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자의 <관계> <나를 보내며> 한국수필 2019년 11월호(통권297호)
<신인상 심사평>
강현자의 <관계> <나를 보내며>
이방주
강현자의 <관계> <나를 보내며>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두 작품의 화두는 존재의 의미이다. 작가는 관심에서 사랑이 싹트고, 인식 이후의 존재가 가치를 가진다고 한다. 그런데 두 작품의 인식의 과정은 다르다. <관계>가 세계에 인식되는 자아의 존재라면 <나를 보내며>는 자아에 인식되는 세계의 존재가치이다.
<관계>는 미술 전람회에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화가를 대신한다고 생각되는 그림 속의 여인과 자신을 일치시킨다. 화가와 자신의 동일화 속에서 작품을 감상하게 된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여인과 관계를 이루고 있는 존재를 대신하는 고양이에게 인식되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작가는 그림을 뛰쳐나와 자신의 고양이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와의 관계가 관심에서 사랑이 되기를 소망하여 모든 독자의 소망을 대변하는 내용으로 수필의 문학성을 확보한다.
<나를 보내며>는 중증 신부전증 환자인 언니에게 콩팥을 나누어 주면서 나로부터 떠나 언니의 것이 된 나의 존재의 일부에 대하여 ‘본래 내 것이 아님’ 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확인한다. 그것은 결국 사랑에 귀결된다. 이 작품은 수술을 받으러 가는 여정에 따른 심리적 갈등의 변화를 기묘하게 연결하여 표현하였다. 공간의 변화와 시간의 경과에 따른 내적 갈등이 연계되어 드러난다. 또 외적 상황의 시제와 내적 심리 세계를 드러내는 시제가 다르다. 단순한 기법인 듯하지만 수필문학만이 가능다고 생각한다.
두 작품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라는 인간의 절대 고민을 내적 의식의 흐름에 따라 표현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장래 수필문학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할 것을 기대한다.
<등단 작품>
관계
강현자
여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파란 공간이라 그녀의 빨간 입술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문밖에서 고양이가 들여다본다. 지금 숨을 죽이고 있다. 문우의 그림 전시회에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끈 작품이다. 사색에 잠긴 그림 속 여인은 그분 자신을 그린 것은 아닐까. 수필공부만 하는 문우인 줄 알았는데 그림까지 수준급이다. 팸플릿을 받아들자마자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자주 얘기를 나눠보지 못해서 마음이라도 표하고 싶었다. 그림 속 여인에게 마음을 전하듯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다.
전시회를 자주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전시회에 갈 때마다 주눅이 든다. 그림을 제대로 볼 줄도 모르고 화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초등학교 미술시간에도 백지로 제출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두 시간 내내 짝꿍이 그리는 것만 신기한 듯 바라보다 수업이 끝나 버리곤 했다. 전시된 미술작품을 볼 때에도 그동안 사진을 찍으면서 눈에 익었던 풍경이 나오면 그나마 반가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내가 사진 찍을 때의 마음처럼 그림을 그린 작가도 같은 마음으로 작업했으리라 짐작하며 전시회를 찾는다.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작품을 그렸을까 가늠해보지만 도무지 알 수 없다. 제목도 없다. 제목이 없는 작품에서 주제나 의미를 찾는 것은 감상하는 이의 몫이다. 작가와 관객 사이에 만들어진 사색의 공간이다. 망망한 밤바다를 그린 것 같은데 그곳에 왜 나비 한 마리가 있을까?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예술이란 생각이 든다. 고개만 갸우뚱거리다 바로 옆에 있는 그림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무심한 듯 평화로운 파란 공간에서 여인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지그시 눈을 감은 그녀는 지난했던 날들의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낸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지 않는 신비스런 모습이다. 번뇌의 늪에서 헤어나려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 걸까. 아니 슬픔을 거부하며 새로운 꿈을 마시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개를 약간 돌린 여인의 뒷모습에서 잠시 나를 본다. 생각은 끊임없이 머리와 가슴 속을 헤매지만 그것을 정면으로 끄집어낼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마음이다. 미움과 연민, 갈등과 용서, 절망과 후회 이 모든 것을 털어내려 눈을 감는다. 폭풍이 지난 후의 평화를 내 안에 불러온다. 자드락비가 퍼붓고 난 뒤에 비치는 햇살이 그리운 파란 공간이다.
빨간 입술의 여인을 문밖에서 안타깝게 들여다보며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타인이다. 무관심의 관심이다. 직접 다가오진 않아도 여인을 지켜보는 눈빛이 애틋하다. 자신도 모르게 멀리서 마음으로 지켜주고 기다려주는 고마운 타인이다.
