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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작품 <축 읽는 아이> <사람 만드는 사람> 한국수필 1998, 9,10월호

느림보 이방주 2010. 3. 31. 07:58

축 읽는 아이

 

이방주

 

나는 참으로 어두운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사회는 우리에게 올바른 가치를 일러주지 못하였다. 올바른 삶에 대한 의문은 끝이 없었다.

2학년 때 이른 봄으로 기억되는데, 토요일 오후 언제나 마찬가지로 터덜터덜 배티(모충동에서 충북대학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주먹 만한 자갈들이 뒹구는 비포장도로는 가끔 차라도 한 대 지나가면 먼지가 날렸다. 고개를 올라서면 오른쪽에 큰 방죽이 보이고, 방죽 건너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공동 묘지는 남향이라 봄기운이 완연하고 봉글봉글한 무덤 위에는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장 따뜻한 무덤 위에는 보송보송한 할미꽃이 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어디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 하악생, 나조옴 봐요오오……"

둘러보니 묘지에서 흰옷 입은 대여섯 사람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왜 저럴까? 못 본 척하고 가 버려야지'하며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묘지 쪽을 바라보니 손나발을 하고 애타게 나를 부른다. '설마 귀신이 대낮에 나와서 나를 잡아가려고 부르는 건 아니겠지. 한 번 가 보자.' 나는 둑을 지나 방죽을 건너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걸어갔다. 그들은 책가방을 받고 부축까지 하면서 나를 맞았다. 마치 구원의 신이나 맞이하듯이…….

"학생, 학생 한문을 좀 아는지."

그들은 祝文을 내놓았다. 그 때는 그저 제사의 축문이거니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題主祝(平土祝)이었다. 나는 대강 그 축문을 훑어보았다. 모르는 글자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종가의 막내라 독축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또 안 할 말로 한 두 자 잘못 읽는다 해도 그들이 알 턱도 없고.

어른들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모두 내 얼굴로 향했다. 나는 망설였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나 아닐까? 그러나, 여기 애타게 나를 쳐다보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나마, '배운 사람'이라고 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들은 서둘러 준비를 했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축문을 더듬으며 침을 발라 입술을 축이며 기어들어 가는 목청을 가다듬어 보려고 애썼다. 집에서야 독축이 어디 내 차지가 되기나 했어야 말이지. 드디어 제사는 시작되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고 목청을 끌어 올렸다.

" 維歲次…… 魂箱猶存 仍舊是依"

처음에는 목이 막히고 떨리더니, 중간쯤 가니 내가 들어도 유창한 독축 소리가 되어 묘지에 울려 퍼졌다. 제사를 마치고 음복주를 한 잔 얻어 목을 축이고, 대단한 사람처럼 배웅을 받으며 묘지를 내려 왔다. 못 마시는 음복주가 다리를 휘청거리게 한다.

잘한 일인가? 잘못을 저지른 일인가? 아버지께서 걱정하지 않으실까? 집에 돌아와서도 머리가 어수선했다. 그러나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비교적 자세히, 그리고 내가 축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말씀 드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불호령이 내릴 것만 같아서 숨이 막혔다.

'양반의 자식이, 근본을 모르는 사람 축이나 읽어 주고, 음복술에 얼굴이 벌개서 돌아오다니, 니가 초상집에 개더냐? 못난 사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건 杞憂였다. 오히려 온화하고 만족스러운 빛을 띄우시면서,

"그래, 뭐 축이 제대로 됐을까?"

"제사 때 어른들이 읽는 거 흉내를 냈어요."

"그래 잘했다. 배운 사람이 배운 사람 노릇을 한 번 제대로 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몸 달았으면 너를 불렀겠냐? 배운 사람은 그렇게 깜깜한 사람을 훤하게 밝혀 주는 거지. 맞아 빛이 되는 기여"

나는 그 때의 감격과 뿌듯함을 잊지 못한다. '배운 사람의 배운 사람 노릇'을 했다거나 '어둠의 빛'이 어디 내게 해당하기나 한 말씀인가? 그러나 다만 '어둠의 빛'이란 그 말씀 은 방황하던 내게는 생명수와도 같은 말씀이셨다.

선생이 되어 이십 오년을 넘어선 요즈음, 내 서재에서 유리창을 열면 바로 내가 어려서 축을 읽어 주던 그 언덕이 보인다. 지금은 방죽도 없어지고 묘지도 없어져, 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섰지만, 눈을 감으면 그 때의 그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내가 방황하고 번민하던 때의 생명수가 되었던 '어둠의 빛'이란 말씀에 나는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내 서재는 아버님이 오셔서 계시지만, 그 때의 일을 기억이나 하실까? 아니면, '이 사람이 어둠이 빛이 되어 가고 있는가'하고 살피실까.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교직 이십 오년을 돌아본다. 아무튼 그 때의 그 사건과 아버지의 그 말씀은 나의 삶의 길에 한 방향을 정해 주신 일이었다.

