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구룡산 현암사懸巖寺의 수행
구룡산 현암사懸巖寺의 수행
현암사는 구룡산성 아래에 있어 구룡산성 답사 길에 다시 한 번 들렀다. 현암사에서 내려다보면 대청호반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눈에 보인다. 호수 주변에 조성한 공원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현암사를 가려면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대청댐 완공 후에 조성된 현암정이다. 현암정에서 바라보면 절벽 위에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는 절집을 발견하고 마음 졸이게 된다. 호수 건너 청남대 쪽에서 바라보면 더 아찔하다. 그러나 백판 철계단을 밟고 올라서 보면 절은 그렇게 비좁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현암사를 가기 위해서 현암정 주차장에서부터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 오가리 장승공원 주차장에서 올라가면 제법 등산하는 기분이 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 20분쯤 올라가 산비탈을 10분쯤 더 걸어 모롱이를 돌아서면 바로 삼성각이 나오고, 이어 대웅보전이 초가집 처마에 붙은 제비집 같이 다가선다. 그래서 이 절을 예로부터 벽에 매달린 절집이라 하여 ‘현사’ 또는 ‘다람절’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대웅전에서 요사채로 내려서는 계단 아래 유명한 샘물이 있다. 샘은 바위 아래 있는데 예전에는 이 바위틈에서 쌀이 나왔다고 한다. 이 전설은 고려 광종 때 화진법사가 주지로 있을 때부터 전해져왔다. 어느 해 겨울, 폭설로 인근 마을 사람들은 물론 짐승들도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현암사에 있던 사미승과 화진법사도 배고픔이 점차 심해져 의식을 잃었다. 그때 법당 안에서 “법사는 바위 문을 열고 공양미를 얻도록 하라”는 부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진 스님이 기운을 차리고 그 곳으로 가보니 과연 바위 구멍에서 쌀이 흘러 나왔다. 그런데 쌀은 한 번에 꼭 한 끼를 해결할 정도만 나왔다. 그런데 며칠 후 수행승 열 명쯤 현암사를 찾게 되었다. 사미승은 열 명에게 공양을 주기 위해 쌀을 기다렸다. 그런데 쌀은 딱 한 명분만 나오고 그쳤다. 그래서 부지깽이로 쌀구멍을 쑤셔 보았다. 그런데 쌀구멍에서 쌀은 나오지 않고 쌀 타는 냄새와 함께 연기가 올라오더니 이후로는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쌀구멍에서 물이 나와서 지금도 샘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아마도 수도승이나 중생들에게 지나친 욕심을 갖거나 매사에 조급하게 굴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쌀바위 아래 샘물에서 여신도들이 쑥을 씻고 있었다. 초파일이 임박해서 떡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쑥을 넣고 만든 절편이 참기름으로 화장을 하고 함지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고소한 냄새가 환각 속에서 풍겨 나온다. 침을 꼴깍 삼켰다. 시원하고 맑은 물이 소담하게 쏟아져 나온다. 목이 타서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신도님들이 쑥을 씻는데 열중하고 계셔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바로 발아래 현암정에서 올라오는 철계단이 보인다. 이 길도 내가 많이 다닌 길이다. 철계단은 모두 108계단이다. 이 가파른 계단을 오르려면 겨울에도 땀이 난다. 한 번쯤 쉬어야 올라올 수 있는 곳이다. 계단 옆으로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삭도가 있다. 이 삭도를 통하여 물건이 올라오는 것은 본 일은 없지만 편리할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편리하게 물건이 올라오면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단점도 있을 것이다. 대청댐이 건설되기 이전에는 바로 오가리 그 아래 도로가 있었다. 거기부터 현암사까지 올라오려면 꼭지가 돌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니 전국시대에 삼국의 세력 다툼이 심할 때는 이 능선을 지켜 문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군사들이 거처해야하는 작은 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당에서 바라보는 대청호수는 절경이다. 커다란 용이 용틀임을 하듯 구불구불 옥천 쪽으로 이어진다. 아니면 베를 짜서 푸른 물을 들여 너른 들판에 널어놓은 듯하다. 그 절경 한 가운데 청남대가 있다. 안내판에 보면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원효대사가 구룡산의 산줄기를 보면서 아홉 마리의 용과 같다하여 구룡산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또 용은 물이 있어야 하므로 언젠가는 호수가 생길 것이며 호수가 생기면 산줄기 가운데 왕王자 지형이 생겨서 임금이 이곳에 머물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청남대가 생기고 민간인의 접근을 막았던 일이 생각난다. 속설에 의하면 이 천년 고찰인 현암사도 없어질 위기에 있었다고도 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청남대 보안에 방해되니 불태워버리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충성스러운 보좌관이 목숨을 걸고 간청하여 살아났다고 한다. 절경은 절경대로 또 수난의 역사가 존재한다. 마치 곧은 나무가 쉽게 베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권력에 의해 사찰이 훼손되면, 바로 그 권력이 파멸을 당하는 일은 역사상에도 수없이 많다.
천년고찰 현암사는 백제 전지왕(腆支王) 때 달솔 해충(解忠)이 창건하고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중건했음도 성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 정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8년 불자 김사익의 시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대청댐이 건설된 이후 경관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아마도 신도가 늘어났을 것이다. 원효대사의 예언처럼 한국불교가 이 절에서 흥왕興旺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절집에서 또 동쪽으로 난 오솔길을 걸어 조금만 올라가면 최근에 조성한 석탑을 만난다. 그냥 대충 서서 주변을 바라보아도 명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룡산 정상에서 도도록하게 솟아오른 둔덕 위에 평평한 대지가 오십 평쯤 되어 보인다. 이곳에 탑을 세우고 기도처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청남대가 정면으로 보인다. 청남대가 그냥 있었으면 이 석탑도 세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룡산 현암사를 돌아보며 빼어난 경관 이외에도 수없이 수난을 받아오면서도 견디어낸 사찰의 역사에 숙연해진다. 개인이나 사찰이나 또는 국가나 고통을 자청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가오는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고 발전의 과정이라 생각하며 담담하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고행이 아니라 수행이라는 씨앗이 되어 보다 크고 달달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 위치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하석리 50번지 (구룡산九龍山)
▣ 규모 :
▣ 형식 : 대한불교조계종 법주사 말사
▣ 답사 : 2009년 4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