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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복의 <사금파리 사랑> 수필과비평 2021년 4월호(234호)

느림보 이방주 2021. 3. 31. 13:46

김일복의 ,사금파리 사랑> 수필과비평 2021년 4월호 (234호)

 

<심사평>

 

김일복 - <사금파리 사랑>


수필은 체험의 철학적 해석이다. 체험은 진실해야 하고 해석은 독창적이면서도 삶을 개념화하여 형상화해야 울림을 준다.
김일복님의 <사금파리 사랑>은 지인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중심 화소로 자신의 사랑을 돌아보고 있다. 인간이 갖고 영위해야 하는 사랑의 원형을 ‘빛나는 비색을 가진 물처럼 투명한 아름다운 사금파리 사랑’이라 했다. 작가가 체험을 바라보는 진실한 시선이 있기에 짧은 서사이지만 진한 감동으로 형상화되었다. 수필이 치유의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역동적 상상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감동을 주는 또 하나의 요인은 체험의 해석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지인의 사랑을 ‘사금파리’의 본질을 궁구하여 상관성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비록 깨졌지만 비취색으로 투명한 사랑으로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사랑의 원형을 제시한 것이다. 삶에 대한 인식과 형상이 치밀한 구성으로 조직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방주)

 

<당선 소감>


낮 기온이 올라가면서 꽃샘추위는 물러갔다. 나는 꽃다지를 찾아 산자락에 올랐다. 꽃다지 꽃말은 ‘무관심’이다. 하지만 관심을 가져야 꽃의 아름다움 알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자세를 낮추거나 머리를 땅에 떨어뜨려야 한다. 그래야 꽃에 대한 의미나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된다. 나에게 수필이란 허리를 굽히는 일이다. 수필은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사금파리 사랑>은 나에 대한 고백이다.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다짐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나 자신을 부정했다. 나는 사금파리 사랑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응원한다.
수필 교실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서먹하지 않게 이끌어 주신 무심수필문학회 문우님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수필적 상상과 사유의 계기는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라며 꼼꼼히 가르쳐주신 지도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끝으로 부족한 제 마음에 온기를 불어 넣어준 〈수필과비평사〉에 행운과 발전을 빌며 심사위원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신인답게 솔직하게 들어내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데 정진해야겠다.

 

충남 서천 출신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졸업
무심수필문학회, 내륙문학회 회원
시집 《당신이 말을 가르쳐 주었다》
주소 28563 충북 청주시 흥덕구 천석로 39번길 12
전화 010-3117-8613 이메일 kiba0426@hanmail.net

 

사금파리 사랑



김일복

 

1992년 봄, 노란 복수초가 활짝 필 무렵 청첩장을 받았다. 청첩장을 열어 보는 순간 ‘헉’하는 소리와 함께 놀라 움찔했다. 무언가 내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예비 신랑 신부는 캠퍼스 커플로 지극히 평범한 사랑을 했다. 누구의 심술인지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예비신랑은 교통사고로 척추골절과 외상에 의한 뇌손상으로 전신마비가 되어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1급 지체장애자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상심에 빠졌지만 그녀는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들은 꽃가루가 흩날리던 그 해, 재활원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복사꽃처럼 눈부시게 고운 신부는 신랑의 휠체어를 밀며 입장하였다. 하객들은 모두 일어나 우레와 같은 찬사를 보냈다. 예식은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하객도 초대받은 봉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부의 부모는 볼 수 없었고, 신랑의 부모는 눈물을 한없이 흘리고 있었다. 어느 부모가 딸의 행복을 빌지 않겠는가? 결혼식장에 오지 못한 부모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푸른 하늘 봉사단체에 총무를 맡고 있었다. 매월 넷째 주 토요일에 방문하여 목욕, 청소, 물품 등을 지원하였다. 재활원에서 사회복지사인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늘 미소를 짓고 모든 일에 헌신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1급 지체장애를 가진 친구를 보살피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하객은 눈물을 흘렸고, 그들이 잘 살아가기를 기도하는 마음보다 걱정하는 마음이 앞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강인했다. 장애는 있을지언정 그녀의 사랑에는 장애가 없었다. 좌절보다는 다른 세상의 사랑을 빚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사랑하는 방법이었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믿음이었다. 오늘 아름다운 사금파리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25년이 지난여름 나는 초대장을 받았다. 서원구 장성동에 있던 재활원이 청원구 북이면으로 이전했다는 것이고, 개소식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젠 봉사활동을 하는 직장인도 아니고 25년 동안 아무런 소통이 없었는데, 왜 나를 초대할까? 불현듯 감동적이었던 결혼식이 떠올랐다.
개소식이 있던 날 아침 나는 오랜만에 정장 차림으로 참석했다. 재활원 원장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복사꽃 그녀를 만났다.
“참 오랜만입니다. 총무님, 아니 이젠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네, 잘 지내고 있어요. 남편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나는 어리둥절했고 또다시 무언가가 내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무척이나 수척해 보였고 주름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려는 영화(榮華)가 보였다.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어쩌겠는가? 현실적으로 넘어야 할 장벽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는 없었을까? 서로의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꼈을까? 그런 의문이 일었다.
최근에는 결혼도 자아를 확립하는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나의 욕구를 충족하고 행복하면 된다는 이기적 사고방식이 만연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헌신하였고, 순간이 아닌 영원으로, 어느 지점이 아닌 우주 밖의 사랑을 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다.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게 없다. 사금파리를 모아 조각조각 붙여서 천년의 비색을 빚어낼 수 없지만, 마음가짐에 따라 사금파리 한 조각 한 조각이 새 희망과 사랑의 완전체를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산다.’라는 것이다. 사람은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존재라서 서로를 믿고 사랑하며 더욱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또한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깨달음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녀는 일찍이 깨달음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많다.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한 불안한 사랑을 지키려고 애써 사랑한다고 말한 건 아닌지, 계산된 이해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책임감이라는 가면을 사랑으로 희석시키며 살아온 건 아닌지, 나로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대한 숙제가 남는다.
불가마에 정성껏 빚은 도자기의 기형을 넣고 장작불을 지펴 구워낸다. 가마 불에 의해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된다. 완성도가 떨어진 도자기는 깨져 버려지고 만다. 도자기의 깨진 조각을 ‘사금파리’라고 부른다. 자칫하면 손을 베고 상처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사금파리 한 조각을 몹시 아끼고 귀하게 여겼다.
우리는 비슷비슷한 이유로 사랑했다가도 버려지기도 한다. 그녀는 장애라는 사금파리 한 조각을 그대로 사랑했다. 그야말로 빛나는 비색을 가진 물처럼 투명한 아름다운 사금파리 사랑이다. 올바른 마음의 길로 걸어가는 사랑이었다. 서로에게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으로 그냥 사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귀한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