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28. 토축산성의 전형 서천 건지산성

느림보 이방주 2017. 1. 16. 11:40

토축 산성의 전형 서천 건지산성

 


 

건지산성은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이라고 주장하는 몇 개의 산성 가운데 하나이다. 전의 운주산성, 금이성, 예산 임존성은 이미 답사를 끝냈다. 홍성의 학성산성은 아직 벼르고 있는 중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서천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한산이씨의 본향인 한산면 건지산성 부근에 있는 목은 이색 선생의 문헌서원만 돌아보고 바로 인근의 건지산성을 돌아보지 못해 안타까웠다. 나 혼자 원한다고 해서 돌아볼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성안에 있는 봉서사와 함께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을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미루지 말고 혼자 떠나는 것이다. 물 한 병 찰떡 한 덩이를 배낭에 넣고 카메라만 챙겨 가지고 바로 출발했다.

봉서사鳳棲寺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배낭을 메고 출발했다. 우선 봉서사 경내로 들어갔다. 수선화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백제 산성 안에 있는 사찰이 다 그렇듯이 극락전이 고고하다. 삼배를 드리고 나와서 건지산성을 일러주는 팻말을 찾아 비탈진 산길을 올라갔다.

건지산성은 토성이다. 이 성도 다시 쌓으려는지, 아니면 정비를 하려는지 성벽 위의 나무를 다 베었다. 중장비를 동원하여 나무를 베느라 성벽 아래 중장비의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고 토성이라 일부 훼손되기도 했다. 아름드리 참나무들을 베어낸 그루터기가 선명하다. 흙은 온전한 황토이다. 베어낸 나무도 다 치워서 주변 정리가 잘 되었다 토성은 다시 건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옛 모습이 뚜렷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성벽 위에 올라가서 성을 돌아보니 성의 윤곽이 다 보인다. 이 성은 건지산의 두 봉우리에 걸쳐서 긴 타원형으로 토축되었다. 양쪽 봉우리에 작은 테메식 산성이 있고 가운데 구릉을 잇는 산성은 자연스럽게 포곡식으로 되어 있다. 마치 두 고리를 이어 놓은 것처럼 내성은 테메식, 외성은 포곡식으로 축성되었다. 그리고 그 구릉에 한산면 호암리에서 영모리로 넘어가는 자동차 길이 나 있다. 자동차길은 2차선으로 좁은 도로이고 이 도로를 통하여 성 안에 있는 사찰인 봉서사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 길이 축성 시기부터 있던 길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이 길의 호암리 쪽에 동문이 영모리 쪽에 서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로에는 차가 심심찮게 지나다닌다. 도로 옆에는 작은 개울이 한산면 소재지 쪽으로 흘러간다.

봉서사에서 비탈길을 올라가 만난 성벽은 도로가 끊어놓은 곳에서 훨씬 정상 쪽으로 올라가 있었다. 처음부터 살펴보기 위해서 다시 서문으로 짐작되는 도로 쪽으로 내려왔다. 성위에 난 길로 내려오면서 살펴보았다. 토성이라도 지금처럼 성벽이 비스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성벽의 흙이 흘러 내려서 이렇게 비스듬한 성벽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성벽 양쪽에 기둥을 박고 널판지를 댄 다음 황토를 가운데 넣고 다졌을 것이다. 황토를 물에 이겨서 다졌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공법을 동원하여 쌓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문지는 성벽이 끊어진 부분에서 약간 어긋나 있었다. 봉서사 쪽으로 성벽이 약간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고 반대쪽은 안쪽으로 꾸부러져 있다. 이른바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치는 작은 겹성)의 모양이다. 이러한 모습은 청주시 정북동 들판 한가운데 있는 정북토성에서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길에 내려가서 성을 올려다보니 상당히 높아서 약 5~7m쯤 되어 보였다. 아마도 이곳에 문이 있었을 것이다. 문헌에서는 성의 높이가 능선 부분은 1m 정도, 서문지 부분은 3m 내외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능선 부분은 1~ 3m 정도, 서문지 부분은 5~7m 정도는 되어 보였다. 성의 너비는 아랫부분은 약 300cm, 윗부분은 150cm 정도로 짐작되었다. 성의 절개지 부분을 살펴보면 황토를 지나 색깔 고운 적토인데다가 잔돌 하나 섞이지 않은 깨끗한 흙이다.

서문지 부근에 건물이 있던 터로 보이는 평지가 있다. 평지는 봉서사 쪽으로는 계단식으로 널찍하고 아직도 뚜렷하게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였다. 건물의 모양과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성의 내부에 민가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 계단식으로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와편이나 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기에 스틱으로 파 헤쳐 보았으나 풀과 낙엽이 많아 찾을 수 없었다. 더 파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훼손의 가능성이 있어서 참았다. 이곳에서 불에 탄 곡식의 재도 발견되었다는데 그런 것을 찾지 못해 아쉽기는 하였다. 대신 서문터라고 추정되는 곳 가까이 건물지에서 기와편 몇 조각을 발견하였다. 서문지는 절개면에서 황토가 계속 허물어지고 있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안타까웠다.

