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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직동 성치산성城峙山城의 아픈 피 흘림

느림보 이방주 2017. 6. 14. 23:39

직동 성치산성城峙山城의 아픈 피 흘림

 

      

 

성치산성은 대전시 동구 직동에 있다. 노고산성에서 마주 보인다. 옥천 군서면 은행리 상은부락말동산 정상에 있는 성티산성을 성치산성이라 부르기도 하기 때문에 혼동할 수도 있다. 옥천 성티산성은 관산성 전투와 관련 있는 배후기지라 할 수 있어 금강 유역의 요새인 직동 성치산성과는 성격이 다르다. 혼자라 외롭지만 낮은 산이라도 험한 산성답사를 함께 가자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냥 혼자 출발하기로 했다.

대청댐을 지나 대전으로 가다가 조정지댐 가가 전에 옥천으로 가는 대청호반도로로 좌회전했다. 우거진 벚나무 가로수와 짙어가는 숲이 혼자 보기 아깝다. 가뭄 타는 계절인 보리누름인데도 만수된 호수는 꽃피고 녹음이 짙어가는 산봉우리들을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었다. 찬샘체험마을 광장에 차를 세웠다. 여기에서 바라보면 동쪽으로 노고산성이, 동남쪽에는 견두산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둘러싸고 있고, 동북쪽 봉우리가 성치산성이다.

찬샘정으로 가는 작은 고갯마루에서 성치산성 2km’라고 이정표가 안내한다. 1시간만 걸으면 된다. 잠깐 사이에 날망에 올랐다. 여기부터 등마루를 타면 된다. 녹음이 짙다. 어느 주검의 원혼일까. 간혹 울어대는 새소리에 산은 더욱 고요하다. 길은 뚜렷한데 사람은 없다. 오늘은 마루길이 다 내 차지이다. 천천히 걸었다. 등마루 오르내림을 몇 차례, 등줄기가 땀에 젖을 때쯤 마지막 치고 올라가면 정상이다. 혼자서는 정상의 이 고요가 무섭다. 이정표가 또 있다. 살펴보니 자동차길이 피골 마을에서 여기까지 바로 나 있다. 성치산성만 본다면 여기까지 와서 차를 세우고 산을 올라가면 될 것이다.

숨을 몰아쉬며 마지막 오르막을 올랐다. 문득 무너진 돌무더기가 잡목 속에 숨었다. 남문지로 보이는데 돌만 수북하게 굴러 내린다. 동쪽 사면에는 군데군데 성벽의 흔적이 남았으나, 북쪽 사면은 그냥 너덜이 되었다. 문지에 기와조각이라도 있는지 살폈다. 찾을 수 없다.

성 안으로 들어갔다. 봉우리로 오르는 것이다. 성안은 단을 모은 것처럼 흙을 쌓아 올려 두둑하게 높은 곳이 있다. 장수가 지휘한 곳이라고 한다. 테메식으로 석축산성 둘레가 고작 160m인데 무슨 장수가 있었을까? 오늘날 소대 정도 되는 한 무리의 군사가 이곳에서 정찰 임무를 띠고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먼 데를 살펴볼 수 있는 망루라고 하는 게 좋겠다.

북쪽 성벽은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북동 성벽은 흔적이 뚜렷하게 살아있다. 가로 50, 높이 20정도로 납작한 성석을 정교하게 쌓아 올린 성벽 15단 정도가 3~4m나 남아 있다. 성의 외벽은 2~3m나 되어 높지만 내벽은 1~2단 정도로 나지막한 협축산성이다. 돌은 크지 않은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다. 쌓은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장정이나 축성의 기술이 없는 사람도 우리 겨레면 누구나 할 수 있을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벽은 3~4m 정도 남아 있고, 또 한 2~3m 정도는 무너져 내렸고, 이어서 또 3~4m가 정확히 남아 있었다. 성은 전체적으로 고구마 모양으로 길쭉한 타원형이다. 가운데 불룩한 곳은 장대나 망루가 아니면 모성인 계족산성으로 신호를 보내던 봉수대였을 것이다.

노고산성과 함께 성치산성이 안고 있어 평화로워 보이는 핏골은 피가 도랑을 이룰 정도로 처절한 전쟁터였다는 전설을 상기하니 이곳에서 죽어간 많은 장병들의 넋이 안타깝다. 마을 사람들은 또 얼마나 시달림을 받았을 것인가. 멀리 호반을 넘어 샘봉산이 우뚝하다. 물속에 잠긴 마을의 수많은 이야기들도 말없이 고요하다. 피를 흘리며 죽어간 어린 장병들의 두런거림이 들리는 듯하다. 굶주림과 목마름을 참으며 아내와 부모자식이 뼈저리게 그리워하던 순수들이 억울하게 죽어갈 때 권력은 무엇을 했을까.

전쟁은 왜 필요한가? 누구를 위해서 전쟁이 있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전쟁을 했고 소중한 젊은이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헛되이 버렸을까.

우리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까. 어떤 명분으로 죄 없는 사람을 사지로 보내면서 영웅이라는 공허한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 참 우습다. 오늘 참 색다른 생각을 하였다. 성이 너무 작았기 때문인가. 그날의 함성은 들리지 않고 그들의 두런거림만 귓전에 맴돈다. 내려오는 길이 우울하다.

내려오는 길에 다른 길을 택했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처럼 전망 좋은 묘지 상석에 앉았다. 호수를 건너 후곡리 대각사가 있을 법한 마을과 산줄기가 마치 성문처럼 감싸 안은 벌말이 있었을 법한 언저리와 그 너머 진사골이나 뒷골들을 살피다가 절경에 빠져버렸다. 그러다가 길을 찾아도 없다. 끊어진 것이다. 그냥 내리막길로 내려쳤다. 묘지가 하나 더 나오고 흐릿한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길이 점점 뚜렷해지더니 수렛길이 나왔다.

수렛길을 따라 찬샘마을로 향했다. 수렛길 바로 옆 우거진 잡목 사이에 외국산 고급 SUV 차량 한 대가 서 있다. 시동이 걸려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차가 움직이는 듯하다. 가까이 가 보았다. 검은 색으로 빛을 차단한 차창 너머에서 연인인지 불륜인지 원초적 쾌락을 누리고 있었다. 저들도 피 흘림을 알까. 나는 성에서 속박 당하던 옛 사람의 아픈 피 흘림을 보고 오는데, 저이들은 규범을 초월한 쾌락의 피 흘림을 만끽하고 있었다. 성터에서 하는 성생활이니 사실 큰 구경거리도 아니다. 그냥 바로 돌아 나왔다. 정말로 그냥 왔다. 옛 성터에서 원시적 자유를 누리는 현대인까지 보았으니 오늘의 소득도 쏠쏠하긴 하다. 그러나 가슴 한편은 시퍼런 멍이 든 기분이다.

찬샘 마을엔 내 차가 혼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가볍다. 차안의 베드신이 눈앞을 가로 막지는 않았다. 산성에서 밤을 새우는 하급 군사들의 두런거림만 귀를 괴롭혔다.

 

 

 

 

위치 : 대전시 동구 직동 산 4번지 (해발 210m)

종목 : 대역전광시 기념물 제29(지정일 1993.06.21)

규모 : 둘레 160m, 4,3m 높이 2.4m 타원형 석축산성

시대 : 삼국시대(백제 시대)

답사일 : 20115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