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진의 <위로의 시간> 수필과비평 2021년 6월호(236호)
위로의 시간
유동진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외길에 들어설 때가 있다. 예고 없이 닥치는 위기가 그런 것이다. 어느 날 일상이 무너지는 사태 앞에서 죽은 듯 웅크려야 할 때 무력감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뒤따라온 통증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혼자 일어설 수 없을 때는 일상이 암담했다.
오랜만에 딸네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다. 마루에 나오자 키 큰 건조대에 아기 기저귀며 손바닥만 한 옷가지들이 장날의 만국기처럼 널려있었다. 간밤에 밤새 울어댄 네 살배기 아기를 달래느라 진이 다 빠진 딸 부부는 해가 중천인데도 아직 주무신다. 손이나 덜어줄까 해서 바닥에 앉아 빨래를 갰다.
허리에서 괴상한 느낌이 울려온 것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였다. 삐끗한 신호가 경광등처럼 몸속에서 깜박거렸다. 허리를 뒤로 힘껏 제쳐 스트레칭을 몇 번 했지만, 허리뼈 주변의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기립근이 당기는지 척추 신경이 눌리는지 알 수 없었다. 소파에 한참을 기대앉았다가 일어나려는데 허리가 덜덜 떨렸다.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마룻바닥에 누워서 베개로 허리를 받쳤다.
방에서 나온 사위가 ‘괜찮으시냐’라며 눈을 크게 뜨고 다가왔다. 별일 아닌 척 애써 장인의 체신을 고수했다. 눈 비비고 나온 손녀가 옆에 붙어 책 읽어 달라 성화를 했다. 기특해서 일어나려 했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두 손으로 바닥에 딛고 나서야 몸을 펼 수 있었다. 안간힘 쓰는 꼴을 뒤에서 보고 있던 딸이 토끼 눈으로 아비를 내려다보았다.
화장실 가야 하는데 혼자 일어설 수가 없었다. 부축하려는 사위에게 손사래를 쳤다. 대빗자루를 붙잡고 일어섰지만, 허리 주변이 부들부들 떨렸다. 십여 걸음 앞에 있는 화장실이 왜 그렇게 멀게 보이는지. 대빗자루를 딛고 몇 발을 떼는데 온몸에 진땀이 벋쳤다. 겨우 두 다리를 세운 화장실에서 바지 내리는 일은 그날의 최대 과업이었다. 자식은 걱정을 태산같이 쌓았다.
십 년 전 가정을 받치고 섰던 가장의 허리에도 갑자기 통증이 퍼진 적이 있었다. 어느 봄날 세관 조사관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쳤을 때가 그랬다. 방문하겠다는 예고도 없이 들어와서 책상이며 창고며 샅샅이 뒤집고는 곧 소환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다. 그들은 증거가 될 만한 서류를 몽땅 들고 갔다. 양심에 흠집 가는 일은 없다며 자부하던 결백을 ‘너 정말 깨끗하냐’라며 털어보니 흙과 먼지투성이였다. 신발 수입 유통을 하던 사업에 불법행위가 인정되어 중년의 위선은 법 앞에서 냉정하게 비판받았다.
위기는 통증을 몰고 왔다.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뒤틀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사업은 고꾸라졌다. 가족이 둘러앉아 끼니를 나누던 평범한 일상을 상실했다. 아내는 대빗자루 같은 부축도 마다했다. 걸음을 다시 내디디려고 숨을 고르고 주변을 살피던 시절은 구접스러웠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십여 년 붙박이 직장을 뛰쳐나와 가족의 생계를 담보로 핑크빛 청사진에 승부를 걸었다. 당랑거철의 무모함도 비장의 카드가 될 수 있다고 십 년을 버텼다. 돌아보니 그날의 벼락같은 통증이 나를 막아 세우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도 만용의 허세를 부리고 다녔을지 모르겠다.