 

 

 

사람 만드는 사람

 

이방주

 

19734월 따스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교사 임용장을 받고 낯선 고장에로의 첫부임길에 나섰다. 원했던 대로 벽지학교 교사가 되는 것이다. 무인지경 산길을 오르막길 삼십 리 내리막길 십 리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운이 좋게 비료를 싣고 가는 농협 트럭을 만나 먼지투성이 비료 부대 위에서나마 차를 타고 부임한 최초의 신임 교사가 되었다. 새 양복에 온통 황토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스물 남짓 시골 처녀의 시선을 의식하며 애써 태연한 체 했다. 꼬불꼬불 돌고 돌아 고갯마루에 도착한 차가 엔진을 식히는 동안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백 산맥의 험준한 준령이 장엄하게 뻗어 내리는 그 골짜기 골짜기마다 문명을 외면한 삶이 보일 듯 말 듯 둥지를 치고 있었다. 밤에는 산돼지 떼가 수십 마리 씩 몰려다니며 농작물을 망쳐 놓는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며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쪽 멀리 낙조가 애처롭다. 마을에 도착한 것은 이른 봄의 기다란 해가 어둠을 몰고 온 시간이었다. 밤이 이렇게 깜깜한 것인 가도 처음 알았다. 마중 나온 선생님들의 안내로 정해진 하숙집에 가 누웠다. 한 선생님이 누워서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하늘이 보였다. 누워서 하늘이 보이는 이 집이 앞으로 내가 살 집이다. 이런 산골 아이들에게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오후에는 교무주임 선생님을 따라 마을 유지들에게 인사를 갔다. 생각보다 마을 사람들은 더 순박했고, 초임 교사인 나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융숭한 대접을 했다. 집에서 손수 만든 두부를 맛보이기도 하고, 토종꿀로 따뜻하게 만든 꿀차를 구경시키고, 강냉이 엿을 녹여 조청 맛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몇 집을 돌아다니다가 제법 사랑채까지 있는 어느 집에 안내되었다. 사랑에서는 천자문을 합창하여 읽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기척을 하기도 전에 송아지만한 수캐가 달려 나와 컹컹 짖는다. 안방 문이 열리며 열아홉이나 스물쯤 되었을 법한 댕기 머리 처녀가 나왔다.

"선생님 오싰는가요. 어무이요, 좀 나와 보래. 선생님이 오싰니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충청도 말도 경상도 말도 아닌 사투리로 어머니를 부른다. 시종 처음 보는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스물두 살인 나도 약간은 두근거렸다. 잠시 후 어머니인 듯한 중년 부인이 나와서 천자문 읽는 소리가 낭낭히 들리는 사랑으로 안내하였다. 손님이 오셨다는 전갈에 글을 읽던 학동들이 윗방으로 올라가고 우리는 한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마주 섰다. 교무주임 선생님이 나를 소개했다.

"어르신, 학교에 선생님 한 분이 새로 오셨습니다. 아주 젊고 실력 있는 선생님이죠"

"아 그러니껴. 이런 고마울 데가. 자 앉으시지요"

하면서 한사코 아랫목을 권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아랫목에 엉거주춤 앉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넙죽 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같이 맞절을 하면서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저는 이제 스물을 좀 넘은 병아리인걸요."

", 내 자식을 사람 만드시는 선생님이신데 큰 절로 모시는 것이 당연하지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 있니껴?"

나는 '' 하고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내 자식을 사람 만드는 사람' 이것이 이제부터 내가 맡아야 할 엄청난 일이구나. 노인의 그 말씀은 대학에서 들은 어느 교수님의 교육학 강의보다도 나를 감동시켰다. 그리고 나의 회의는 끝났다.

잠시후 안에서 강냉이로 빚은 기름이 동동 뜨는 그 지방 말로 엿술을 내왔다. 여름에 잡아 말렸다는 민물고기 '꺽지' 튀김, 산초 기름에 지진 두부 부침, 고사리나물, 송이버섯, 이런 말로만 듣던 고급 안주와 달큰하고 고소한 강냉이 엿술이 조금만 마셔도 얼굴이 발개지는 나를 더욱 취하게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사람 만드는 사람'을 되뇌면서 휘청거리는 걸음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날의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사람 만드는 사람'

그 노인의 말씀대로 내가 진정한 '사람 만드는 사람' 구실을 하고 있는지.



심사평


<축 읽는 아이>는 배운 사람은 배운 사람의 노릇을 해야 되며 어둠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의 전통 문화를 이어가려면 한자 교육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사람 만드는 사람>에서는 교사로서의 사명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 모두 무리없는 문장의 흐름과 그 문장 속에서는 소박한 정서가 배어 있다는 게 특징이라고 하겠다.

<조경희, 서정범, 이철호>


당선 소감


아직도 어설픈 축을 다듬는 마음으로


오늘, 아내와 사랑하는 딸 기현이와 함께 팔순 아버님을 모시고 나의 초임지 의풍학교를 돌아보았다. 마음의 고향인 거기는 아직도 내 이마의 때를 씻어 주기에 충분했다. 취나물, 고사리, 더덕을 챙겨주는 제자 내외의 마음이 그랬고, 아직도 돌이끼 하나 없이 깨끗한 계류(溪流)가 그랬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난고(蘭皐) 김병연 선생의 묘비가 그랬다. 의풍에서 강원도 하동으로 이어지는 백리 길 산수는 더욱 그랬다. 

집에 도착하니 나의 초임지 이야기가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되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게는 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공자님은 이 나이에 모든 의혹을 씻었다는데, 내가 지어 부르는 축은 아직도 어설프기만 하니 늦었다고 말하기는 너무 건방지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부터 삶은 황소가 되고, 글발은 거북이가 되어야겠다. 날마다 아버님의 빛을 바라보고, 어머님의 애틋한 사랑으로 보듬으며, 삶의 자욱마다  촌로(村老)의 개우침을 담아야겠다.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계속 정진을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