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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대전의 진산 계족산성

느림보 이방주 2017. 6. 7. 15:12

대전의 진산 계족산성

 

 

518, 학교에서 소풍가는 날이다. 나는 담임을 맡지 않았으니 할 일이 없다. 계족산에 가야겠다. 출근해서 연가를 내고 바로 출발했다. 장동산림욕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 들어갔다. 이 산에는 여러 번 왔었지만 그때마다 숲길 순환로만 걷었다. 봄에는 벚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숲길에서 보이는 대청호는 절경이다. 그런데 그 때마다 일행이 대청호 부근의 산들을 짚어 주어도 잘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제 여기서 건너다보이는 후곡리, 가호리 쪽 산들은 혼자서도 알아볼 수 있다. 계족산성을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일행이 모두 달가워하지 않아 못 올라갔다.

주차장은 거의 비어있는데 진입로에 차가 가득하다. 산책하러 오는 이들이 진입로까지 차를 타고 들어온 것이다. 걷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걸으러 온 격이다. 황톳길을 맨발로 걷는 이들이 많다. 나도 발바닥으로 전해 오는 말랑말랑한 느낌이 유혹할까봐 바로 길을 건너 계족산성 입구 계단으로 붙었다. 오늘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황토 순환로에서 계족산성까지는 1.5km라고 한다. 천천히 올라가면 된다. 땀이 흐를 무렵 수건을 목에 두르니 바로 성벽이 우뚝 나타난다. 성은 옛 모습은 없다. 고증을 거쳤겠지만 보수한 성이다. 삼년산성하고 아주 비슷하다. 축성법이 삼년산성하고 같아서 백제산성이 아니라 신라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성은 너무나 완벽하게 쌓았다. 납작한 돌을 쌓는 방법은 북쪽 성벽의 남아 있는 부분과 비슷하다. 보수는 북서쪽에서부터 서쪽 벽은 보수했으나 동으로 이어지는 성벽은 덤불 속에 묻혀 있었다. 덤불을 헤집고 들여다보니 본래의 모습이 남아 있다. 보수할 때 이렇게 남은 벽의 모습을 통해서 같은 방법을 택하는가 보다. 서쪽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상당히 높다. 본래의 모습인지 알 수는 없어도 이렇게 높게 쌓으려면 얼마나 많은 인력을 쏟아 부었을까? 성벽의 높이도 대단하고 넓이도 상당히 넓다.

서측 성가퀴를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성벽은 깔끔하게 보수되었다. 보수라기보다 새로 쌓았다고 해야 될 것 같다. 너비는 넓어서 5m도 넘을 것 같다. 지형에 따라 구부러진 곳은 거기에 맞추어 축성을 하였다. 중간에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지 않은 곳도 있다. 삼년산성을 유네스코 조사단이 확인한 결과 너무 심하게 보수를 해서 세계 문화유산 등재에서 탈락하였다는데 여기도 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삼년산성은 중간에 옛것을 그대로 살린 곳이 여러 군데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문지로 향했다.

남문지에 이르렀다. 남문도 보수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았다. 남문지의 성벽은 완전히 새로 쌓았다. 아주 작게 수구를 만들어 놓았으나 지금은 물이 빠질 것 같지 않다. 주변에 쉽게 발견되는 기와편으로 보아 성문과 누각이 있었을 것이다. 건축물이 있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남문지는 보통 다른 성보다 넓고 크다. 문 폭이 약 3.8m라고 한다. 치성의 보수한 부분도 성벽이 웅장해 보였다. 남문지 높은 장대 위에서 멀리 옥천에서 문의를 거쳐 청주에 이르는 길이 다 보였다. 동으로 개머리산성이 바로 코앞이고 개머리산성에서 남으로 질현성과 고봉산성의 능선이 보인다. 또 북으로 마산동산성, 노고산성, 성치산성의 산줄기가 뻗어 있다. 개머리산성에서 동으로 호수를 건너뛰면 백골산성이고 그 바로 뒤편이 고리산성이다. 바라보니 개머리 산성이 사거리가 된다. 과연 요새라고 할만하다. 지금은 호수 밑에 들어가 있지만 이 길은 삼국 시대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다 차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 산성이 그렇게 많은가 보다.

