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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팔결들에 남아 있는 정북토성

느림보 이방주 2017. 6. 21. 19:37

팔결들에 남아 있는 정북토성

 




지난 4월 말 부모산성과 구룡산성을 답사했고 오늘은 우암산토성과 정북토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이효정 선생님과 함께 오후 2시에 학교에서 출발하여 먼저 우암산토성을 살펴보고 오후 420분 쯤 정북동 토성으로 갔다

성공회 주차장에서 우암산 순화도로를 거쳐 청주 국립박물관 앞에서 동부 우회도로로 들어가 사천동 새동네에서 정북동으로 가는 길로 우회전하였다. 밖에 바람이 몹시 불고 빗방울이 굵어졌다. 그만 두고 돌아오고 싶었으나 시간내기가 쉽지 않아 그대로 달렸다.

정북동 토성은 1995년경만 해도 잡목이 토성 위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성안에는 마을이 있었다. 근처를 지나면서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그냥 지나치곤 했었다. 그때 가서 사진을 찍어 두었더라면 오늘 답사와 많은 비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토성 입구 공터에 차를 세우니 굵은 빗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지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예전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내부를 깨끗이 정비해 놓았고 외부 정비도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바람을 맞으며 토성 안으로 들어갔다. 토성 내부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고 안내판만 있었다. 예전에 있던 마을도 깨끗이 철거하고 잔디를 심어 깔끔해 보였다. 통행할 수 있는 길만 정문으로 보이는 동쪽 문에서 서문으로, 남문에서 북문으로 내서 중앙에서 교차하게 했다. 동문에서 걸어서 토성의 한가운데로 가보았다. 중앙에서 다시 남문으로 가보았다. 남문은 서쪽에서 오는 성벽과 동쪽에서 가는 성벽이 서로 엇갈리게 쌓아 통로를 만들었다.

성벽 위로 올라가 보니 높이는 약 4m 정도 너비는 약 2m 정도 되었다. 성벽 위에는 나무를 베어낸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 나무 그루터기는 대부분 참나무와 소나무였다. 토성의 성벽 위에 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흔적이다. 소나무 서너 그루만 남아서 성벽의 허허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성벽 위를 천천히 거닐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서쪽으로 미호천이 흐르고 동으로는 정북동이 보였다. 그리고 너른 들판에는 이미 모내기가 끝나서 초록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멀리 남서쪽으로 부모산이 보인다. 부모산성에서도 여기를 보면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동으로는 상당산성, 우암산토성에 접하고 오창 산업단지 뒤쪽에 목령산이 바로 코앞이다.

정북토성이 있는 들판을 팔결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무심천과 합수하여 미호천이 되는 부분을 까치내라 하고 까치내로 흘러가는 물을 팔결물이라고 한다. 팔결물은 증평 보광천이 내수를 거치면서 오창에 이르는 기름진 들판을 적신다. 그리고 여기서 옥산을 지나 오송들로 이어진다. 정북동 토성은 바로 팔결물이 무심천 물과 합수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즉 팔결 들판에서 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부분에 있다. 전에는 성벽 위에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서 경지 정리한 들판 한가운데 마름모꼴로 들어앉은 것처럼 보였다. 마치 들판의 요새 같았었다.

정북토성은 이렇게 미호천변 평야지대 평지에 흙으로 쌓아올린 성이다. 조선 영조 20(1744)에 승려 영후靈休가 기록한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후삼국 시대인 9세기 후반이나 10세기 초에 조성되었다고 보면 적절할 것 같다. 그런데 발굴조사 과정에서 축성법을 보면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아직도 정확한 학설은 없는 것 같다.

토성은 찌그러진 사각형 모양이다. 둘레 675m이고 문지가 4개소이다. 남문지와 북문지는 좌우 성벽이 어긋나게 만든 것이 특이하다. 평면은 정확히 남북향은 아니라 하더라도 거의 정남북이며 동서남북 벽의 중간쯤에 통로가 있다. 서북쪽 모서리에는 미호천 제방으로 통하는 소로도 있다. 동문에서 서문으로 통하는 통로가 주된 통로로 보인다.

성안에는 우물이 있고 근세에 들와와 민가를 신축할 때 여기에서 돌화살촉과 돌창, 돌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또 석기 토기와 그 후의 자기도 나왔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아주 오랜 역사가 이 토성에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4년 충북대 차용걸 교수가 학계에 보고한 이래, '96'97년간 서쪽 성벽 일부와 서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성벽을 구축할 때 안팎으로 나무기둥을 세우고 널빤지로 가로막은 다음 내부에 흙을 넣어 층층이 다지는 방법으로 축성하였고, 기단은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토성 축성 연대를 추정하기 위해 서문지에서 나온 숯을 가지고 연대 추정을 해보니 서기 130년경이라고 한다. 9세기나 10세기의 후삼국 시대에 축성된 것이 아니라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천안 지방에 자리 잡았던 마한의 중심세력인 목지국目支國의 한 세력이 이곳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한다.

정북토성은 들판 한가운데 있는 토성이라는 것이 또 특이한 점이다. 들판 한가운데 왜 토성을 쌓았을까? 견훤은 이곳에 곡식을 저장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곡식이나 세곡을 저장했을 수도 있고 인근의 산성에 군량미를 공급하는 물류기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특히 상당산성이 보민을 위한 산성이었다면 피난한 백성들의 식량기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북으로 낭비성, 상당산성, 부모산성, 목령산성 등에 필요한 양식이나 다른 물자들이 이곳에 보관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는 식견이 짧아 단순한 내 생각일수도 있다. 이미 학자들이 조사 보고한 내용을 따로 공부한 내용도 별로 없이 생각해본 내용이다.

청주시에서는 정북동 토성의 정비 계획을 세우고 정비를 계속하고 있다. 삼국시대 초기의 의식주 등 다양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공원과 전통 화초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마한 시대 소도지역의 대표적 상징물인 솟대를 배치, 당시의 민간신앙 생활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초기 철기문화 시대의 제철·제련시설을 재현하고, 돌무덤과 덧널무덤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묘제를 부장품과 함께 소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 당시 사용된 칼, , 공성 도구 등 전쟁 무기를 배치하고 솟대 깎기, 성 쌓기, 전쟁무기 만들어보기 등을 할 수 있는 역사체험장을 운영한다. 억새밭과 조롱박 터널, 야외 광장도 만들어 고성古城의 정취를 살리기로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원 삼국시대 원형이 그대로 간직된 정북동 토성은 살아 숨쉬는 역사 체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당산성, 부모산성, 우암산토성과 연계하여 중요한 관광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시민들에게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알리고 역사에 대한 교양을 갖추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행정이라고 생각한다. 자치단체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이곳을 역사 체험공간으로 조성한다니 반가운 일이다. 이곳이 중요한 관광지 또는 문화 학습지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부랴부랴 승용차에 올랐다.

 

 

 

시대 : 백제

위치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350번지

종류 : 토성 (사적 415)

규모 : 둘레 675m(동벽 185m, 서벽 165m, 남벽 155m, 북벽 170m)

너비 1.5~1.6m 높이 3.5m

답사 : 2009630일 (친구 이효정 선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