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이방주 2020. 9. 19. 16:22

  오늘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벌초를 했다. 지난여름 긴 장마에 개망초가 두어 자씩 자라고 억새도 숲을 이루어 제절에 고라니 잠자리까지 생겼다. 유월에 해야 할 여름 벌초를 비 때문에 미루다 팔월초순에나 할 수 있었다. 개망초를 다 뽑아내고 억새를 베어냈다. 잔디만 남긴 다음 예초기로 예쁘게 다듬어 놓으니 비로소 마음이 편했다.

  봄에는 봉분에 이끼가 생겨 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뿌리 썩은 잔디가 누렇게 스러졌다. 부근에서 떼를 떠다가 이었는데도 아직도 내 엉성한 속안머리처럼 허여멀겋다. 늦은 가을 다시 한 번 떼를 파다 이어야겠다. 혹시 아나. 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 속안머리를 까맣게 채워주실지. 허허, 그 소망이 가소롭다.

  모처럼 휴일을 맞아 늦잠 자고 있을 아들을 불러 운전을 부탁하여 아내와 함께 출발했다. 아들이 기특하다. 미수米壽를 맞은 큰어머니 드린다고 빵을 한 보따리 사왔다. 나도 질소냐. 생닭 두 마리를 샀다. 푹 고아 드시고 백수白壽를 하시게 말이다. 무너져가는 옛집 마당에 차를 세우고 예초기를 찾아 부모님 산소부터 다듬었다.

 

  아버지 원백園白 선생은 어머니나 자식들이나 당신 부모님에게 참 무심한 분이셨다. 일제 때 독립운동가처럼 집안일을 몽땅 어머니께 맡기고 밖으로 도셨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훌륭한 분이셨다고 한다. 여섯 자 비석 외에도 제자들이 추모비까지 번듯하게 모셨다. 종묘사직이 위태롭다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 명맥이 끊어진 종묘제례와 아예 땅에 묻혀버린 사직단대제를 완전히 복원하신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 원백 이은표 선생이다. 광복 이후 간신히 부활한 종묘제례를 의궤를 찾고 왕조실록을 더듬어 고증을 거쳐 완벽하게 복원했다. 그리고 저서 [宗廟祭禮]를 저술하셨다. 그 바람에 종묘제례는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56호로 지정받아 국가의 행사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사직단대제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1988년에 완전 복원하여 몇 차례 습의를 거쳐 올림픽 때 ‘종묘 제례악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종묘제례와 함께 봉행하였다. 이로써 한국문화의 깊이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후 종묘제례는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 그게 다 원백 선생 공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2주기를 맞아 제자들이 추모비를 세운다고 했다. 추모비문은 문하생이며 뒤를 이어 인간문화재가 된 내게 숙항叔行인 이기전씨가 닦았고 정작 비문을 막내아들인 내가 썼다. 사실 초만 잡아놓으면 비문을 닦아준다던 분이 ‘그만하면 훌륭하다’며 그냥 모시라 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하면서도 그 분의 공덕에 취해서 어머니 행장行狀 한 줄 넣어드리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비를 볼 때마다 엄마에게 죄송하다. 우리 어머니는 비문으로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조선의 어머니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매우 자상하셨다는데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형님들은 할아버지로부터 잔잔한 사랑을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겠지만 나는 그만큼 복이 없는 것만 한탄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할머니 산소라고 한다. 할머니는 나와 동갑인 사촌을 나보다 더 사랑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나랑 함께 살면서 내가 심부름도 더 잘하고, 공부도 사촌보다 낫게 하고, 키도 더 크고 나름 인물도 더 나은데다가 할머니 말씀도 더 잘 들었다. 그런데도 물레를 자아서 연실을 만들어 주는 건 늘 사촌이 먼저였다. 형이 크고 멋지게 만들어 준 연은 골방에서 할머니가 실을 볼록하게 감아줄 얼레를 기다려야 했다. 할머니는 본 체 만 체 하다가 대보름 임박하여 물레를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연날리기를 며칠밖에 할 수 없었다. 보름이 되면 연을 날려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아쉽고 할머니가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다시는 할머니 심부름을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오창 갑부였던 고모님 댁에 다녀오실 때 작은댁에 먼저 들러 맛난 과자는 사촌에게 다 덜어주시고 내 차지는 거의 없었다. 그것도 함께 사는 13대인가 종손인 조카가 주인이 되었다. 조카는 할머니의 꿈이고 희망이고 사랑이고 전부였으니까.

지금 할머니 산소에 잡초를 뽑고 소금을 뿌려 이끼를 잡고 아카시나무 싹을 뽑아내는 건 바로 나이다. 비석에 새똥을 닦아내고 마구 달려드는 칡덩굴을 걷어내는 것도 사촌이 아니라 나라는 걸 할머니는 아시나 모르지. 슬그머니 화가 치민다. 내가 왜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하고 있어야 하는가. 코빼기도 안 내미는 사촌이 와야 한다. 정말 그래야 한다. 봉분을 마구 밟으며 할머니 원망을 했다. 홧김에 예초기 클러치를 잔뜩 당기니 날개가 죽는 소리를 하며 돌아간다. 골짜기가 시끄럽다. 가을 매미가 ‘씨알 씨~알 씨~~알’ 남은 힘을 다해 울어댄다. 더 세게 돌리자. 할머니도 짜증나게 하자.

 

  생각해 보니 내 나이 칠십이 내일이다. 그래 맞아. 사려 깊고 옛소설을 몽땅 외다시피 읽어 문학을 알았던 할머니에게 사촌은 아픈 손가락이었을 거야. 나는 그래도 함께 살았으니까. 당신의 막내아들의 막내아들인 사촌이 참 많이 아픈 손가락이었을 거야. 그래 사랑은 그런 거야. 할머니 사랑을 그럴 수밖에 없어. 아마도 이 세상 모든 할머니들의 사랑은 다 그럴 거야. 그리 생각을 바꾸자. 나만 보면 ‘저놈 새끼 점새끼’하시던 할머니를 오늘부터 봐드리자. 봄마다 봉분에 오랑캐꽃 뽑아내며 ‘연실, 연실’하고 뇌까렸던 서운함은 인제 잊어버리자. 내일이면 나도 칠십인 걸.

 

자 규연이가 카톡을 보냈다. '할아버지, 익어서 벌어지는 밤송이랑 나무에 달린 도토리를 사진 찍어서 보내주세요.' 아 내게도 손자가 있었구나. 그래 맞아 나도 할아버지야. 연실보다 도토리 사진이 쉽지. 지금 아버지 산소든 할머니 산소든 벌초에 매달릴 때가 아니지. 예초기를 내려놓고 벌어진 밤송이랑 익어가는 도토리를 찾아 나선다.

“할머니 저도 손자가 있슈. 규연이유. 초등 일학년이걸랑유. 예쁜 손녀 연재도 있슈. 여섯 살인디 동화책을 줄줄 읽어유. 아마 할머니 닮었능개뷰.”

할머니가 볼이 오목하도록 담뱃대를 한번 빨아들이고는 소리 없이 웃는 모습이 보인다.

그려 나도 인제는 철들 때가 됐는개벼.

(2020.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