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핏골 노고산성
핏골 노고산성
완연한 봄날 아침이다. 포근하고 날씨도 맑다. 이런 날을 맞아 노고산성 답사를 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면서 들머리를 찾았다. 친구 연철흠 선생과 불온이 함께 가기로 했다. 두 분을 태우고 옥천으로 가는 대청호반도로 들어섰다. 대전시 동구 직동 체험마을 찬샘정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찬샘정에서 바라보이는 호수의 경치가 아름다워 정자에 올라 한참동안 주변을 돌아보았다. 호수 건너 후곡리 마을이 보일 듯 말 듯 한다. 바로 노고산성으로 올라갔다. 언 땅에 봄기운이 들어 양탄자를 디디는 것처럼 부드럽다. 30분 정도 올라가니 등마루길이다. 벌써 꽃잎이 피어나는 진달래도 있다. 호수가 아름답다. 햇살에 빛나는 물빛과 점점 푸르러가는 산줄기가 좋다. 옅은 안개 속에 묻힐락 말락 하는 호수에 감긴 산줄기가 더 아름답다.
정상까지 올라갔다. ‘기념물 19호 노고산성’이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산성의 흔적이 여기저기 조금씩 보였다. 아마도 표지석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성은 그렇게 크지 않다. 둘레가 약 300m 정도의 석축 테메식 산성이다. 소대 정도의 군대가 주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설명에는 둘레가 300m나 된다고 하지만 눈에 뜨이는 것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성벽이라고 하는 것도 그냥 돌더미이다. 그리고 인공으로 구조물을 설치했는지 홈이 있는 돌도 발견하였다. 와편 같은 것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건축물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돌을 쌓아 놓고 가로대 같은 것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는 장치를 마련해 놓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무너진 성을 다시 복원하면 원형이 망가지고, 그대로 두면 유물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것이 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 일을 잘 판단해서 시급히 조치를 취해야 할 일이다. 운주산성을 가보면 일부 복원한 부분이 있지만 복원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서 철삭을 설치한 곳이 있다. 나는 그것이 좋다고 본다.
정상에 올라 쉬면서 주변 경관을 바라보았다. 성곽의 흔적은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표지석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산행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짧아 아쉬운 마음에 산을 내려가서 견두산성으로 가는 안부까지 갔다가 다시 올라 왔다.
저 아랫마을이 핏골이다. 이런 이름을 지은 것은 노고산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피가 내를 이루었기 때문이라 한다. 하긴 이 노고산성과 견두산성 성치산성이 트라이앵글을 이룬 그 가운데에 핏골 마을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여기 서서 대청호를 바라보니 경관은 빼어나지만 골짜기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는 옛날의 함성과 절규가 들려오는 듯하다.
성곽의 바로 옆에 할미 바위가 있다고 한다. 이 바위 때문에 노고산이라고 했다지만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전국에 노고산은 많다. 그리고 노고산에는 산성이 있게 마련이다. 사실 노고라 하면 마을을 지키는 여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의 노고산성들은 마을을 지키는 할미신의 지킴을 실제로 받는지 모르겠다.
전망이 좋다. 대전의 계족산성이 있는 계족산, 문의 양성산, 샘봉산이 보인다. 이곳은 주변의 다른 산성들과 연계하여 적을 막는 요새 구실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물에 잠겨 있지만 경상도에서 옥천을 거쳐 바로 청주 부근으로 진입할 수 있는 요새를 지키는 산성이다. 노고산성은 바로 남쪽에 있는 견두산성, 서쪽에 있는 계족산성과 문의 양성산성, 구룡산성과 규모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옥천 문의간 교통로를 지키는 소규모의 부대가 주둔하거나 부모산성이나 삼년산성의 전초기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호점산성은 이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포곡식으로 계곡을 안고 있어서 계곡의 마을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고장 주변에 산성이 특히 많은 것은 삼국의 접경지대였기에 그만큼 군사 시설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는 성곽 자체가 행정 시설을 담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군사를 막아야 했고, 신라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군사를 막아야 했을 것이다. 특히 대청호 주변은 공주, 부여와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백제의 입장에서는 철통같은 경계를 해야 했을 것이다. 또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지정학적으로 영남이나 호남권에서 서울로 향하려면 반드시 거쳐야하는 교통의 중심지며 전략적 요충지로 빼앗고 싶은 곳이며 꼭 지켜내야 했던 곳이다
▣ 소 재 지 대전 동구 직동 산43 (해발 250m)
▣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9호
▣ 시 대 삼국시대 (백제시대)
▣ 규모 : 둘레 300m, 테메식 석축산성
▣ 답사일 :2011년 2월 24일(친구 연철흠 선생, 남주완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