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청주 탈환의 요새 부모산성父母山城
청주 탈환의 요새 부모산성父母山城
오후에 시간이 있어서 부모산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강서동 휴암고개를 들머리로 삼아 시작했다. 오르막길에서 주변이 잘 보였다. 강서동 반송 마을도 이제는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서 작은 도읍을 이루었다. 부모산 녹음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 기온이 약간 쌀쌀해서 겨울 셔츠를 준비해 왔는데 기온이 갑자기 올라 25도를 넘으니 찜질방에 들어선 기분이다. 등산로 옆에는 영산홍과 흰 철쭉이 피어 아름답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어떻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따를 수 있을까. 곳곳에 양지꽃, 제비꽃이 피었고, 등나무 연보랏빛 꽃이 은은한 향기를 흘리고 있었다.
부모산성은 테메식 석축산성이다. 성벽이 정상 부분을 동그랗게 테를 두르듯이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이 성벽 위를 밟고 다녀서 길처럼 되어 버렸다. 정상에는 KT 통신시설을 해 놓아서 올라설 수 없다. 안내판의 그림에서 보는 부모산성은 지형을 이용해 성벽을 구축하여 전체적으로 역삼각형 모양을 보였다. 성벽은 거의 다 무너져서 돌무더기처럼 보였다.
돌무더기를 조심스럽게 디디고 내려가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한 돌이 무질서하게 무너져 내렸다. 기저 부분은 성의 기본 모양이 남아 축성을 방식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석공들이 돌을 다듬는 모습, 무너지기 전의 모습 등을 상상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성벽 위로 난 길을 걸으면서 작은 기와조각이나 토기조각을 찾으려고 돌무더기를 살폈다. 돌무더기 속에서 기와조각 몇 개를 주웠다. 빗살무늬가 선명하고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지휘소나 성문이 있었을 것이다. 안내문에는 동, 서, 남, 북 4개의 성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강자갈도 몇 개 보였다. 대개 산성 안에서 강자갈이 많이 발견되는데 이것은 격전지였음을 말해 주는 근거라고 한다.
서쪽 사면으로 돌아가자 석성이 끊어진 듯이 문득 멈추어 버린다. 성은 갑자기 북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이곳에서 재단법인 중원문화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북문지가 보였다. 중원문화연구원의 발표에 의하면 이곳을 중심으로 송절동과 화계동 일대에 커다란 정치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전기에서 볼 수 있는 토광목관묘, 토광목곽묘 유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는 백제의 유물이 대부분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4세기경에 백제가 이곳에 진출하여 확실하게 지배했을 가능성을 발굴 결과 추정하고 있다.
신봉동의 백제 유적, 청원 낭성에 고구려 유적, 보은 삼년산성과 문의 양성산, 구룡산의 신라 유적의 흔적이 존재하는 것을 미루어보면 4세기로부터 5세기경 삼국 항쟁기에 청주 지역에 크고 작은 성이 수없이 많아야 했던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즉 청주 일대의 기름진 땅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각축전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산성이 주변을 관망하는 중심지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주변에서 시계가 트인 부모산성이 최적지였을 것이다.
북문지는 동쪽과 서쪽이 작은 산줄기를 바람막이 삼아 움푹 정상 쪽으로 들어간 구릉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명당이 좌우의 산줄기를 좌청룡우백호로 거느린 모습이었다. 전략적으로도 동쪽과 서쪽의 작은 산줄기를 엄폐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북문지 발굴조사로 나무를 베어낸 덕분에 서쪽 산 아래가 탁 트인다. 가까이 지동동으로부터 멀리 옥산, 오창 과학산업단지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오송읍을 지나 전의 운주산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정상에서 남으로 직선거리 5km쯤에 팔봉산이 있고, 그 너머로 남이면 척산리의 봉무산이 있다. 봉무산에서 부강 쪽으로 독안산성, 복두산성, 성재산성이 있고, 복두산성에서 북으로 강내면의 저산성이 있고 단군성전을 모신 은적산이 여기서 코앞이다. 서쪽으로는 연기 운주산성과 서남쪽으로 연기 당산성이 원수봉산성으로 이어져 부강의 합강과 만난다. 부가의 산성들은 동으로 건너와 문의 구룡산성과 청주의 우암산토성, 상당산성으로 이어진다. 북으로는 오창의 목령산성과 초정의 구녀성과도 연결된다. 이렇게 보면 부모산성은 이러한 산성의 띠의 한가운데가 된다. 청주의 서쪽 통로를 지키는 요새일 뿐 아니라 지역의 사령부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를 청주 탈환의 요충지라고 하는가 보다.
여기에 시민이 운동할 수 있는 기구를 설치해 놓았다. 멀리 옥산까지 탁 트인 미호천변의 기름진 들판을 바라보면서, 중부고속도로를 넘어 오창과학산업단지, 오송보건과학단지를 내려다보면서 운동 기구에 올라 앉아 심신을 단련하는 시민들이 참으로 한가로워 보였다. 이 사람들이 삼국 시대의 격전장이었던 이곳의 애환을 알기나 할 것인가? 또 몽고의 침입으로 이곳 주민들이 생사를 넘나들었던 정신적 고충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반대로 이 작은 성에 모여 옥죄어 오는 외적으로 부터 어떻게 하든지 명줄을 부지해야만 했던 당시의 백성들도 오늘의 풍요와 한가로움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너진 석성은 시간의 축지법으로 역사의 벽을 넘어서서 과거의 고통과 오늘날의 풍요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과연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궁금하기만 했다.
북문지를 지나 동편으로 돌아 나오는 길옆에 사람들의 휴식터가 있다. 여기는 마치 전망대 같아서 청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이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돌아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구릉이 있고 거기에 연화사가 있었다. 연화사는 고려시대 지어진 연월사가 임진왜란 중에 폐쇄되었다가 1928년경에 훗날 금강산 유점사 주지를 지낸 김청암 스님이 재창건했다고 한다. 김청암 스님이 재창건 불사를 앞두고 절터에 연꽃이 만발하는 꿈을 꾸어 연화사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성이 있는 산줄기를 따라 몇 개의 작은 규모의 보루가 존재하고 있다. 이들 보루는 부모산성이 축조되기 이전의 유적일 가능성도 있으며, 부모산성과 같은 시기에 보조 성일 가능성도 있어 앞으로 이에 대한 지속적이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성벽의 기저부가 원상태로 남아 있으며, 중부이남 지역에서는 처음 조사된 계단식 보축 성벽 등 역사적으로 고찰할 자료가 많이 남아 있어 청주지역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알려졌다.
돌아내려오는 길이 약간 씁쓸했다. 답사 이전에는 그냥 작은 산성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유적이라는데 가슴 뿌듯하기도 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씁쓸했다. 부모산에서 산성 답사의 첫발을 내디디지만 어떤 생각으로 어느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착잡하기만 했다.
▣ 위치 :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10-1(부모산 정상 해발 231.7m)
▣ 문화재 지정 : 충청북도 기념물 121호(2002년 1얼 지정)
▣ 규모 : 둘레 1,135m, 높이 6m 내외, 너비 6.4m
▣ 형식 : 테메식 석성
▣ 답사 : 2009년 4월 28일(함께 간 사람 친구 이효정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