계족산성은 산마루가 좁고 남북으로 길다. 테메식 산성이지만 산봉우리를 둘러 싼 것이 아니라 서쪽은 산마루 가까이에 그리고 동쪽 성벽은 산마루에서 거의 50m 쯤 기슭으로 내려가 쌓은 타원형으로 보였다. 동남쪽 성벽 위로 가보았다. 여기서 테메식 산성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동측 성벽은 비탈진 동쪽 사면에서 북쪽으로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멀리서 보아도 보수 작업이 한창이다.

남동쪽 성벽 위에 서서 볼 수 있는 곳을 멀리 바라보았다. 우선 내가 알 수 있는 곳을 바라보니, 핏골이 보였다. 분명하게 노고산성, 성치산성이 있는 산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멀리 샘봉산 아래 후곡리 벌말로 들어가는 물길이 보였다. 청주 쪽으로 아름다운 경관이 가물가물하다. 그렇다면 견두산성(개머리산성)은 어디일까? 나는 지도를 기억하며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으며 외워 보았다.

그곳에 허연 수염이 소담한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자신을 김씨라 소개하면서 환산과 성왕의 사절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해 주었다. 이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조선시대 역사나 왕가나 학자들의 비화를 들려주실 때 선친의 상기된 모습이 생각나서 구절구절 감탄하며 들었다.

성안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이 있었다. 바위를 쌓아 장대를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이곳이 장대지라면 남문지에서 아주 가깝고 조망이 좋은 곳이다. 장대지 주변에 넓은 공터는 건물이 있었을 자리로 보인다. 이곳에서 고려시대 와편, 조선시대 자기편이 발견된다니 조선시대까지도 매우 중요한 시설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계족산성은 신라가 쌓은 산성인지 백제가 쌓은 산성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대부분 백제가 AD 6C 경에 쌓은 산성으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축성방법이 내탁內托공법에 의하여 외면을 맞추어 편축片築하여거나 부분적으로 협축夾築한 부분이 신라 삼년산성과 거의 동일하기도 하고, 발굴 조사 결과 가장 오래된 토기편이 신라 것으로 밝혀져 신라가 축성하고 백제가 점령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성왕 전사와도 관련이 깊다. 이곳이 신라군의 전진 기지였기 때문이다. 백제 부흥군에 점령되어 부흥군의 주요거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서라벌에서 웅진에 이르는 웅진도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던 백제 부흥군의 거점으로 삼국 쟁패의 중요한 유적이다. 청주와 청원, 보은, 옥천, 영동, 대전, 연기, 공주로 가는 길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백제 부흥군까지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고, 조선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활동근거지이기도 했다고 한다.

오늘 계족산성 답사는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다. 대전에서 청주에 이르는 산성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당시의 상황을 머리로 그리면서 쓸데없는 소모전으로 국력을 낭비했던 삼국시대를 반성하게 되었다. 역사를 내다보는 정치가들이 당시에도 있었다면 고구려와 신라 백제가 쉽게 통일을 하고 저 광활한 만주 동북 삼성을 중국에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미워하는데 쓰는 경비가 얼마나 많은가? 안타까움으로 다시 한 번 산성을 바라보았다. 아울러 아무리 가슴 아파도 견두산성은 곧 찾아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려오는 길은 아주 쉽다. 순환로와 만나는 지점까지 내려와서 신과 양말을 벗었다. 말랑말랑한 감촉을 아주 가깝게 느끼며 한 4Km를 걸어 내려왔다. 군데군데 손과 발을 씻는 곳을 마련해 놓았다. 여기서 산성 보고 산책하면 일석이조가 되겠다.

 

 

소재지 : 대전 대덕구 장동 산85 (계족산 해발 420m)

문화재 지정 : 사적 제355(1991.10.25.)

규모 : 면적 51,984둘레 1650m, 높이 약 7~10m

시 대 : 백제시대 산성(AD 6C ), 신라계 산성으로 알려지기도 함

답사일 : 2011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