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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인도 성지 순례 7일차 12월11일 카주라호 → 아그라

느림보 이방주 2016. 12. 12. 11:00

네팔 인도 성지 순례 7일차 12월11일 카주라호 → 아그라

 

▣ 찾아간 곳 : 카주라호 사원군, 잔시에서 기차를 타고 아그라


 


카주라호

분델칸드 지역에 왕국을 세운 칸델라라지푸트족의 왕들이 시바신과 비슈누 신, 자이나교의 대사제들에게 봉헌한 85개의 유명한 카주라호 사원들 가운데 지금까지 20개가 남아 있다. 이 사원들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암으로 지어졌으며, 건축 연대는 950~1050년경으로 추정된다. 사원들의 내부와 외부를 장식한 훌륭한 조각들은 모두 성적인 내용을 주제로 다루었다. 이들 가운데 돌출 현관과 작은 탑들이 모여 35m 높이의 뾰족탑을 이루고 있는 캉다리아마하데바(1000년) 시바신전이 가장 유명하다. 카주라호는 오늘날의 분델칸드 지역에 있었던 제자카북티 왕국의 수도였으며, 따라서 이곳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귀중한 역사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카주라호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카주르(대추야자)에서 유래되었다.

 

카주라호 기념물군

카주라호는 인도의 중북부 마디아 프라데시(Madhya Pradesh)주에 있는 도시로 이 도시와 인근에 있는 약 20여 곳의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들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원들은 나가라(Nagara) 건축 양식과 에로틱한 조각 작품들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사원들은 찬델라 왕조 시기인 950년에서 1050년 사이에 지어졌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는 12세기까지 약 85개의 사원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사원은 20여곳 뿐이다.

 

대부분의 사원은 야소바르만(Yashovarman)왕과 당가(Dhanga)왕의 제위 기간에 건축되었는데 야소바르만 시기에 지어진 가장 뛰어난 사원은 락시마나(Lakshmana) 사원이며 당가 왕 시기의 최고의 사원은 비스바나타(Vishvanatha) 사원이다. 오늘날 가장 유명하며 규모가 큰 사원은 간다(Ganda)왕 시기에 지어진 칸다리야 마하데바(Kandariya Mahadeva) 사원이다. 당가데바(Dhangadeva)왕이 1030년에 건축한 이 사원의 전체적인 모습은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인 카일라스(Kailash)산을 묘사한 것으로 중앙탑인 시키라의 높이가 약 31미터에 이르며 84개의 작은 첨탑들이 시키라를 둘러싸고 있다. 사원 내부에는 시바를 표현한 대리석상이 세워져 있다.

 

대부분의 사원들은 힌두교의 상징인 원형 또는 사각의 만다라를 설계 원칙으로 삼아 건축되었으며 풍부하고 정교한 조각 예술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성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조각품들이 전체의 약 10퍼센트를 차지하는데 이 같은 조각품들은 외설적인 의미 보다는 힌두교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세기에 찬델라 왕조가 쇠퇴하면서 이곳의 사원들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는데, 이후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슬람의 공격을 피해 보존될 수 있었다. 19세기에 영국인들이 이곳의 사원들을 발굴하기 시작하였으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재건 작업이 이루어졌다. 사원들 근처에는 라니 두르가바띠 박물관(Rani Durgavati-Museum)이라고 하는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서는 파괴된 사원들의 터에서 발굴된 아름다운 조각 작품들과 종교 예술품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다.

 

카주라호 미투나상

카주라호(khajuraho)는 호수가 많은 지역으로 옛날 10c 경 찬드라 왕조 시대에 형성된 사원이 85개나 되었으나 지금은 22개가 남아 있으며 사원에 조각된 미투나상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훌륭한 미술품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인구가 적은 조용한 도시답게 아침 햇살만이 화려하게 빗살을 긋듯 시골 정취를 마음껏 쏟아내고 있었다.

 

동쪽 사원 군에 있는 자이나교 사원인 파스바나타(Parsvanathna) 사원.

자이나교란 정통 베다(힌두교) 의례에 반대해 살생하지 않고 인간 본성을 완전하게 하려 하는 종교로서 실질적 창시자는 마하비라이고 불교와 비슷하며 마하비라는 싯딸타와 동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 파스바나타사원은 하나하나 따로 길게 조각된 바위를 세로로 이어 짜 맞춘 특이한 사원으로 옮길 수도 있다 한다.

