이라고 둘러댄다. 사실 내 마음속엔 미안함과 고마움, 사랑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다. 게다가 또 다른 감정의 이야기들도 한데 엉켜있어 한번에 털어내기엔 너무 무겁다. 그 무거운 사연들 위로 먼지처럼 살포시 내려앉은 방금의 그 이유만을 말할 순 없는 것이다. 비로소 남편의 ‘그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겠다. 표현할 길 없어 난감했을 남편의 마음을 몰라주어 도리어 미안하기도 하다.

오래 묵은 감정의 무게가 버거운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미숙해서 감정 표현이 서툴다. 감정이 격해져 흥분하면 말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웃거나 울고 소리 지르거나 몸을 쓰는 것이 더 쉬울 수밖에….

자기 실수에 웃음을 흘리거나 변명 대신 ‘그냥’이란 말을 내뱉는 아이들의 마음속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냥’이란 말을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그냥’의 뒤에 움츠린 채 경직된 마음을 보드랍게 어루만져 풀어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믿는 사람에게만 감정을 드러낸다. 마음에 빗장을 걸어둔 아이들에게 이해와 인내, 신뢰는 더욱 필요하다. 빗장을 풀고 나와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의 공감도 더없이 중요하다. 일단 아이들과의 소통이 시작되면 화나고 짜증날 때, 당황하고 걱정될 때, 서운하고 힘들 때와 두려울 때의 마음을 표현하는 적절한 언어와 행동을 가르쳐줄 수 있다. 궁핍한 언어의 감옥에 갇혀있던 감정을 다채로운 언어로 쏟아내며 비로소 소통의 기쁨을 느끼는 아이들을 지켜보면 누구라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즘 부모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있는 육아 코칭 프로그램 ‘금쪽같은 내 새끼’에선 민망할 만큼 거친 언행을 하는 아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겉으로 드러난 아이들의 문제 행동을 바로잡으려 애쓰던 부모들은, 먼저 아이들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이들도 잘못된 방법 대신 바람직한 감정 표현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사례가 텔레비전에서만 있을까? 일찍부터 영상물에 노출이 많은 아이일수록 타인의 감정이나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데 어려움을 겪거나 적절한 감정 표현에 서툴다고 한다. 설상가상 코로나 팬데믹이 아이들의 언어 및 사회성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더구나 바쁜 일상으로 가족과의 차분한 대화 시간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냥’이란 말속엔 온갖 감정의 때를 입은 시간들이 오래 묵은 먼지처럼 쌓여있다. 조용한 시선으로 그의 마음을 비출 때, 화사한 햇살에 드러나는 반짝이는 먼지처럼, ‘그냥’에 가려진 상처와 좌절, 두려움이 드러난다. 이렇듯 내가 만나는 이들의 ‘그냥’에 쌓인 감정의 먼지들을 조심스레 털어내고 속마음과 만나는 일은 언제나 감동이요 기쁨이다. 먼지를 털어내고 자유로이 마음을 나누는 기쁨은 아이나 어른이나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누군가 내 마음속 먼지를 털어줄 때면 기쁨이란 용수철에 튕겨 오르듯 찰나 간에 사랑이 차오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