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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동유럽/발칸 여행 제 3일(비엔나→부다페스트)

느림보 이방주 2016. 11. 2. 22:34

두바이 동유럽/발칸 여행 제 3일(10월 15일 비엔나→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공화국(Republic of Austria)으로, 국명인 오스트리아는 10세기 중엽 동방의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여 설치된 오스트마르크(Ostmark:동쪽의 변경)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지역은 중세시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지였다. 면적은 8만 3871㎢, 인구는 866만 5550명(2015년 현재), 수도는 빈(Wien)이다.  주민의 91.1%가 오스트리아인이며,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인 등이 3%이다. 공용어는 독일어이며, 종교는 73.6%가 가톨릭교, 4.7%가 개신교를 믿는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경제부흥이 늦어졌으나 1949년부터 시작된 마샬플랜을 바탕으로 1951년 이후 연평균 6%의 경제성장을 하여 선진국으로 진입하였다. 문화와 교육면에서는 독일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등 사회보장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2015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3,792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7230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연방공화제의 의원내각제로, 임기 6년의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이다. 의회는 양원제로 임기 5∼6년의 상원(62석)과 임기 4년의 하원(183석)으로 구성된다. 주요 정당은 국민당, 사민당, 자유당, 녹색당 등이다.


오스트리아의 간략한 역사를 보면 1806년 1558년 수립된 신성로마제국이 와해되면서 오스트리아제국이 성립되었으며, 1918년 제정(帝政)의 폐지로 공화국이 되었다. 1919년 빈조약으로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가 이 나라에서 독립되면서 현재의 국경선이 결정되어 게르만민족만의 국가가 되었다. 1920년 헌법을 제정하였고, 1955년 10월 개정한 바 있다. 1939년 독일과 통합되었으나,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고, 1955년 영세중립선언으로 독립하였다.

우리나라와는 1963년 5월 22일 외교관계를 맺고 상주공관을 설치한 후 2008년 현재도 존속되고 있다. 양국은 1970년 8월 사증면제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71년 10월 무역 협정, 1979년 5월 항공 협정, 1985년 10월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1년 3월에 투자보장 협정, 1996년 3월 항공 협정 개정, 2007년 9월 과학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우리나라의 대 오스트리아 수출액은 2015년 현재 8억 8200만 달러로 주종목은 반도체, 휴대전화, 승용차 등이고, 수입액은 11억 7500만 달러로 주종목은 반도체, 자동차부품, 재생섬유 등이다. 2015년 현재 KOTRA를 비롯하여 LG전자, 삼성전자, 삼성반도체 등의 업체가 진출해 있고, 2,473명의 재외국민이 있다.


비엔나


비엔나는 오스트리아 북동쪽 도나우 강 연안에 있으며  인구는 180만 정도이다. 오스트리아 의 수도이며 유럽 고급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의 모든 고급문화는 빈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러므로 당시의 상공인들의 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도나우 강을 따라 자리잡고 있으며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의 관문 역할을 한다. 1558~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 중심지였고, 그후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였다. 품위있고 거대한 문화적 위업을 이룬 도시로서 건축과 음악으로 유명하다. 빈은 판노니아 분지가 서쪽의 알프스 고산지역을 향해 높아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도나우 강과 접하고 있다. 시내에서 가장 높은 지역은 빈 삼림지대인데 이곳은 대체로 반원형인 4개의 계단식 대지를 이루면서 도나우 강을 향해 가파르게 낮아진다. 전형적인 중부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1월평균기온은 0.5이고 7월평균기온은 19.5이다. 연간강우량은 660정도이다. 경제기반은 무역업과 공업이며, 주요공산품으로는 전기기구·종이·의류·공작기계가 있다. 시 정부는 많은 사업체를 경영하는 등 경제에서 큰 역할을 한다.

 

문화

빈의 화려한 역사를 보여주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곳의 유명한 건물들 중의 하나인 성 스테파누스 성당은 12세기 중엽에 세워졌다가 화재로 손실되어 200년 후 재건되었다. 다른 중요한 중세기 건물로는 13세기말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의 성인 호프부르크, 14세기 미노리텐키르헤 교회, 마리아암게슈타데 교회가 있다. 17세기말이 되면서 플라구에콜룸 같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빈 지역에서 바로크 양식은 70년 이상 유행했으나 마침내는 링 건축양식에 대체되었다. 링 양식의 건축물들은 링슈트라세를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으며, 그중에는 신()프랑스르네상스풍의 국립 오페라관, ()고딕식의 포티페 교회, 신이탈리아르네상스풍의 빈대학교, 신플랑드르고딕식의 라트하우스(시청) 등이 있다.