그리고 이곳의 미투나 조각들은 서쪽 사원 군에 있는 남녀교합상과는 달리 비슈누와 그의 부인인 락슈미를 조각하여 놓은 것이 많은데 관능미가 넘쳐나는 훌륭한 조각들로 이루어졌고 또한 사원 내부에도 전부 조각상으로 채워놓은 특이한 사원이다. 동적이면서 영감 넘치는 조형미가 장엄하고 정교하고 찬란하다 못해 눈이 부시니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중압감까지 느낀다.

 

다시 서쪽 사원 군. 그곳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라는 표시가 있고 먼저 비스바나타(Visvanatha)사원. 이곳은 시바신전으로 앞에 황소신이 있다. 이 황소는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난디라는 신이다. 신전 벽에는 84종의 교합하는 모습을 조각하여 놓았는데 이는 4c 바투야야나에 의해 쓰여진 카마슈트라를 조각하여 놓은 것이라 한다.

카마슈트라는 고대 인도의 성애(性愛)에 관한 종합적인 내용을 적은 책을 말한다. 이들은 1000여 년 전에 무엇 때문에 카마슈트라를 신전 벽에 조각하여 놓았는가? 남녀가 교합하는 신성한 행위로 신에게 가까이 가려 하였을까? 섹스를 통해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까? 일설에는 탄트리즘 때문이라는데 탄트리즘은 음과 양, 남과 여, 정신과 육체, 절대자와 피조물의 완전한 합일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성적결합은 해탈로 이르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갖가지 체위로 얽힌 남녀를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까지 있는 것도 그것이 하나의 의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 인도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는 온갖 세속적 생각들을 외부로 표현해 냄으로써, 오히려 그 사원 내부는 사념 없는 "절대 집중"의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고 하면서, 성적 표현은 거꾸로 성적 사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라고 하기도 했다. 어쨌든 정설은 없다. 이 모든 조각품들이 찬드라 왕조시대 미투나 미술을 찬란하게 꽃피게 하여 지금은 비싼 몸값(입장료)을 받으며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마투나상에 대한 다른 견해

인도여정에서 빠지지 않는 또 한곳은 미투나상(카마수트라)으로 유명한 카주라호 서쪽 사원군이다.

카마수트라는 4세기경에 쓰였다고 하는데 미투나상은 그것을 근거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여성들은 조각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만면에 교태와 애교를 머금고 있었다. 각가지 체위와 다양한 표정들 심지어는 수간(獸姦)하는 남성의 모습을 조각해 놓은 것도 보인다. 정교한 조각들은 대담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방중술을 그대로 표현해 놓았다.

성적인 에너지를 이용하여 남녀가 결합하고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그 절정의 상태에서 자아의식과 우주의식이 하나 되고 절대와 상대가 하나 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일종의 수행방법이다라고 한 이지상님의 설명이 좀 더 설득력이 있었다.

어디까지가 욕망이고 어디까지가 수행인가, 유교문화권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원외벽에 조각으로 표현을 해 놓은 인도사람들의 다양한 표현방식은 참으로 아리송하기만 하다.

간디는 이것을 매우 싫어해서 부숴버리고 싶어 했는데 그런 간디도 실은 30년 동안 편지로만 사랑을 주고받은 여인이 있다한다. 인도의 영적실천가요 지도자인 간디에게 30년간이나 편지로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니, 간디의 사랑, 니체와 릴케 그리고 루 살로메의 사랑, 남편을 두고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릴케의 연인으로 살았던 루 살로메, 그러나 루살로메의 임종을 지킨 것은 평생을 기다린 그녀의 남편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호텔 앞 마당을 서성였다. 하늘이 맑고 공기가 깨끗하다. 정원을 아주 잘 꾸며 놓았다. 산책하기 좋다. 꽃도 아름답고 모든게 균형감 있고 조화롭게 꾸며져 있다. 여기서 유럽의 연세 지긋한 부인을 만났다. 사진 촬영을 부탁했더니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우리 내외를 웃게 하면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참 멋있은 부인이었다.


호텔 앞에서 어느 연세 든 유럽 아줌마가 찍어준 사진




10시 30분 카마수트라 사원에 갔다.

