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아영의 <굽> 수필과비평 2019년 8월호
굽
최아영
빽빽하게 들어앉은 신발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걸 맞는 신발을 고르려 하니 영 마뜩찮다. 내 키가 보통사람에 비해 좀 작은 편인지라 키가 커 보이는 신발이 필요해서다.
한두 켤레 정도는 있을 법도 하건만 얼른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굽 높은 신발이 당장 필요한데 어쩌나 싶다. 있긴 하나 구지레하다. 구두 밑창이 폭염 속 강아지 혓바닥처럼 휘늘어져 있는가 하면 어디서 심하게 고꾸라지기라도 했는지 신발 코에 상처가 심하게 나있다. 난감하다.
이 삼십대였을 때는 짜리몽땅한 키를 보완해 주는 높은 굽을 주로 선호했다. 도심 속 우뚝 솟은 빌딩처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신발을 신고 거리에 나서면 내가 더없이 멋져 보였다. 게다가 키와 비례하여 자신감이 쑥쑥 솟아올랐다. 사십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낮은 신발이 편하고 좋아졌다. 그때만 하여도 무슨 일이든 척척 자신감이 넘치던 때였다. 그래서였을까. 콤플렉스였던 작은 키를 굳이 감추려 들지는 않았다. 자신감과 열등감 그리고 신발 굽의 높이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뻣뻣하던 귀도 말랑해진다는 이순(耳順)에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다. 이쯤 되고 보니 굽 높이뿐만 아니라 더 낮추고 더 비우고 좀 더 숙이고 해야 할 무엇인가가 분명 있을 법 하다. 택배가 도착했다. 며칠 전 주문해 두었던 높이가 7센티나 되는 앵글부츠다. 여태껏 나지막한 신발을 불편함 하나 없이 잘 신고 다녔는데 무슨 일일까. 갑자기 높은 신발이 내게 왜 필요했던 것일까.
일상에서 옷매무시 하는 일은 참 중요하다. 직업에 맞게 또는 외출의 성격에 맞는 옷을 선택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에도 세심할 필요가 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매무시의 완성은 역시 신발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빼어난 차림새라 하더라도 신발이 지나치게 높거나 낮거나 또는 의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면 전체가 다 망가져버리기 쉽다. 가령 우아한 한복을 입고 나비 걸음을 할 때 마다 뾰족하고 번득거리는 하이힐이 치마 폭 사이사이로 보인다든지 날렵하고 세련된 정장슈트 차림이지만 붉은 벽돌 같이 뭉툭한 통굽으로 된 신발을 신는다든지 하는 경우일 것이다.
얼마 전이었다. 충북 청주시의 ‘문화 공간 우리’라는 곳에서 내가 속해 있는 무심 수필 문학회 회원 중 한 분의 북 콘서트에 가게 되었다. 패널로 참석한 어느 작가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깔끔한 정장 슈트 차림에 과하지 않은 메이크업 그리고 단아한 헤어스타일이 나의 관심을 훅 끌어당겼다. 무엇보다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우울의 인자를 깡그리 녹여버릴 것만 같은 그 분의 온화한 미소였다. 그 미소의 근원을 발견한 나는 그만 ‘심쿵’ 하였다. 그것은 바로 지극히 낮은 그분의 신발 굽이였다. 가장 낮은 곳에서 무엇보다도 평온하였으며 심지어 겸손해 보이기까지 했다. 굽이 겸손해 보이는 것도 겸손한 굽을 보는 것도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신선한 충격이다.
신발 굽의 속성이 모성과도 닮아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굽은 주인의 무게를 결코 불평하지 않는다. 먼지투성이 땅이거나 질척한 땅이라 해서 거부하지도 않는다. 제 살이 닳고 닳아도 구두코에 달랑 올라앉은 장밋빛 리본을 행여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굽은 속내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은은하면서도 반짝반짝 수정처럼 빛을 발하고 있는 그 작가님의 구두 코 위로 근간의 내 모습이 투영되었다.
나는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이곳 타향에서 자발적 이방인이 되다시피 한 나의 삶은 참으로 쓸쓸했고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런 나는 무엇을 끊임없이 지껄이고 쓰는 것을 좋아했다. 문학 하는 사람이 좋았고 문학 활동이 활발한 곳이 좋아보였다. 다양하고 폭 넓은 문학세계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정작 내가 갈망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말동무였다. 소통하고 지낼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활동적인 성향의 나였음에도 정작 공감대를 형성하여 소통하기에는 나의 반경이 협소하여 숨이 막혀왔다. 답답했다. 그래서였다. 뭉그적거리고 있던 둥지를 털고 일어나 보다 넓은 세상에서 보다 멀리 보는 삶을 선택했지만 아직은 좌불안석인 내 모습이 그 분의 구두 끝에 안쓰럽게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막 도착한 새 신발을 신고 실내를 왔다 갔다 해 보았다. 후들거리고 삐거덕거린다. 그럼에도 한 동안 신고 다녀야 할 것 같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높은 굽이 필요했던 거였구나. 낯선 곳, 광활한 곳에서 미성숙 된 날갯짓을 해보려하니 긴장감에 자신감마저 떨어졌던 것이다. 설상가상 여태 보지 못했던 제 깜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 했으니 어찌 주눅이 들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가뜩이나 작은 키가 더욱 졸아들었을 것이다. 당분간 굽이 높은 신발을 고수할 참이다. 약간의 불편함이 뒤따르겠지만 머지않아 안정된 굽의 신발을 신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낮추고 비우고 숙여야 할 이즈음에 된바람 맞은 내 영혼을 응시할 차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마음의 굽 하나 둘 쯤은 어느 한 곳에 새겨 놓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부(富)가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하다못해 그것이 외양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포함한 대개의 사람들이 자칫 잊고 사는 것이 하나 있다. 어렵고 힘들게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수도 있는 영혼의 굽 말이다. 그 굽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거침없이 추락하는 영혼들을 간간이 보아온 터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내 안의 굽을 잘 다스려야 하는 이유다.
이참에 새로 산 신발의 굽이 너무 모나지 않게 고루 잘 닳아 진중한 걸음걸이로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족적(足跡)이 될 그날이 내게로 오고 있는 걸까.
-심사평-
최아영의 <굽>은 새 신발을 한 켤레 산 이야기다. 이미 이순에 다가선 나이다. 이런 주인공은 지금 막 도착한 신발을 신고 실내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 '낮추고 비우고 숙여야 할 이즈음에 된바람 맞은 내 영혼을 응시'하기 위해 신고 나갈 예행 연습이다. 수필이 신변잡사를 테마로 삼는 문학 갈래지만 이 솔직한 자기응시는 어느 장르에도 발견할 수 없다. <굽>은 예순에 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예순에도 철이 안드는 이야기다. 예순에 철이 드는 이야기는 문학이 아니다. 문학은 재창조인 까닭이다.
-신인상 당선소감-
길따라 흐르다 멈추다 무심의 천변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르게 되었지요.
그곳은 참 따뜻했습니다.
흠집 난 영혼 하나 치유의 언어로 쓰담아 주었고
늪에 빠진 나에게 구원의 손길도 내주었습니다.
꿈이 있었으나 길을 잃었고
불꽃같은 열정이었으나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때
스승을 만나고 도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문학'이라는 큰 이름으로 작은 씨알 하나 심어
오늘 그 첫번 째 꽃눈을 틔우게 되는가 봅니다.
부디 가르침에 따라 향기를 탐하지 말것이며
열매를 욕심내지 않는 묵향이 되길 염원합니다.
채 여물지 못한 저의 씨앗글을 뽑아주신
월간 수필과비평 심사위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