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인도 성지 순례 8일차 12월12일 아그라 → 자이푸르
네팔 인도 성지 순례 8일차 12월12일 아그라 → 자이푸르
▣ 찾아간 곳 : 아그라성, 타지마할
아그라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 아그라 행정구의 행정중심도시. 170만 정도
야무나 강변에 있다. 16세기초 시칸다르 로디가 세웠으며 무굴 제국이 다스리던 시기에 얼마 동안 무굴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18세기말 자트족·마라타족·무굴인과 괄리오르의 통치자들에게 잇달아 점령당했으며 1803년 영국에게 넘어갔다. 1833~58년에는 아그라 지방(뒤에는 북서부 지방)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아그라는 타지마할(17세기)로 매우 잘 알려져 있다.
그밖에 자한기리마할과 악바르 황제가 건설한, 흰 대리석의 진주사원(Moti Masjid)을 포함하고 있는 16세기 성채가 있다. 또한 대사원(Jami' Masjid)과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잘 알려진 훌륭한 능묘도 있다. 북서쪽으로 시칸드라에는 악바르의 무덤이 있다. 도로와 철도의 주요교차점으로 상업과 산업 중심지이다. 아그라대학교(1927)와 6개 부속대학이 있으며 교외에는 주립정신병원과 라다소아미 교파의 거주지인 다얄바그가 있다.
아그라 행정구는 거의 대부분이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서쪽 끝에 구릉지대가 있다. 야무나 강과 아그라 운하에서 물을 공급받으며 주요농작물로는 기장·보리·밀·목화가 손꼽힌다. 아그라 시에서 남서쪽 37㎞ 지점에는 폐허가 된 무굴 제국의 도시인 파테푸르시크리가 있다.
아그라성
아그라 성은 인도 아그라에 위치한 성으로 타지마할과는 야무나 강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마주보고 있다. 붉은 사암의 성채와 내부의 하얀 대리석 건물이 어우러져 웅장함과 정교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유력한 설에 따르면 16세기말 무굴 제국의 악바르 대제가 수도를 델리에서 아그라로 옮기면서 건축하기 시작해서 그의 손자인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건축하면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아그라 성은 타지마할을 축조하면서 너무 많은 재정을 낭비한 샤 자한이 말년에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도 유명한데 샤 자한은 야무나 강 너머의 타지마할이 가장 잘 보이는 무삼만 버즈(Muasamman Burj)에 갇혀 있다가 끝내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는 인도 무굴제국의 중심지였다. 16세기 일단의 몽골계통 무슬림 세력이 중앙아시아 우즈벡에서 활약하다가 인도 북부로 내려와 무굴제국을 세우고 영국의 식민지가 될 때까지 3백년간 인도 중심부를 지배했다. 무굴제국의 시조는 바부르(Babur)였는데 그의 5대 조부가 티무르였으며 외가로는 칭기즈칸의 15대 손이라고 자처했다.
1526년 바부르는 인도로 세력을 뻗쳐 인도 델리왕조를 멸망시키고 무굴제국을 세웁니다. 무굴제국은 2대 후마윤을 거쳐 13세에 즉위한 3대 악바르 황제 때 크게 확장하며 델리를 떠나 아그라를 수도로 삼았다.
무굴제국은 악바르 황제가 죽은 뒤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지면서 전성시대를 이룬다. 이 전성기를 이끌던 황제 중 대단한 건축광이었던 황제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만들었고 붉은 성으로 불리는 아그라성도 완성한다. 무굴제국은 인도 세포이 항쟁의 진압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인도는 영국 식민지로 전락한다.
아그라성은 대부분이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져 레드포트라고 부른다. 대단한 건축광으로 알려진 황제 샤 자한이 1639년부터 1648년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세운 궁궐이자 외부의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요새였다. 성벽 밖으로는 해자를 설치해 물을 채워 적의 공격을 차단했고 성의 입구도 방향이 급격히 꺽여 있는데 이는 코끼리부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성벽의 높이만 50m가 넘고 둘레가 2.5km에 달하는 성이다.
무굴제국은 무하마드 샤(1719~1748) 재위 중에 급격히 쇠퇴한다. 18세기 후반에는 델리 근처의 매우 좁은 지역만을 통치하는 명목상의 제국에 불과했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기 시작한다.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드르 샤 2세는 폭동과 반란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1857년 양곤으로 추방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한다.