시바신이 힌두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이라면 브라만 계급이 섬기는 힌두교 최고신인 비슈누신을 모신 신전이다. 여기도 다른 신전과 별다른 점은 없었다. 외벽의 부조물이나 장식. 전체 탑신의 형체가 비슷하다. 다만 내부의 신은 달랐다.


시바신을 섬기는 비스바타나사원에는 남녀 교합상 84종이 사원에 부조되어 있다. 카마슈트라는 4세기에 쓰인 성애의 종합적인 책이라는데 11세기에 이르러 그것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여기에 조각했다고 한다. 11세기 경이라면 우리 고려시대의 사원인데 당시에 우리에게 인도는 성스러운 불교국가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긴 인도를 불교 생성국으로 선망한 것이지 힌두의 나라로 선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불교국가였던 고려가 말엽으로 접어 들면서 성이 상당히 개방된 것으로 알고 있다. 고려의 민요 쌍화점이나 만전춘을 보면 성에 대한 완전 개방된 인식이 개방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도 처용가를 보면 이미 성의 개방을 짐작할 수 있다. 남녀 교합의 체위를 84종이나 개발해낸 찬드라 왕조가 놀랍기도 하다.


부조상들은 기도하는 모습도 있고 전쟁에 참여하는 모습도 있다. 관람객인지 참배객인지 대부분 사람들은 성애를 표현한 조각품에 관심이 있다. 키스하는 모습, 성교하는 모습, 세 사람 이상 집단으로 하는 모습, 둘이 하는데 옆에서 부축하며 도와주는 모습, 말 같은 짐승과 수간하는 모습 등 다양하고 체위도 다양하다.

성애의 표현은 힌두교에서 성에 의한 합일이 최후의 해탈이라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성행위를 통해서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될 때 완전한 합일이 이루어져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성교에 의한 합일이 해탈의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성 행위 자체를 매우 신성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고 남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신앙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이러한 성애의 표현은 내면의 부정한 생각을 밖으로 다 내보내고 내면 정화를 이루는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말은 성 행위를 부정한 것으로 보고 그러한 부정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밖으로 방출하고 정화된 마음을 갖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원의 외벽에 새겨놓은 정교한 부조물들을 매우 아름답게 표현한 것을 보면 성을 결코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적나라한 성행위 자체가 신앙심을 두텁게 하는 한 과정으로 보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다만 궁금한 것은 수간하는 모습이다. 힌두교에서도 그렇지만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존귀한 것으로 생각하는 수평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실제로 수간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한 부조물을 통해서 자이나교도들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사원의 외벽 조각은 모두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 중에 중요한 것이 바로 성이다. 성적 순결은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윤리의식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것은 21세기에도 여전하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성적으로 문란하면 바로 윤리적지탄을 면치 못한다. 역사를 놓고 더듬어 보아도 인간의 철학적 사고가 생긴 이래로 남녀간의 성적 윤리를 중요시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아주 넓게 생각해 보면 이것이 과연 합당한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오히려 본능에 충실한 것이 현명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유교윤리에 투철한 가정에서 성의 도덕성이 피가 되고 살이 되게 살아 왔지만 본능의 유혹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유교에서는 생각은 있어도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죄로 보지 않는다. 물론 공자는 도덕에 어긋나는 일은 생각조차도 나지 않았다고 자신의 경우를 말하면서 성인에 경지에 이르렀음을 자랑했지만 그건 평범한 인간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독교에서는 간음할 생각을 가졌으면 이미 간음이라고 규정했다. 불교에서는 불사음不邪淫으로 사사스러운 음행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힌두교나 자이나교에서는 본능에 충실한 것이 바로 해탈의 지름길이라 생각한 것은 탄트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불사음이라든지, 생각만 해도 간음이라든지, 유교 윤리라든지 하는 규범을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는 하나의 폭력으로 규정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소설적 규정에 모두 관심을 보이면서 막상 자신으로 돌아오면 윤리적 판단을 내리고 만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는 열세살 소녀가 약혼을 하고 약혼자 도령이 불행하게 되면 그 집에 가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최상의 윤리로 여겼다. 그러나 요즘 그것을 요구하는 제도는 없다. 힌두교에서도 그러한 일을 개혁하고자 간디가 무진 애를 썻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의 사상도 윤리의식도 바뀌게 마련이다. 성에 대한 윤리의식도 언젠가는 자유롭게 바뀌게 도리 것이라고 본다.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성의 자유가 조선시대 유교가 들어오면서 철통같은 규범으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이면에 사설시조 같은 것을 보면 적나라한 성의 해방은 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다. 카주라호의 모든 사원에 새겨진 남녀 교합상을 이러한 미래를 예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원 안에는 시바신, 바슈누신을 모셨고 신전 앞에 기도대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단단한 사암으로 만들었다. 안에도 성애의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외벽처럼 다양하지는 않았다. 외벽 부조들 중에 신을 조각한 것은 감실을 따로 만들어 모신 것으로 보인다. 가끔 감실의 작품이 훼손 되었거나 아예 없어진 것도 있었다.