나에게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있을까? 어디엔가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 믿고 싶다. 내 앞에 보이진 않아도 나의 운명을 바라보고 주재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절대자가 아니라도 혹 날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아주 가까이서 나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한낱 착각이라 해도 믿고 싶다. 그래야 외롭지 않을 테니까.
여인과 고양이의 거리가 먼 듯하면서도 가깝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저 문밖의 고양이처럼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그런 관망이라야 관계를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모른 척하고 적당히 무관심한 척 눈감아 주는 것이 때로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내가 네가 될 수도 네가 내가 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관심 속에 살아간다. 사랑도 미움도 관심에서 싹이 튼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누구나 우울감에 빠지고 만다. 그것이 비록 증오로 가는 부정적 관심이라 하더라도 그건 분명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증거다. 즐겁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외롭다고만 할 수도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분란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사소한 일로 다투는 경우를 종종 본다. 알고 보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관심을 넘어 집착을 했거나 간섭의 결과이다. 사랑이라는 비단주머니에 대못을 넣고 있는 격이다.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티케가 함께 저술한 심리학 저서인 ≪미움받을 용기≫에서 읽은 이야기이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해야 한다고 했다.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관계의 유연한 공간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 공간에 수용과 이해, 그리움과 배려가 존재하기에 멀리서 보아야 더 아름답다. 나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애집하기보다 여유 있는 공간 하나 쯤 두어야겠다.
그림 속 여인은 무한히 생각 속으로 빠져든다. 고양이의 말없는 관심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여운을 안은 채 발걸음을 옮기니 아까부터 궁금하던 나비가 망망한 밤바다를 벗어나 봄을 날고 있다. 노오란 유채와 파릇한 잔디 위를, 그리고 벚꽃 흐드러진 화사한 세상을 맘껏 날고 있다. 아마 그림을 그린 작가의 마음이 그러하리라. 작품을 관람하면서 작가의 의도를 알아내려 수수께끼 풀 듯 감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나대로 해석하며 나만의 상상 속으로 빠지면 그만이다. 작가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열린 공간을 마음껏 노닐다 전시장을 나왔다. 비거스렁이에 나들이 하듯 발걸음이 가볍고 상쾌하다.
나를 보내며
강현자
여행을 떠나듯 짐을 챙겼다. 보름간의 휴가를 보내는 첫날이다. 기계적으로 떠밀리듯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익숙한 거리, 눈에 익은 건물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앞으로 보름동안 어제와는 사뭇 다른 여유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뜬다. 서둘러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커튼이 드리워진 좁은 공간에 앉으니 절로 차분해진다. ‘드디어 오늘이 오긴 오는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올라오다 목에 탁 걸린다. 모세혈관이 모두 머리 위로 솟구치듯 두 눈이 팽팽해짐을 느낀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발걸음 가볍게 집을 나섰건만 좁은 차안의 공기가 지난 몇 달 동안 나의 모습을 차분히 되돌아보게 한다. 이내 시야가 젖어오고 앞이 어른거린다. 평소 나답지 않은 모습이 당황스럽다. 고개를 돌려 차창에 비친 희미한 내 모습을 마주하며 ‘괜찮아, 괜찮을 거야.’ 혼잣말을 되뇐다.
버스는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안정된 속도로 익숙하게 달리는 버스가 무심하다. 증평에도 채 못 가 사람들은 이미 눈을 감고 있거나 휴대폰 삼매에 들어가고 나의 눈은 차창 밖 학소리 느티나무로 향한다. 오창 벌판에 오롯이 서 있는 느티나무의 정경에 빠져 한 때 어지간히 카메라를 들고 찾던 곳이다. 차안에서 멀리 내다보니 그 경치가 더욱 고고하다. 시점에 따라 느낌이 사뭇 다른 것은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리라. 생각의 방향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이니 섣부른 판단은 참으로 위험하단 생각이 든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걸까? 갑작스런 혼란스러움에 어지럽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그마한 생채기에 호들갑이라도 떨어보았을 것을. 모기에 물려도 며칠 긁적이다 말았고 예리한 칼에 손을 베어도 못 본 체 어지간한 불편함은 참아가며 지내왔다. 몸에 좋다는 음식에도 특별한 욕심을 내지 않았으며 으레 내 몸은 그러려니 했다. 그래놓고 이제와 아무 잘못도 없는 멀쩡한 그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내 안에서 떠나보내려 하다니 때늦은 미안함이 밀려온다.