무굴제국의 흥망사에 결정적인 사건이 인도 세포이의 반란이다. 영국 동인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들인 세포이가 중심이 된 거대한 반영인도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를 흔히 세포이 항쟁이라고 한다. 영국은 군인들을 동원해 세포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무굴제국도 공식적으로 멸망시켜 버린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 지배하는 방식에서 영국이 직접 지배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면서 영국군은 아그라성에 엄청난 포격을 가해 아그라성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약탈당한다. 이때 파괴된 아그라성을 지금의 모습으로 바꾼 사람이 인도의 초대 수상이었던 네루 수상이었다. 네루는 그 옛날 무굴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파괴된 아그라성을 복원하기 시작했고 1948년 아그라성의 외부는 붉은 사암으로 지어졌지만 내부의 건축물들은 타지마할처럼 대리석을 많이 이용했다. 타지마할보다 오히려 더 화려하고 정교한 대리석 장식들로 가득하다.
아그라성과 타지마할의 거리는 2km에 불과하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은 인도의 대표적 건축물 타지마할과 아그라성을 완성한 황제였다. 자항기르의 뒤를 이어 1628년 황제에 올라 데칸 지방의 왕국들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고 무굴제국의 통치력을 북서쪽으로 확장시키기도 했으나 샤자한이 병들자 4명의 아들 다라 시코, 무라드 바흐시, 샤 슈자, 아우랑제부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암투를 벌인 끝에 반란을 일으킨 막내 아우랑제부가 승리하여 1658년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황제가 된 아우랑제부는 형제들과 암투 중에 자신의 편을 들지 않은 아버지 샤 자한의 왕위를 박탈해 타지마할이 멀리 보이는 아그라성의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에 그가 죽을 때까지 감금한다. 황제 샤 자한은 사랑하는 여인 뭄타즈 마할을 잃고, 그 여인을 위해 22년동안 자신이 공들여 만든 타지마할을 멀리서 바라만보다 아그라 포트를 나오지 못하고 8년 뒤 이 곳에서 죽는다.
폐왕 샤 자한이 죽을 때까지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지내야 했던 아그라포트의 창살 사이로 안개에 덮인 자무나 강변의 타지마할이 보인다. 황제였지만 전쟁에 따라 나섰던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아들에게도 배신당해 말년을 요새에 갇혀 지내다 죽음을 맞은 샤 자한. 죽은 뒤에야 비로소 사랑하는 아내 곁에 묻힌 황제이다. 타지마할과 아그라포트에 얽힌 비극으로 결말를 본 러브 스토리이다. 네루는 아그라 성문 위에 올라 인도 독립을 선포한다.
오전 5시
기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잠도 자지 못할 Hotel Utkarsh Vilas에 도착했다.
현관에서 맞는 직원은 혼자서 가방을 현관에 옮기더니 객실까지 따라와서 팁을 요구한다. 인도에 하나 철저한 건 팁을 받는 문화이다. 샤워하고 앉아 있다가 7시에 식당에 갔다. 빵 두 쪽, 계란 하나, 과일 몇 쪽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로비에서는 와이파이가 무료라 해서 얼른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바로 평안을 전해왔다. 이쁜 며느리가 아가들 잘 노는 사진을 보냈다. 손자 손녀 사진을 보니 집 생각이 간절하다.
아내가 내 여름 잠바와 바지 한 벌을 식당에서 일하는 분에게 주자 해서 아끼는 파란 잠바와 등산용 여름 바지를 한 벌씩 주니 무척 좋아했다. 몇 번 입은 바지인데 좀 섭섭하기는 했지만 기쁘게 받아 준 것이 더 고마웠다.
8시에 아그라성으로 출발했다.
아그라성 입구에 관광객이 모여 있다. 마른 안개가 자욱하다. 높고 붉은 성벽이 안개 속에 우뚝하다. 아그라성은 붉은 사암과 붉은 대리석으로 건축했다. 성 내부로 들어가 이곳 저곳 살펴 보았다. 큰 규모와 정교한 벽면 문양이 놀랍다. 더구나 벽면을 장식한 문양은 벽돌 한장 한장에 따로 새겨 문양을 맞추어 쌓았으니 그 정교한 솜씨에 놀란다. 한국 사찰의 창호 무늬, 서까래 모양, 부연 같은 모양을 만들었는데 그 자재가 돌이라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솜씨이다.
가장 높은 곳에는 흰색 대리석으로 지은 방도 있다. 기둥에 풀꽃 무늬를 새겨넣었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하얀 대리석에 풀꽃을 새기고 그 자리에 다른 물질은 박아 넣었다. 가이드는 박아 넣은 물질이 자개라고 하는데 돌인 것 같기도 하고 돌가루 같기도 했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청자에 학을 새겨 넣은 것과 같은 상감법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개는 나전칠기라고 하는데 결국 상감법의 발전적 응용이었다. 그렇다면 인도의 아그라에서 고려청자에 쓰인 상감기법을 배워다가 쓴 것이 아닐까?