다시 정상 부분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가팔랐다.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어 걷기에는 편했다. 정상에 오르니 뚜렷하지는 않지만 보루처럼 둥글게 쌓은 성의 윤곽이 보인다. 봉우리는 길쭉하게 150m 정도이고 너비는 30m 내외였다. 이곳은 한산 쪽으로 매우 경사가 매우 급해서 자연 성벽이 되었다. 그 위에 토축했는데 아직도 윤곽이 뚜렷하다. 윤곽은 뚜렷한데 나무를 베느라고 그랬는지 중장비가 오르내려 황토 성벽이 많이 훼손되었다. 1500년 이상 지탱해 온 성벽이 현대에 와서 부주의로 이렇게 훼손되는 걸 생각하면 안타깝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나 일을 하는 사람이니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거나 문화재의 가치를 소홀히 여긴 소치라 생각되었다.

정상에는 건지산정이라는 정자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정자를 건립하게 된 동기들을 적어 놓았다. ‘乾止山亭이라는 현판의 글자 중에 자가 건지산의 와 달라서 의아했다. 모든 문헌에 다 로 나오는데 정자의 현판을 로 쓴 연유가 궁금했다.

정자 아래에는 건지산성에 대한 설명을 나무판에 적어 세워 놓았다. 설명에는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저항 거점지라고 되어 있다. 임존성의 경우처럼 거점지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정확하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역사란 자기편에서 생각하면 이렇게 아주 쉽게 왜곡된다. 운주산성에 가면 최후의 거점이 바로 거기라고 한다. 내가 운주산성만 가 보았을 때는 거기가 바로 최후의 거점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역사는 해석이 중요하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미래 설계가 달라진다. 이렇게 내가 보이는 것만으로 해석하려 하면 무서운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더 많이 찾아내고 고증해야 한다. 그래서 백제사나 고구려사가 땅에 묻힌 것이 아닌가? 가야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또 안내판에는 제목은 건지산성의 안내판으로 해놓고 목은 이색의 문헌서원, 봉서사, 한산면 소재지 등에 대하여 더 많은 설명을 덧붙였다. 건지산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 전달이 아쉽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한산의 소재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아주 멀리까지 너른 들판이 다 내려다보인다. 육안으로 봐도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까지 다 보였다. 이렇게 전망이 좋으니 이곳이 훌륭한 전망대이고 보루가 되었을 것이다. 반대쪽의 건지산 정상의 성의 모습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성의 윤곽이 다 보였다.

정자에서 한산면 사무소로 가는 등산로도 있었다. 아마도 한산면 소재지에서 등산객들이 바로 이곳으로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반대쪽 산을 올라가야겠기에 올라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가기로 했다. 정상에서 동문지 쪽으로 내려갈 수도 있었으나 너무 가파르고 험해서 안전한 쪽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보니 건지산정의 건립에 대한 송덕비가 여럿 있었다. 이른바 지역 유지들의 덕을 기리는 비였다. 그러나 건지산성 정상에 이렇게 고증도 없이 시멘트 건물을 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곳에 어떤 모습의 건물이 있었을지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그런 유사한 건물이라도 지어 놓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한산면에서는 등산로 위주로 산성을 설계하는 것 같다. 등산로 안내는 여러 곳에 있는데 임존성처럼 성의 개념도는 없었다.

다시 서문지로 와서 이곳저곳을 본 다음 작은 산봉우리로 향한다. 성벽 바로 아래에 묘지가 몇 군데 있다. 이쪽은 훨씬 완만한 능선이고 성벽도 높지 않았다. 정상부에 오르니 완만한 줄 알았던 산이 갑자기 험준하고 일부 돌로 쌓아 기초를 한 위 위에 흙으로 쌓은 부분을 발견하였다.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곳에 건물지로 보이는 평평한 곳이 보였다. 이곳에서 동쪽 성 위에 길도 없는 곳을 헤치며 내려왔다. 경사가 급하고 험했지만 그냥 내려왔다. 몇 번 미끄러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은 나무들을 낫으로 제거한 곳도 있어 위험했다. 가파른 성을 내려와 작은 도랑을 건너 도로 위에 올라 봉서사 주차장으로 올라왔다.

건지산성은 두 개의 정상부에 있는 작은 테메식 내성을 고리처럼 이어 포곡식으로 쌓은 특이한 형태로 축성된 산성이다. 또한 이 산 성을 중심으로 동서로 두 개의 작은 타원형의 테메식 산성이 더 있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두 군데를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공산성에서 볼 수 있는 보조성이거나 일종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건지산성이라는 큰 산성이 본부가 되고 보조성이나 작은 보루들은 주변을 관찰하는 망대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답사한 백제의 산성들이 대개 이런 형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성과 금이성의 중간에 작성이 있고 금이성과 비암사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비암산 보루(내가 붙인 이름)가 있다. 이것을 모자축성법이라고 하는데 모성과 자성의 연결고리라고 한다. 건지산성도 모자축성법에 의한 산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

건지산성은 백제의 수도로부터 서쪽 바다와 금강의 어귀를 지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과 백제의 교역과 쟁패의 현장인 기벌포와 연계되는 백제 수호의 요지였을 것이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최후 순간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러 왔던 군사들이 기벌포에서 당군에게 전멸했다고 하니 건지산성과 더불어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백제 최후의 격전지라고는 하나 부흥군 3천 군사가 최후를 맞아 몰살당한 슬픔의 현장은 아무래도 아닌 듯하다. 성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지 않고 삼천의 군사가 굴속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데 굴이 있을 법한 곳도 없다. 주류성은 험준한 산악지대라고 하는데 이곳은 들이 넓은 평야지대이다. 또한 봉서사는 후에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절이라 하니 그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도 없다. 백제의 변방을 지키는 중요한 성이었음은 분명하다.

(2016. 4. 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