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이방주 2021. 1. 6. 11:36

古稀의 꿈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그 꿈은 날마다 조금씩 변하고 다듬어진다. 새벽에 침대에 누운 채 공깃돌 다듬듯이 꿈을 갈고 고른다. 글을 구상하고 수필창작 강의 내용을 공그르고 휘갑치기 한다. 그때마다 꿈은 변화한다. 꿈이 변화하는 것은 내 생명이 실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꿈이 꿈틀거리는데 나이가 전제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꿈을 실현하는데 나이에 대한 선입견이 걸림돌이 된다.

‘사람이 일흔까지 사는 일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다. [人生七十古來稀]’ 나는 이 말을 수정하고 싶다. 이 말에는 일흔이 되면 꿈을 갖지 말라는 간교한 가르침이 숨어있다. 그래서 나는 이 말에 분노한다. ‘生’이란 동사는 ‘산다’라는 막연한 뜻 외에도 ‘꿈을 품었다’라는 가슴 벅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古稀라는 말은 인제 꿈을 버리고 그냥 죽음을 기다리라는 말로 들린다. ‘꿈의 실현에 나이라는 걸림돌을 자각하라.’ 세상은 이렇게 古稀의 꿈을 뭉개버린다.

‘일흔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를 넘어서는 일이 없었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공자는 당신의 일흔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일흔이 되어 법도에 어긋난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인격의 완성이란 의미를 담아 말한 것이다. 너희도 일흔이 되면 이 정도의 완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문이다.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스승의 요구를 다시 묻지도 않고 따져볼 것도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법도를 넘어서는 일을 밥 먹듯 저지르는 사람도 제 나이 일흔을 ‘從心’이라고 거리낌 없이 일컫는다. 일흔에 인격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럼 그때부터는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궁금하다.

신축년을 맞으니 문득 일흔이 되었다. 어제는 예순이었는데 오늘은 일흔이다. 사람들은 드문 일이라면서 완성을 말하는 바로 그 고갯마루에 내가 섰다. 허 참 기막히다. 나도 종심從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법도에 어긋나지 않기는커녕 뚫린 담벼락을 엿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다. 저지레란 씨앗이 꼼지락거리더니 꼬물꼬물 유구踰矩의 싹을 틔운다. 그러니 從心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다. 그럼 古稀라고 말할까. 그건 내가 싫다. 꿈을 꾸지도 말고 앉아서 죽음을 맞으란 말이 아닌가. ‘나는 이제 古稀여’ ‘古稀인 걸’하고 말하면 말할 때마다 시나브로 古稀의 꿈이 사위어버릴 것만 같다.

나는 일흔이 되어도 절대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 일흔에도 수필을 공부하고 날마다 문우들을 만나고 차를 마시며 글을 토론하면서 꿈을 현실화하겠다. 이른바 아시타비我是他非로 선택적 정의가 범람하는 우리 사회가 수필적 사고로 정화되는 날까지 묵묵히 하던 일을 하겠다. 사람들은 꿈을 접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일흔의 아침에도 새로운 꿈을 조몰락거린다. ‘그냥 살아. 나이도 있는데’ ‘건강을 생각하셔야지.’ 이런 말들이 위로와 격려로 들리지 않는다. 일흔의 꿈도 시대적 요구이고, 일흔에 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인정해 달라. 나의 일흔을 제발 내 꿈대로 살게 그냥 두어라. 고희의 꿈은 밟아도 된다는 법은 없다.

古稀의 꿈이 더 소중하고 시급한 것은 잠시만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한 삼십여 년 전에 시장에서 《천기대요天機大要》를 한권 샀다. 숱이 많지도 않은데 일상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방어하는 요목을 담은 기막힌 책이었다. 천기대요가 시키는 대로 내 사주를 봤는데 현실과 딱 맞는다. ‘초년에 가난하고 허약하여 고생하다가 청년에서 중년까지 남을 가르침에 정진하여 말년에는 사람들의 존경과 따름을 받으며 장수하다가 예순일곱에 죽는다.’는 뭐 이런 이야기이다. 말년은 잘 모르겠지만 중년까지 운은 거의 일치한다. 아흔 살까지 글을 쓰려했는데 예순일곱이 천명이란 말이 마구 걸렸다. 서둘러 수필집을 내고 환갑을 넘어 정년을 2년이나 남겨놓고 직장을 버렸다. 그런데 정말로 예순일곱에 천기대요가 시키는 대로 운명을 다할 뻔했다. 천기대요에 믿음이 생기니 30년은커녕 10년도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더 조급하다. 그럴수록 내 속내를 모르는 가족이나 이웃에겐 가관可觀일 것이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 古稀年 다이어리를 강의하는 평생교육원에서 챙겨주었다. 첫 장을 펼치니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적어 놓는 카드가 나왔다. ‘죽기 전에 달성하고 싶은 목표 목록’이란다. 의미는 그렇지만 신축년에 이루고 싶은 소망 목록이라 생각했다. 많지도 않다. 적어 놓고 보니 생전에 남기고 싶은 책이다. 몇은 금년에 가능하다. 꿈을 이루려면 건강에 무리가 따를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이런 가당찮은 꿈을 꾸고 산다는 것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꿈은 남에게 거는 기대가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채워야 할 그릇에 담아내는 것이다. 하늘은 그릇만큼만 기대를 채워준다. 나는 古稀를 맞는 아침에 그걸 깨달았다. 그냥 살라는 주변에게 기대어 메아리도 없는 기대를 걸면서 살 필요도 없다.

누가 古稀의 꿈을 뭉개도 분노하지는 말자. 그건 그냥 그의 생각일 뿐이라 생각하자. 나는 그냥 내 꿈대로 살자. 그래 맞아. 그냥 사는 거야. 좌고우면左顧右眄할 것 없이 내 그릇 크기만큼 나의 꿈대로 말이다. 내 버킷리스트를 내 일흔의 그릇에 내가 차근차근 채워나가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않아도 절망할 필요는 없다. 'hope against hope' 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것이 진정 일흔이란 나이를 생각한 그냥이다.

일흔에 꿈을 갖는 것은 古來稀라고 하지만 나는 고희의 아침에 새뜻한 내 꿈을 꾼다. 떠오르는 古稀年 태양이 참 곱다.

 

(2021.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