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롱이를 돌아서면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모롱이를 돌아서면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이방주
삶의 길에서 돌아가야 하는 굽이길이 없을까마는 나는 참으로 많은 모롱이를 돌고 돌아 오늘에 이르렀다. 한 모롱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나 낯섦에 대한 도전은 끊임없이 내 일상을 벼리고 담금질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이른바 흑룡 띠이다. 우리 민족에게 수난이 주기적 반복되었다는 임진생이다.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것이다. 폐허 속에서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서도 어른들은 일곱 살밖에 안된 나를 한문 서당에 보내셨다.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
어머니는 서당에 갈 때 작은 유기주발에 밥을 싸 주셨는데 점심을 굶지 않아도 되기에 서당 등교가 마냥 즐거웠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익힌 것은 내 인생에서 가치의 바탕을 다져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주 어렵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교육대학에 입학하였다. 요즘은 교육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젊은이들도 많아졌지만 당시 2년제 교육대학은 합격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남자들에겐 크게 환영 받는 대학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2년제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충북에서 최고 벽지라는 단양군의 어떤 초등학교에 부임했다. 봉급을 받을 수 있어 좋긴 했지만 상상도 해보지 못한 벽지 생활이 답답했다. 그래도 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이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쳐 사람을 만들어야 하는 ‘선생’이라는 생각으로 1년을 보냈다. 1년 후 40명이 졸업하는데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가 단 두 명뿐이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어려웠던 1970년대 초라고 해도 중학교 진학은 거의 100%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심훈의 <상록수>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나는 곧 야학을 설계했다. 마을 이장이나 당시의 새마을 지도자, 부녀회장을 설득하여 야학 입학 희망조사를 해 보았다. 40여명의 청년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3월에 야학을 개교했다. 교장이 허락하지 않아서 교회를 빌어서 저녁 예배가 없는 날만 수업을 하기로 했다. 모인 젊은이들 중에는 스물세 살이었던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처녀도 있었다. 그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마을 사람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당시 쌀 한 말 값 정도인 강의록을 매월 정기 구독하여 국어부터 음악까지 모든 과목을 하루 너덧 시간씩 야간 수업을 했다. 선배 교사 두 분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목사님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9월에 새로운 교장이 부임하자 야학은 바로 학교 교실로 옮겨 본격적인 괘도에 올랐다. 당시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과정에서 경찰에 몇 번이나 불려가서 야학을 하게 된 경위, 교육 내용 등에 관한 질문을 받았고 지역교육청 학무과장에게 “자네에게 맡겨진 아이들이나 잘 가르쳐라.”라는 충고인지 질책인지를 들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 해에 몇 명이 고입검정에 합격하였다. 고입검정에 합격한 열네 살짜리 소녀는 열다섯에 가출하여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지금은 독일에서도 알아주는 심장수술 명의가 되어 있다. 나는 야학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했다. 그렇지만 청년 시절에 이미 이 시대의 교사가 어디에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중대한 답을 얻어냈다. 그 좌표는 그 후 내 교직생활의 중요한 지남차가 되었다. 이렇게 스물세 살에 벽지학교에서 열었던 야학은 내 인생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벽지학교에서 4년을 근무하고 청주시 근교의 학교로 나왔다. 여기서 나는 국문학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동경을 실현했다. 1980년 봄에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했다. 주경야독이 시작되었다. 3년간 어렵게 공부하여 졸업하였다. 그런데 행운이 왔다. 당시 초등교사는 발령대기자가 넘쳐나고 중등국어교사는 자원이 부족해서 초등교사 중에서 중등 국어교사 자격이 있는 사람을 전직 임용한다는 것이다. 준비도 없이 갑자기 토요일 오후에 시험을 치렀는데 월요일에 중학교 국어교사로 전직 발령이 나버렸다. 단양군내 어느 여중에서 1년을 근무한 다음 같은 지역의 여고에 이동 발령을 받았다. 이제 정말로 가르치는 맛이 났다. 학교에서 국어와 문학을 가르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서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노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교직생활이 신이 났다. 수업이 재미있고 행복했다. 정말 신나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때로 국어 문학 전공 교사로, 때로 생활지도 교사로, 때로 문학 동아리나 연극 동아리 지도교사로, 진학지도교사로 하는 일마다 긴장의 멋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 시절 적성에 맞지 않아 적응도 어려웠고 윗분들도 그다지 나를 반겨하지 않았던 것에 비하여 고등학교에서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늘 불려 다녔다. 그러면서도 수필가로 등단하여 문단활동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국어교사가 된 것은 내 인생에 아주 큰 구비가 되었다. 두 번째 터닝 포인트라고 할 만하다.
교직 생활 40년이 되던 해 나는 정년을 2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혈기 왕성하고 실력 있는 예비교사가 넘치는데, 한 발짝 떼어 놓을 열정도 사그라진 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내 자신이 녹슬고 무너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퇴직 후에 곧바로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실시하는 평생교육원 강사 과정 1학기를 이수하고, ‘수필창작교실’이란 이름으로 강좌를 개설했다. 처음에는 수강생 모집이 힘들어 폐강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강좌개설 8학기를 마치고 나니 수강자 중에서 5명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주당 하루 강의를 하지만 이 시간을 준비하면서 일주일을 즐겁고 행복하게 산다. 새로운 수강생들의 글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기분이다. 가르치는 즐거움보다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보는 기쁨이 더 크다. 가르치는 동안 그분들보다 내가 더 커가고 있는 기분도 든다. 또 그분들에게 나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는다. 퇴직 후에 수필창작교실을 연 것은 인생 후반에 가장 큰 변화를 준 마지막 구비라 생각한다. 말하자면 내 삶에 가장 크고도 별난 터닝 포인트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평탄하고 곧은길을 걸어오지 못했다. 전쟁 중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남보다 더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여기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만스럽거나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세 번의 커다란 삶의 구비는 죽순이 껍질을 벗으며 대나무가 되듯이 내게 마디를 만들어 주고 삶에 윤기가 흐르게 했다고 생각한다. 노년에도 구비 넘어 새로운 세계 도전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래서 청주지역에 새로 시작하는 '문화공간 우리'의 발기인에 참여하고, 여기에서 대중에게 수필을 알리는 '이방주의 수필 산책' 강좌를 신설하여 강의를 시작하려 한다. 내 인생의 또 하나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기대해 볼만한 일이다.
(실버넷 뉴스 청탁원고 2018.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