빈은 건축뿐만 아니라 음악에서도 수세기 동안 세계적 중심지였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요하네스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 많은 서양 음악가들이 이곳을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티롤 민속춤에서 파생된 왈츠는 1820년에 이곳에서 확립되었으며, 그 직후에 위대한 빈 오페레타 시대가 개막되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뛰어난 교향악단 중의 하나인 빈 관현악단(비엔나 필하모닉)의 본거지이다.

빈에는 30개 이상의 박물관이 있다. 호프부르크 성의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이 시의 가장 돋보이는 소장품 중의 하나는 합스부르크가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의 왕관이다. 이 성에는 또한 세계 최대 규모의 그래픽 아트 수집품이 있는데, 100만 점 이상되는 이 수집품에는 렘브란트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미술사박물관에는 합스부르크가에서 수집한 옛 명작들이 소장되어 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옛 집들은 현재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지하철이 빈 도심부를 일주하며 교외로 뻗어 있다. 철도가 북··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주요 간선도로들이 방사형으로 사방에 퍼져나간다. 빈 국제공항은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18km 떨어진 슈베하트에 있다.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인데 철기문화시대에는 빈도보나라고 불린 켈트족의 요새도시가 되었다. 로마인이 BC 1세기에 이 켈트족의 영토를 합병했을 때에도 지명은 그대로였으며 성채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로마의 보호 아래 일반시민의 거주가 촉진되어 3세기경에는 인구 2만을 헤아리는 자치도시가 되었다. 성채와 마을은 5세기의 민족이동에 의해 소란기에 소멸했지만 그 일부가 남아 중세도시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 기초에 의해 오늘날 빈의 중심부가 결정되었다.

시는 881년의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데 그때의 이름은 베니아였다. 1156년에는 바벤베르크가() 지배지역의 수도가 되어 급속히 그 중요성이 커졌다. 1137년에는 이 도시에 특허장이 수여되었고 1221년에는 상업독점권이 인정되어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십자군이 성지로 발진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도이치 기사단의 후원자가 되었다. 1558~1806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사실상의 수도가 되었고 그후 1867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1867~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이 도시는 쇠퇴의 기미를 보였다. 예를 들면 16세기에 시민과 합스부르크가와의 싸움이 있었으며, 특히 전쟁의 무대가 되어 여러 번 전화를 입었다. 13~17세기에 시역은 빈 강과 후년의 도나우 운하와의 사이에 놓여져 있었다. 빈의 건축물은 여러 번 개축된 것이 많은데 특히 바로크 양식의 건물이 많다. 시의 성벽은 15~16세기에 더욱 큰 성벽으로 개축되었고 교외지구를 지키는 외측의 소성벽은 1704~60년에 축조되었다. 그러나 대성벽은 1860년대에 폭 56m의 환상도로(링슈트라세)로 바뀌었다.

 

대성벽과 소성벽의 사이는 1828년까지 시가지화 되었고 그 이외에는 오래전부터 귀족의 거주지가 있던 곳을 제외하고는 무계획적으로 건물이 들어선 곳이 많다. 오래전부터 발전한 또 하나의 지구로는 현재 도나우 운하 좌안에 있는 유대인 거리로서 17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지구는 일찍이 왕실수렵지의 일부로서 나머지 수렵지는 현재 프라타라고 불리는 자연공원이 되어 있고 그 일부에는 유원지와 무역박람회가 개최된 곳이 있다. 도나우 좌안은 교외공업지구인데 19세기 후반 시역이 확대된 것은 공업화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인구는 1840년의 약 44만 명에서 1910년에는 2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는데 이에 따라 교외에는 노동자의 광대한 주택지가 개발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시가지의 연변, 특히 서부와 북서부에 고급주택지가 생겨나면서 중심지구 및 오래된 교외의 건물은 약 3/4이 교체되었다. 현재 시에 편입되어 있는데 많은 촌락에는 다소 농촌의 그림자가 남아 있어 빈의 도시 풍경에 독특한 풍취를 주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빈이 192211일 연방주가 되면서 시당국이 건설한 거대한 아파트 군이다(3제국). 이 아파트의 일부는 1934년 비합법적인 사회당이 돌푸스 독재정권에 반대하여 일으킨 무장봉기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 계획되어 추진중이던 아파트 건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해 중단되었다. 이 대전의 후반에 빈은 커다란 손실을 당하여 가옥 파괴가 27만 채, 공공건물과 대공장은 1/4이 파괴되었다.

