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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질현성迭峴城은 옛 모습이 남았네

느림보 이방주 2017. 6. 9. 08:08

질현성迭峴城은 옛 모습이 남았네

 

 

고봉산성에서 조금 내려오니 임도가 있다. 질현성이 있는 산은 칠현산이라고도 한다. 임도에서 안내 이정표를 따라 칠현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길을 얼마 오르지 않아서 성의 윤곽이 뚜렷한 질현성이 보였다. 가파른 산길을 정신없이 올라가다가 바라보니 거의 40~50m나 되는 석성이 잡초더미 속에 묻혀 있었다. 나는 흥분했다.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미끄러지기도 하고 기다시피 하면서 성벽 가까이 갔다. 잡목이 자라서 사진을 찍기도 어려웠지만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줄자로 성석의 크기를 재어 보았다.

돌의 너비는 다르나 높이는 대부분 일정하다. 너비는 45~100cm정도로 다양하고, 높이는 28cm로 일정했으며, 깊이는 50cm 정도가 넘었다. 너비가 다르므로 돌을 엇갈리게 쌓을 수밖에 없어 더 견고하고, 돌의 높이가 일정하므로 안정감 있어 보였다. 돌은 약간 희끗희끗해진 모습이었다. 남아 있는 부분을 세어보니 15개 층 정도 되었다.

약간 무너진 곳을 들여다보았다. 흙에 묻힌 깊이는 50cm가 넘어 보였다. 돌과 돌 사이에 잔자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흙에 작은 자갈을 섞어서 다져 넣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성벽 바깥쪽은 돌의 모양을 일정하게 다듬어 쌓았고 안쪽은 자연 그대로 두었다. 자연적으로 울퉁불퉁한 부분에 흙을 다져 넣었으니 단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외축내탁의 공법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쌓은 것이다. 그래서 1500년을 넘어 오늘까지 이렇게 성의 모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성벽의 모양이 이렇게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별것 아닌 것으로 지나칠 수 있겠지만 잠시만 그 세월을 생각하면 경이롭게 느껴질 것이다. 혹자는 중국의 만리장성의 견고함을 보라고 할지도 모른다. 인도의 아그라 성을 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성들은 대개 벽돌로 찍어서 견고하게 쌓았거나 아주 연한 돌을 정교하게 갈거나 다듬어서 쌓은 것이다. 그러나 질현성과 같은 백제의 산성을 비롯한 우리나라 산성은 단단한 화강암을 정으로 쪼아 정교하게 다듬어서 쌓은 점이 다르다. 돌이 단단해서 다듬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무겁기 때문에 이동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단단하고 무거운 돌에 사람들의 몸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 모든 어려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둘레 800m라고 하는데 실측이 어렵고, 높이는 1.5m라지만 4m가 넘는 곳도 있었다. 성은 상당히 큰 규모이다. 물론 임존성이나 학성산성, 장곡산성 같은 대규모의 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계족산성의 자성이라고 한다면 비교적 규모가 큰 성이다. 그 만큼 중요한 요새였을 것이다. 옥천에서 회인, 문의, 청주로 가는 길목이고 견두산성과 마산동산성, 백골산성, 고리산성으로 이어지는 잇는 요새였을 것이다. 질현성과 계족산성의 사이에 있는 질티라는 고개를 넘으면 바로 대전이고 대전을 지나면 웅진, 사비로 바로 통한다. 질현성은 질티라는 길목을 지키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안전지대이지만 당시는 현재로 치면 비무장지대만큼 긴장감이 감도는 전방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산성이다.

일설에 의하면 질현성은 백제 부흥군의 지도자들인 복신, 도침, 흑지상지 등이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풍을 일본에서 모셔와 이곳에서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맹약한 취라산일 수도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취라산 맹약은 웅진도독으로 온 태자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사이의 맹약이었다고도 하니 어떤 말이 맞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백제 부흥군 지도자들의 맹약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부여융은 포로로 당에 갔다가 웅진도독으로 왔으니 삼국사기의 설이 신빙성이 있지만 취라산은 웅진 가까이에 있다고 하니 그도 믿기 어렵다.

6627월 백제 부흥군은 이 질현성에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패한 백제부흥군은 그해 8월 복신이 전열을 가다듬어 대전 월평동산성(유성산성 혹은 내사지성)에 진을 치고 공격을 시도했지만, 신라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 장군에게 크게 패했다고 한다. 백제 부흥군의 여건이 어려운 점도 있지만 지도자들의 불신과 배반으로 부흥군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도침과 복신 흑치상지의 맹약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든 거점으로 알려진 임존성에서 있었든 참으로 허무한 약속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대청호의 물도 서글프게 생각되었다. 또 이렇게 작은 성에서 부흥군의 중심 지도자들이 중요한 맹약을 했다는 것도 성왕이 50명 군사만 데리고 적진을 시찰한 것만큼 위험한 일이라 생각된다.

개머리 산성으로 가기에 앞서 질현성 정상에서 잠시 주변 산줄기를 돌아보았다. 고리산과 백골산성, 개머리산성과 계족산성이 다 보였다. 대청호의 작은 섬들이 다도해처럼 보였다. 과연 요새는 요새이다.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산 31-1번지 (칠현산)

문화재 지정 : 대전광역시 시도 기념물 8

축성시기 : 백제시대

규모 : 넓이 11,107, 둘레 800m, 높이 1.5m 내탁외축의 테메식 석축산성

답사일 : 201731(함께 간 사람 :이효정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