전체가 대부분 붉은색이고 정원에 파란 잔디가 있어 잘 조화되었다. 또 이렇게 큰 건물을 지으면서 부분적으로 정교한 무늬를 새겨 미적 조화를 이룬 것이 놀랍다. 사 자한은 말년에 자식에게 잡혀 이 성에서 연금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내의 무덤인 강 건너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한으로 생을 마감한 권력의 최후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가 보다.
아그라성의 외부에서
외부에서 본 아그라성
입장을 기다리는 중
성 앞에서
성의 내부로 들어가며
성문
내부와 잔디밭과 붉은색 건물이 잘 어울린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
돌을 새겨서 이와 같은 무늬를 만들었다
정교한 규칙적인 무늬
붉은 사암을 나무를 깎듯이 깎아서 썼다.
마치 나무를 나루듯, 찰흙 반죽을 다듬어 빚어내 듯
이렇게 아름답고 정교한 문양을 연속하여 규칙적으로 배열했다.
돌을 깎아 만든 문양
붉은 사암만 가지고 쌓고 붙여서 나무로 석가래를 올리듯 했다.
아그라성의 위용-높이 50m 아래에 해자가 보인다,
내부의 흰 대리석으로 지었다
종이에 인쇄하여 도배한 것처럼 하얀 대리석을 새겨 쌓았다
바닥과 벽이 정교한 무늬를 넣었고 넣지 않은 곳은 대리석 자체의 무늬를 살렸다
기둥과 석가래 사이의 상감법에 의한 문양-흰대리석에 꽃을 새기고 다른 색 돌 가루를 채워 넣었다
대리석을 깎아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벽, 기둥의 꽃 무늬
타지마할
무굴 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인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이 영묘는 뭄타즈 마할('선택받은 궁전'이라는 뜻)이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이 전와되어 타지 마할이라고 한다.
아르주만드 바누 베감은 1612년에 황제와 결혼한 뒤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반려자로 지냈으나 1631년 부란푸르라는 도시에서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타지 마할은 인도,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등지에서 온 건축가들의 공동 설계에 따라 1632년경에 착공되었다. 매일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1643년경에 영묘가 완공되었고, 1649년경에는 모스크·성벽·통로 등 부속건물이 완공되었다. 타지 마할 전체가 완공되기까지는 22년의 세월과 4,000만 루피의 비용이 들었다.
이 복합 건물은 너비 580m, 길이 350m인 직4각형으로, 남북으로 늘어서 있다. 이 중앙에는 한 변이 305m인 정4각형 정원이 있고, 그 북쪽과 남쪽에 그보다 약간 작은 2개의 직4각형 구역이 있다. 남쪽 구역은 타지 마할로 들어가는 사암 출입구와 거기에 딸린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 구역은 야무나 강가까지 뻗어 있고 거기에 영묘가 있다. 영묘의 동서 양쪽에는 완전 대칭을 이루는 2개의 건물이 붙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모스크이며 동쪽의 것은 미학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운 이른바 '자와브'이다.
모퉁이에 8각형 탑이 솟아 있는 높은 벽이 북쪽 구역과 중정을 둘러싸고 있으며, 남쪽 울타리 밖에는 마구간과 경비병 숙소가 있다. 무굴 제국의 건축 관행은 나중에 증축하거나 개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서 타지 마할을 구상하고 설계했다. 이 복합체의 북쪽 끝에는 영묘·모스크·자와브 등의 가장 중요한 건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 붉은 시크리 사암으로 지은 모스크와 자와브에는 대리석을 두른 돔과 아키트레이브(평방)가 있으며 일부 표면이 단단한 돌(pietra dura)로 장식되어 있어, 순수한 하얀색 마크라나 대리석으로 지은 영묘와는 색깔과 감촉에서 대조를 이룬다(→ 피에트라두라).
영묘는 높이 7m의 대리석 대좌 위에 지어졌으며 사방이 똑같은 모습으로, 모서리는 정교하게 깎여 있고 각 면마다 높이 33m로 우뚝 솟은 거대한 아치가 있다. 높은 원통형 벽(drum)으로 떠받친 양파 모양의 2중 돔이 이 건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영묘의 각 아치 위에 있는 난간과 각 모서리 위에 있는 장식 뾰족탑 및 돔을 덮은 원통형 정자는 영묘의 스카이라인에 율동감을 준다. 대좌의 각 모서리에는 3층 미나레트가 서 있는데, 대좌와의 대리석 접합부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영묘의 대리석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영묘의 내부는 8각형 방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얕은 부조 무늬와 아름다운 돌로 장식된 이 묘실에는 황제 부부의 기념비가 있다.
이 대리석 무덤은 아름다운 돌로 장식되어 있으며, 여기저기에 보석을 박은 투각한 대리석 막이 둘러처져 있다. 정원과 같은 높이에 있는 지하 납골당에는 진짜 석관이 있다. 타지 마할은 무굴 제국 최고의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의 하나로 여겨진다.