1945년 빈이 다시 오스트리아의 수도 겸 연방주가 되었을 때 도시의 부흥은 난관에 부딪쳤는데, 연합군에 의한 분할점령과 물자·자금의 부족이 큰 원인이었다. 전후 시당국에 의해 건설된 아파트 군은 건폐율이 약 25%에 달해 전쟁 전보다 여유있게 되었고 소 아파트 군은 총 건축실적의 75%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리온 호텔에 날이 밝았다. 커튼을 열고 내다 보니 비가 내린다. 두바이에 비해 춥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어야겠다. 호텔에서 가장 일반적인 호텔식으로 아침 식사를 했다.

버스를 타고 조금 나가서 게른트거리로 향했다. 비엔나의 여자 가이드는 비교적 많은 것을 이야기 해 주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다. 쇼핑을 시키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게른트거리를 다니다가 쇼핑몰로 안내하려고 한다. 한국인은 잘 사지 않는다는데 이번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거리는 전차 택시 승용차가 얽혀 다녀도 하나도 위험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호를 잘 지키지도 않고 횡단 보도를 잘 지키지 않아도 차들이 알아서 피해 다닌다. 관광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위험하기는 해도 시민들이 많이 양보하고 안내한다. 우리가 대열에서 이탈될까봐 걱정하는 것을 시민들이 다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북촌 한옥마을에 갔을 때 외국 관광객들의 모습을 우리가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비엔나는 음악과 건축 뿐 아니라 중세 세계문화의 중심이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  가리도 아름답고 건축도 예사롭지 않았다. 고딕 양식 바로크양식의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어우러져 있다. 뾰족탑이 많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 여기 저기 솟아 있는데 대개가 성당 건물이 안닌가 한다.


첫 일정은 성 슈테판 성당이다. 성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상징이라고 한다. 특히 모짜르트기 이곳에서 25세에 결혼식을 하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장례식을 치룬 성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결혼식은 매우 화려했지만 결혼식은 아주 초라했다고 한다. 밖에서 보면 첨탑이 137m라 매우 높고 거대해 보였다. 이렇게 높은 첨탑을 세우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천주교는 하늘의 신을 모시는 종교이다. 그러니 신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마음이다. 인간의 소망은 하늘을 향하여 잇고 그 소망은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당은 웅장하고 첨탑은 높아야 한다. 성당은 처음 바라보면 화려하게 보이기 보다  매우 검고 칙칙하게 보였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건축 자재인 돌이 산화되어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그 칙칙한 색의 건물에 색깔을 칠한다든지 하는 장식을 하지 않고 원형대로 보전하는 마음이 감사했다. 최초의 양식은 로마네스크였으나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소련군의 포격을 받아 붕괴되었다가. 오늘날에는 현재와 같은 고딕 교회로 다시 지어졌다. 1359년부터 5년간의 대역사 끝에 세워진 남탑의 높이는 137m. 북탑은 무려 400여 년이나 걸려 완공됐다

 내부에 들어갔다. 내부도 약간 어두웠다. 서유럽에 유명한 성당을 다녀 보았는데 내부가 이렇게 아름답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은 처음이다. 물론 성베드로 성당의 천정벽화도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다. 성당 내부에 어느 한 곳 빈틈이 없이 성인들과 성화가 새겨져 있었다. 스테인그라스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거대한 기둥에 새겨놓은 성인들의 모습이 거룩해서 한동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군데군데 촛불을 밝히고 예배드리는 곳이 있었다. 천주교에 대한 교양이 전혀 없는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떻게 예를 표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룩한 신의 모습이나 성인 성자의 삶에 고개를 숙이는 법은 안다. 이 성당에는 흑사병으로 사망한 딱한 시신 약 2,000여인의 유골이 지하 납골당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성당 내부 중앙 주 제단 (바로크 양식), 성가대석 오른쪽에 안치된 프리드리히 3세의 묘는 르네상스 양식, 지하에는 카타콤베(납골당, 지하 유골 안치소)가 있다고 하는데 특별한 경우만 관람 가능하다. 이 세상을 와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삶의 양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주검의 모습은 누구나 한 모습이다. 모짜르트의 시신이 죽어 아무렇게나 취급되었듯이 다른 사람의 주검도 특별하게 대접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었다. 교회에 안치되면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이고 절집에 묻히면 누구나 다 중생이다.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간 사람들의 영혼이 그렇게 많이 모셔져 있어서 경건해졌는지도 모른다.


성당에서 나와서 다시 외관을 돌며 마음 속으로 경배를 드렸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한들 이렇게 경건해질까? 오랜 세월 비바람에 산화되에 고색창연한 건물의 모습이 아름다워 그 자체가 하나의 신과 같았다. 슈테판 성당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쇼핑도 하고 거리 관광을 하였다. 유리 공예나 찻잔등이 아름다웠지만 값은 비싸다.