음성 휴게소를 지나 경기도로 들어선다. 눈에 보이는 경계를 그어놓은 것도 아닌데 여기 쯤 오면 왠지 낯설다. 내내 같은 산이고 같은 들판이고 같은 건물들인데 이곳에선 마치 어떤 기운이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것 같다. 오랜 시간 신부전증으로 병마와 싸우느라 점점 변해가는 언니를 재치와 웃음을 달고 살던 옛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새로운 기운처럼 말이다. 뱀처럼 길게 굽은 도로가 점점 허리를 주욱 편다.
내일 있을 수술도 이렇게 순조로워야 할 텐데……. 콩팥 하나만으로도 별 탈 없이 건강해야할 텐데……. 걱정과 두려움이 가슴 한켠에 머문다. 애써 눈을 감아보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나중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살려고 하냐는 친구들의 걱정스런 조언이 생각난다. 내가 경솔했던 걸까?
아무리 좋은 일이라고는 하지만 혼자 내린 결정에 누구에게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언니는 마음까지 스러지고 있었다. 큰 수술을 앞두고 희망을 갖기는커녕 불안한 마음을 내게서 위안을 얻고 싶었겠지만 그런 언니의 우울 증세에 솔직히 나도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언니를 끊임없이 보듬어주어야 하는 그러면서 정작 기댈 곳 없는 내 자신이 서글픈 적도 많았다. 어느 날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나타나 안타까움과 대견함이 서린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만 보시던 모습에 자다 말고 한없이 울었던 적이 있다. 아버지가 옆에 계셨더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허공에라도 기대고 싶었나 보다. 아마 내게도 갱년기 우울증세가 나타난 것이리라.
서울이 가까워 오자 갑자기 차량이 많아진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주춤주춤하는 자동차들처럼 내 마음도 아직 머뭇거린다. 초등학교 시절 예방주사를 맞으려고 팔 걷고 줄서서 차례를 기다릴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심란한 마음을 미처 수습하지도 못한 채 터미널에 도착, 버스에서 내려 그만 지하철을 잘못 타고 말았다. 게다가 병원 셔틀버스를 타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세상이 온통 뒤집어진 느낌이다. 내가 왜 이러지? 처음 가는 길도 아닌데 결국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셔틀버스에 올랐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먼저 입원해 있는 언니를 만났다.
나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언니는 나의 긴장을 단숨에 읽어낸다. 허름한 환자복 안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자그마한 체구가 허깨비처럼 간신히 지탱하고 서있다.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남기고 언니는 돌아섰다. 무균실로 향하는 복도를 따라 멀어져가는 작고 초라한 언니의 뒷모습이 내 눈에 가득 담긴다. 언니를 일으켜 세울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내가 그 해답을 뻔히 알면서 지금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걸까?
육신이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원래부터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탈무드에서는 한 개의 촛불로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촛불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내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내 몸의 일부가 저 작은 몸속으로 들어가 언니를 꼿꼿하게 일으켜 세울 수 있다니……. 내일이면 나는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언니의 몸과 마음을 지켜낼 것이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건강하고 환한 웃음을 되찾은 언니의 모습을 그려본다. 이제 신의 손을 대신한 의사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한다. 저항도 번복도 불안도 이미 나의 영역이 아니다. 차라리 차분하게 기다려야 한다. 나는 어느새 두려움의 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벗기라도 하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나는 환자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담담해진 마음으로 병실 문을 열었다.
<당선소감>
문학은 치유의 길이라는 깨달음
강현자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저 역시 한때는 문학소녀였습니다. 어쩌면 나의 길이 문학인이 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자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생활은 점점 나를 문학에서 멀어지게 하고 눈을 어둡게 만들었습니다.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삶에 지쳐 몸과 마음을 가누지 못할 때쯤 내 속에 굳어져가는 응어리를 풀 곳이 없어 펜을 집어 들었습니다. 문학과는 거리가 먼 푸념을 늘어놓는 글이지만 그때부터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글이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새살을 돋게 하는 명약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가슴엔 녹이 슬고 붓은 굳어졌습니다. 다시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글마당을 기웃거리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습니다. 아마 나의 글쓰기의 배움은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일 것 같습니다.
문학에 목마른 제게 길을 열어주신 것은 더욱 열심히 하라는 채찍일 것입니다. 늘 믿음으로 기다려주시고 다독여주신 지도 선생님과 옆에서 함께 걸어준 문우들이 있어 오늘의 영광이 가능했습니다. 제가 글을 쓸 수 있도록 밀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약력
숙명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재능교육에서 근무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육 강사
현재 e-해법수학 공부방 운영
청주시립도서관 수필교실 수료
청주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 수료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동서문학상 맥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