안개가 이직 걷히지 않은 아그라성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타지마할로 향했다. 사람들은 여행의 여러가지 어려움을 마다않고 인도에 오는 이유를 타지마할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타지마할은 아름다운 건축물이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지만 따지고 보면 한 왕비의 무덤이다.
타지마할에 도착했다. 상당히 너른 공간에 붉은색 대리석과 사암으로 담장과 부속 건물을 배치했다. 대문에서 본채는 보이지도 않는다. 문을 들어가 정원을 조금 걷다가 마지막 성문 안으로 들어시니 안개 속에서 하얀 건물이 보였다. 수많은 인파가 정원에 가득하다. 중앙에 이슬람식 돔이 있고 네 개의 촛대석이라 해야 할지 탑이라 해야할지 대칭으로 세워 안정감이 있어 보였다. 또 좌우로 대칭시 되게 붉은색 부속건물을 배치했다. 정원 한가운데 작은 분수와 수조가 있어 오행과 오색을 다 갖추었다.
가까이 가서 건물에 들어갔다. 중앙 돔 바로 아래 두개의 하얀 대리석 관이 있다. 사자한과 왕비의 관이다. 유골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본래의 무덤은 더 아래에 있다. 밖에 나와 가만히 돌아보니 별수 없이 우리나라 민간의 작은 무덤과 다를 바가 없다. 중앙에 돔은 봉분이고, 밖에 서 있는 네 개의 기둥은 촛대석이다. 돔 아래 관을 놓은 것은 봉분 아래 광중이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광중은 자궁이고 촛대석은 남근이다. 영원한 생성을 가져오는 풍수의 진수이다. 나 혼자 장난처럼 견주어 보았지만 참말로 기막힌 생각이다.
이 타지마할을 짓기 위해 수년간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고 희생되었다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아름다운 묘지에 묻힌 사람은 과연 영생했을까? 오늘까지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려오는 것을 보면 영생이라 할만하다. 현대에 들어와 이로 인해 아그라시에서 많은 관광 수입이 생긴다면 그도 또한 영생일지 모른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무덤이다 불기사의한 건축물들은 대개 무덤이다. 그로 보면 권력을 가진 이들은 내세까지 가더라도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그로보면 죽어 해장한 신라 문무왕은 영웅 중에 영웅이다. 돌아나오는 길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그래도 대리석으로 치장한 하얀 건물이 아름다워 보인다.
안개 속에 하얀 건물이 신비롭다.
어떤 노인이 카메라를 뺏어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했는데 1달러를 요구한다.
백만사 여인들
가까이에서
바닥 보도블럭
옆면
부속건물
좌우에 부속 건물을 대칭으로 똑 같이 지었다.
바닥의 붉은 사암과 하얀 대리석 건물의 조화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백만사 여인들
11시에 모여 호텔로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12시 30분 자이푸르로 출발했다. 6시간 걸린다고 한다.
3시간 터덜거리는 일반도로를 달려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종앙분리대가 있는 왕복 4차선이다.. 가운데 중앙분리대에는 꽃도 심고 나무도 심었다. 그런데 도로 아닌 곳에서 얼마든지 진입할 수 있다. 국립하이웨이라 했는데 오토바이, 툭툭이가 다닌다. 가끔 소 한두 마리가 유유히 길을 건너면 급정거를 한다. 추돌 위험은 상존한다 . 게다가 평탄하지 않은 노면을 고속으로 달리니 버스가 요동을 친다. 참 웃기는 고속도로이다. 그런 고속도로를 닽리고 있다. 길은 커브 한번 없이 곧다. 흔들림도 덜하다. 도로 양쪽에 유채꽃이 노랗다. 유채밭은 끝이 없고 노랑색으로 지평선에 노을이 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달린 인도의 도로 중에 가장 아름답다.
호텔 peppermint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가 다 되어서이다. 오늘 여정에 들어있는 선택관광 아바네리 계단식 우물에 들러 일정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너무 늦었다. 그래서 되돌아 오느라 시간을 3시간 정도 허비했다. 그 바람에 더 늦어지고 기사와 가이드 사이에 갈등이 있었나 보다. 그러면 그 여정을 제외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을 모양이다. 왜냐하면 1인당 30불인 선택관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가로 지불하여 가기로 한 곳이다.
기사가 길을 모르는 건지 가이드가 일정을 왔다갔다 하는 건지 차가 많이 밀리는 도심에서 화난 사람처럼 차를 마구 몰아 댔는데도 늦게 들어 왔다.
간단히 저녁 먹고 객실에 들어 오니 오랜 버스 여행에 피로가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