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이방주 2017. 4. 23. 10:10

가림성加林城 사랑나무

      

2017416

가림성에서

   



부여 성흥산 가림성 남문지에는 수령 400년쯤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사람들은 이 느티나무를 사랑나무라고 부른다. 사랑나무는 가까이에서 보나 멀리에서 보나 위에서 보나 아래에서 보나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닌다.

남문지에서 동문지까지 약 700여 평 정도 되는 평지를 지나 동문지로 가다가 사랑나무를 되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이 느티나무가 하트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무 전체의 모습은 역으로 하트모양이고 오른쪽 맨 아래 가지 모양이 남문과 더불어 바른 하트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성흥산은 해발 260m의 낮은 산인데도 사랑나무 주변에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서 느티나무만 보인다. 멀리 강경들에 봄볕에 반짝이는 금강 줄기만이 비단이 되어 검이불누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하는 백제의 빛깔로 흐르고 있다. 다만 느티나무 곁에 스승을 닮은 크고 작은 젊은 느티나무 세 그루가 착한 제자처럼 서 있다. 산성 보루로 올라가는 길옆에 잘 생긴 소나무 여남은이 주군을 시위侍衛하듯 모여 공수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나무라 했구나.

조금 있으려니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끌고 올라왔다. 쌍쌍이는 아니라도 자전거 동호회에서 봄맞이 라이딩riding을 나온 모양이다. 여성회원 웃음소리가 크면 남성회원은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쌍쌍이 데이트 코스로 잡은 젊은이들도 두세 쌍 되었다. 손잡고 사진 찍고, 얼굴 맞대고 셀카 찍고, 갖은 포즈를 다 취한다. 사진을 함께 보면서 한동안 행복할 것이다. 사랑나무 밑에 혼자 선 나는 잠시 외로웠다. 그러나 내게는 가림성이라는 사랑이 있으니까 성벽과 사랑을 속삭이면 된다. 성이 옆에 있으니 그와 성생활城生活을 하면 되는 것이다.

외로움도 잠시, 남녀가 노니는 사랑나무를 스마트 폰으로 찍어 딸에게 보냈다. 제발 이렇게 사랑을 만들어 보라는 의미였는데 이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닌지라 아빠나 젊은이 감성으로 슬쩍 사랑을 만들어 보세요.” 파격적인 충고이다. 정말 그래볼까? 딸애의 말을 듣고 이 사랑나무 그림을 보면 감탄할만한 어느 여인에게 사진을 보내 보았다. 답이 없다. 5분 쯤 지나 또 열어 보니 아직 답이 없다. 여성들도 쉰 세대가 되면 감성이 무디어지나보다고 묻어 두었다. 그렇다면 내가 주책이겠지. 다시는 그런 공허한 짓을 하지 않으리. 이 나이에 젊은 날의 사랑을 추억하기만도 바쁘다.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 타령을 하는 것을 보니까 역사적인 의미만 생각하고 가림성에 왔다가 사랑나무에 취해 버렸구나.

가림성은 SBS에서 2005년에 방영했던 드라마 서동요의 촬영지였다고 한다. 드라마에서 선화공주가 서동과 평민으로서 살아갈 마음으로 움막을 친 곳이 이곳이며, 사랑나무는 선화공주와 서동이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의 배경이 되었다. 그 후 젊은이들이 여기서 고백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니, 똑똑한 젊은이들도 속설에 기대어 자신의 사랑을 확정지으려 하는가 보다. 참 복도 많은 나무라는 생각이 든다.

백제부흥군을 섬멸하려는 나당연합군은 부흥군의 주요 거점인 주류성을 치기 전에 가림성을 먼저 치기로 했다. 그런데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난공불락이라며 당의 장수 유인궤가 반대했다고 한다. 그의 주장대로 가림성을 피해 주류성을 공격하여 부흥군을 곤경에 빠뜨렸다고 한다. 성벽 높이는 불신의 정도에 비례한다. 불신이 마음의 성곽을 높이 쌓는다. 신라나 당을 믿지 못한 백제가 가림성이란 난공불락의 성곽을 쌓았듯이 세상을 불신하는 사람들이 세상과 담을 쌓고 산다. 불신의 가림성이 오늘날은 사랑을 고백하는 믿음의 성지가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가림성 사랑나무의 덕이 아닐까. 이곳에 오면 확신이 가지 않는 사랑도 서로를 받아들이게 된다니 젊은이들이 쌍쌍이 찾을만하다. 가림성 사랑나무 아래에 서면 성벽 같은 불신이 오히려 따뜻한 인간애로 승화되어 성벽을 넘어서는 견고한 마음의 성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남문지로 도로 나와 2011, 2015년에 발굴 조사한 동벽을 답사했다. 성벽이 흙무더기를 벗고 천오백년 동안 감추었던 알몸을 내 앞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랑나무보다 더 매혹적이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줄자로 성돌의 크기나 성벽의 높이를 재면서 성벽과 사랑을 나누었다. 행여 흙 한줌이라도 떨어질까, 쐐기돌 하나라도 훼손될까 나의 애무는 애면글면 조심스러웠다. 노년에 하는 익은 사랑, 참사랑은 바로 가림성 사랑이다. 그때 카톡이 왔다. “이제서 봤어요. 느티나무가 하트 모양이네요. 하트가 두 개나 있어요.” 아 숨어 있는 하트모양까지 찾았구나. 그 분의 감성을 믿었던 내가 기특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미 가림성과 오르가슴orgasme에 이르렀어요.’라는 말은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답사를 마치고 동문지로 올라와서 사랑나무를 돌아보았다.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의 처절했던 백강전투와 슬픈 부흥백제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제부터는 사랑이라고 깨우치는 건지, 늘어진 가지가 멀리 금강의 물빛을 받으며 여전히 사랑을 만들고 있었다.

(2017.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