 

신전 내에 제복을 입은 관리인이 있었다. 사진을 짝어준다기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찍었다. 그런데 일행 중 다른 분에게는 팁을 요구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이와 같이 팁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화장지를 집어주고 팁을 요구한다. 사원에 들어 가는데 벗어놓은 신발을 봐줬다고 팁을 요구한다.

 

비스바나타(Vishvanatha)사원

사원 앞에서

서부의 사원군


알아 두면 유용한 힌두 사원 기본 용어

사원 기본 용어


외부

또라나(Torana) : 정교하게 만들어진 사원의 출입문
아디스타나(Adisthana) : 사원이 있는 높은 단지
우루스링가(Urusringas) : 사원의 건물 위에 세운 낮은 탑
씨카라(Sikhara) : 북인도 힌두 사원의 첨탑
아말라카(Amalaka) : 씨카라 꼭대기에 있는 둥근 지붕

내부

아르다 만다파(Ardha Mandapa) : 현관 입구
만다파(Mandapa) : 기둥으로 둘러싸인 누각
마하 만다파(Maha Mandapa) : 본관 복도로 주변에 기둥이 있음
안따랄라(Antarala) : 성소의 출입문
가르바그리하(Garba griha) : 신을 모시는 지성소
쁘라닥시나(Pradakshina) : 폐쇄형 복도로 안쪽 성소 주변에 있음
* 만다파와 쁘라닥시나 없이 아르다 만다파, 마하 만다파, 가르바그리하만으로 구성된 곳도 있다.

조각

미투나(Mithuna) : 카주라호에서 가장 유명한 관능적인 조각상
압사라(Apsara) : 춤사위를 펼치는 여자 요정
쌀라반지까(Salabhanjika) : 사원 내부를 지탱하는 여성과 나무의 형상
쑤라쑨다리(Surasundari) : 압사라가 춤을 추는 모습으로 꽃, 거울 등의 제물로 신과 여신을 섬기는 요정
나이까(Nayika) : 인간
싸르둘라(Sardula) : 반은 사자, 나머지는 사람이나 다른 동물의 모습을 한 조각상


서부 사원군 비슈바타나

시슈바타나사원을 배경으로

사원 외벽의 조각품

사원 외벽 조각상

사원 외벽 조각상

에로틱한 조각상들


11시 동부사원군으로 출발했다.

중심은 파스바나타 사원이다. 자이나교 사원은 무너져 복원중이었다. 불상처럼 보이지만 승려상이라고 한다. 자이나교의 창시자 마하비라는 석가모니와 비슷한 시기에 힌두교를 바탕으로 창시했다고 한다. 불상 모습은 창시한 승려의 모습이다. 가이드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자이나교를 모방하여 불교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왜곡된 설명이다. 본인이 힌두인이라 힌두교에 반발하여 만민 평등과 자비를 내세우면서 힌두에 반발한 불교에대한 반감의 표현이란 생각이들었다. 성에 관한 부조물은 비슷했지만 좀더 품위 있어 보였고 기교가 넘쳤다

 전체가 자이나교 사원 위주로 되어 있다. 자이나교 사원인 파스바나타사원에는 미투나 상이 있다. 여기에는 미투나를 새겨 놓았다. 비슈누신과 그의 부인의 관능미 넘치는 조각상을 새겨 놓았다. 이곳에서 신전에 헌금을 놓고 참배하기를 강하게 권하였지만 하지 않았다. 나신으로 앉아 있거나 성기를 다 드러낸 승려에게 예를 표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남녀 성합을 신성시하는 것은 4세기 탄트리즘에서 나왔다고 한다. 탄트리즘 음양, 남녀, 절대자와 피조물이 완전한 합일을 이루려면 성적 결합으로 해탈의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고 한다.