다시 허리에 베개를 끼우고 마룻바닥에 누웠다. 일어날 수 없으니 걸을 수 없다. 걷지 못하니 나갈 수도 없다. 누워서 올려 본 세상은 천장 넓이만큼 졸아들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낡은 체신은 생각의 운신마저 붙들어 맸다. 병원에 가자는 사위의 성화를 물리치고 나는 ‘괜찮아질 거다’ 고집하며 이틀을 누워있었다. 이런 일이 벌써 세 번째라는 걸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동네 병원의 약손이 효험이 있었나. 벌벌거리던 허리 통증이 살금살금 사그라들었다. 지팡이 없이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자 노구의 주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생각을 회까닥 바꿨다. 나이 들어 이제는 자유를 누리겠노라 자식들에게 나발을 불었다. 언제 다시 삐걱거릴지 모르는 허리를 고집으로 세웠다. 먼 곳에서 사십일 동안 팔백 킬로 걷기를 감행했다. 운 좋게 허리가 꺾이기 전에 무사히 돌아왔다. 득의에 차서 막걸리를 부어 마셨다.
시간이 최선의 처방이라던가. 지난날 어설픈 재주로 입신의 영달을 노리던 자의 대가는 엄혹했지만, 해를 몇 번 넘기고 나자 날밤을 새우며 자책하던 날들도 뜸해졌다. 어쩌다 등허리 뜨뜻하게 자고 나면 혼자 일어설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이 꿈틀거렸다. 그 자리에 봄물처럼 새 삶을 꽃피우고 싶은 새순이 벋쳐올랐다.
노년의 여정은 나를 다독이는 시간이다. 반세기 넘도록 위장했던 페르소나를 벗고 던지고 본연의 나와 마주하는 무채색의 시간이다. 살아오면서 외길에서 맞닥뜨렸던 수 없는 위기를 무사히 건너왔기에 지금이 있는 것 아닌가. 잘 버텼다. 또다시 허리가 아파도 괜찮다. 지금은 나를 위로할 시간이다.
<심사평>
이방주
유동진님의 <위로의 시간>을 당선작으로 한다. 이 작품은 허리 통증을 계기로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면서 노년을 본연의 나를 찾아 위로하는 시간으로 삼는다. 허리는 상반신과 하반신을 연결하는 중간이다. 몸의 중심이고 연결 통로이다.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중추中樞라는 의미로 확산된다. 몸을 지탱하는 중추의 의미이지만 우리네 정신세계를 지탱하는 중추라는 의미도 지닌다. 작가는 삶의 세계의 중추, 인생의 중추, 역사의 중추, 사회의 중추라는 의미로 확장하여 생각한다. 노년에 오는 허리 통증을 계기로 인생의 허리 통증의 기억을 소환하여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여 해법을 찾는 지혜를 작품에 담아냈다. 수필은 치유의 문학이라는 문학적 효과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현재의 통증과 소환한 기억의 통증을 교차구성으로 군더더기 없이 단단하게 숙련된 문장, 간결하지만 선명한 표현으로 의미와 정서의 전달이 분명하다. 깊이 있는 사유와 오랜 창작 학습으로 훌륭한 작가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당선 소감>
유동진
글 문 앞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훈장인 듯 자랑하고픈 순간도 발가벗겨져 부끄러운 일들도 모두 제 몫이었습니다. 육십여 년 켜켜이 쌓인 일상에서 상심의 기억을 꺼내어 끄적이던 글 몇 줄이 자기 치유의 수필이 되었습니다. 노트북 화면에 영혼의 신호를 손가락으로 타전하며 머릿속 세상을 씨줄 날줄로 엮어내는 작업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남들 다 아는 이치를 이제야 생각해 내고 졸필을 들었습니다. 황혼의 여정에 글공부에 매진할 수 있어 감사하고 기쁩니다.
수필적 해석과 사유방법을 깊이 있게 지도해주신 이방주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망설이는 제게 함께 하자고 성원을 보내주신 무심수필문학회 회장님과 문우 여러분께도, 오래전부터 무조건적으로 응원하고 독려해 준 저의 막역한 문사에게도, 마음을 담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수상의 영광을 주신 <수필과비평>사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말씀 올립니다.
* 약력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 주소
* 이멜 주소 : djyoo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