 

동부의 사원

사원외벽조각상

조각상이 매우 정교하다

매혹적인 여성상

아름다운 사원

외벽 조각상




자이나교의 승려상


12시 15분 호텔 식당에서 점심 먹고 출발한다.

점심은 그냥 일반적인 호텔식이다. 잔시에 가서 특급열차를 갈아 타고 아그라로 간다. 오늘은 또 얼마나 차를 타야 하는가? 차는 심하게 흔들린다. 기차역을 가는데 6시간을 간다니 잘 이해되지 않는다.  가는 중에 보니 나즈막한 산 정상 부분에도 옛 사원의 흔적이 보였다. 그냥 방치된 것 같았다. 넓은 들에 싹이 터서 자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도가 보리도 많이 생산한다는데 아마도 보리일 것이다.

 

오후 3시에 꼭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생긴 곳을 지났는데 차가 멈추더니 가지 않는다. 조수가 한 200m 쯤 떨어진 사무실로 서류를 깆고 간다. 한 20분 쯤 지나도 오지 않자 기사가 갔다. 무슨 중요한 일인가 했더니 면허증을 체크한다고 한다. 아무리 인도라도 한심하다. 주에서 주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면허증을 체크하고 길세를 내야 한다고 한다. 일종의 통과세인가 본데 그런 것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길세는 반드시 현금으로만 받는다 하니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5시40분 잔시에 도착했다.

저녁식사는 어느 호텔 식당에서 했다. 식당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아그라행 특급 열차는 6시 40분 차인데 10시에 온다고 한다. 특급열차인데 307km를 2시간에 간다고 한다. 그래도 12시에 호텔에 들어 가게 될 것이다. 그나마 그렇게 들어가면 다행이고 가봐야 안다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혹 기찻길에도 소가 있으면 멈추게 될지도 모르니 기차는 연착할 수박에 없는 일이다.

 

잔시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대합실에 승객들이 빼곡하다. 앉을 자리가 없어 플랫홈으로 나갔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이런 것인가? 누워 있는 사람, 물건을 파는 사람, 개, 소 , 물건 파는 사람이 지르는 소리, 지린내 이루 말할 수 없다. 심지어 기차가 들어오는데 소가 철로를 서성인다. 기차가 그 자리에 선다. 그래도 12억 거대한 인도는 싸우지 않고 서울을 불 바다로 만들겠다는 말도 없이 돌아간다. 소가 자리를 뜨면 기차가 들어오면 된다.

 

기차는 10시가 훨씬 넘어서 들어 왔다. 조금전에 들어온 완행 열차처럼 아비규환이 될까 걱정했는데 그보다는 덜했다. 특급열차 이므로 좌석은 이미 정해졌다. 그런데 서로 들어가려 밀고 당기고 난리도 아니다. 짐을 실어 주는 이들이 짐을 실어 주고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휴우 편안하다. 낯선 이역에서 기차가 편안해졌다. 이제 1시 쯤이면 아그라에 도착한다.

 

기차에서 정해진 자리에 앉았다. 조금있으니 빼빼로 2개와 토마토 쥬스를 준다. 먹었다. 잠시 후에 기내식처럼 식사가 나왔으나 먹지 않았다. 잔시에서 기다린 기차가 3시간 이상 연착하더니 1시면 아그라에 도착한다더니 새벽 5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카주라호를 떠나 아그라에 몇 시간 만에 도착했는지 계산조차 하기 싫다. 더 놀라운 것은 인도 시민의 태도이다. 300km 남짓 되는 거리에 특급열차가 6시간도 더 걸려 들어 왔는데 내리는 사람이나 아그라에서 기다리던 사람이나 그냥 당연하다는 표정들이다. 이직도 알껍질 속에 들어 있는 건지 우리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살고 있는 건지 가늠할 길이 없다.


잔시로 가는 길에 들의 모습

잔시에 나 붙은 선거벽보인가

잔시 역의 모습

기차가 들어오는데 개도 있고 소도 있다.

우리 짐을 실어 놓고 하염없이 기다림

철로 위를 유유히 걷고 있는 소

완행 열차가 들어오자 달려드는 승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