성당에서 나와 비엔나의 번화가라고 하는 게른트너 거리에 갔다.  젊은날에 나는 비엔나 커피를 좋아했다. 그러나 비엔나 커피는 없었다. 커피에 우유와 아이스크림을 얹은 커피를 참 좋아했는데 그것이 바로 벨랑쥐(Melange)였다. 우리 회원들은 한 커피 하우스에서 멜랑쥐를 마셨다.


쉔부른 궁전에 갔다. 외관은 베르사유 궁전의 축소판이다. 쌍트뻬떼를부르그의 겨울의 궁전과도 다를 바가 없다. 베르사유-겨울의 궁전-쉔부른 궁전이 형님 아우 순처럼 보였다. 건물의 모습이 그렇고 정원의 모습이 그렇다. 정원 분수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작은 베르사유라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베르사유나 겨울의 궁전 만큼 깔끔하게 관리되지는 않은 것 같다. 쉔부른 궁전의 '쉔'은 아름다움이란 뜻이고 '부른'은 분수라는 뜻이라 한다.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궁전이란 말일 것이다. Schönbrunn18세기부터 왕조가 끝날 때까지 합스부르크의 여름 별장이 되었다. 광활한, 대칭의 궁전 건물은 잘 꾸며진 정원 한복판이 아름답다. 1.7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쉔부른 정원은 대규모의 지역을 덮으며 미궁, 미로 및 동물원을 포함한다. 프랑스 혁명당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아 앙뜨와네뜨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궁전 내부는 우아하고 호화로운 로코코식으로, 18세기 후반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집한 자기, , 가구, 회화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한때 모차르트가 황제 가족을 즐겁게 한 거울의 방을 자랑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탄생한 쉔부른 궁전은 1441개의 방 중에서 45개의 방을 관광객에게 공개하고 있는데, 침실의 가구며 커튼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마치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것만 같다. 특히 방마다 걸려있는 초상화는 아직도 생생한 왕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궁전도 궁전이지만 의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동유럽을 더날 때까지 우리를 데리고 다닐 버스


케른트너거리

성 스테판 성당

스테판 성당


스테판 성당 멱면 조각

성당 앞에서

성당의 내부

성당 내부

내부의 제단


 

성당의 내부

성당 내부


케른트너거리

전통 시장

거리를 활보하는 회원들

골목길늘 누비며

커피를 기다리며

이효정 대장 부부

비엔나가 자랑하는 말랑쥐 커피


쉔부른 궁전의 정원

베르사유를 닮은 쉔부른 궁전 앞에서

정원 분수가 아름답다

궁전 정원에서

이븐 아줌마들

네 여인

우리 내외 궁전의 주인은 아님


쉔부른 궁전의 내부는 촬영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대제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여성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호화로운 삶이 그대로 남아 있다. 눈 요기만 실컷하고 나왔다. 쉔부른 궁전에서 나와서 쉔부른이라는 레스토랑에 가서 현지의 명품식단이라는 호이리게 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수프와 돼지고기 바비큐, 닭다리, 삶은 감자와 소시지였다. 나는 원래 소시지는 좋아하지 않는데 먹어보니 맛이 좋다. 닭다리구이도 맛있었다. 감자는 우리 강원도 감자 만큼 맛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현지인들은 그런 감자를 좋아할 것이다. 항상 그렇지만 여행지에서 현지식을 먹으면 색다른 맛이 있기 때문에 포식을 하게 되고 그래서 번번이 과식을 한다.


점심을 먹고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를 거쳐 부다페스트로 간다.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는 1시간 남짓 걸렸다.

호이리게 정식

슬로바키아

정식 명칭은 슬로바키아공화국(The Slovak Republic)이며, 폴란드·우크라이나·독일·루마니아·오스트리아 및 체코 등으로 둘러싸여 있다. 면적은 49035, 인구는 5445027(2015년 현재), 수도는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이다. 종족 구성은 슬로바키아인 85.8, 헝가리인 9.7, 체코인 1이고, 나머지는 루테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모라비아인, 폴란드인 등이다. 언어는 헝가리어·체코어 등이 사용되고 있으나, 공용어는 슬로바키아어이며, 종교는 가톨릭교가 68.9, 개신교 10.8, 그리스정교4.1이다.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로서 겨울에는 춥고 건조한 반면, 여름에는 덥고 습기가 많다. 슬로바키아는 원래 농업 국가였으며, 공산당 통치시기에 산업 부문에 대한 대규모의 투자 덕분에 체코와 비슷한 정도의 산업화를 달성하였다. 주요 산업으로는 중공업, 군수산업, , 강철, 비철금속 등이다.

2014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023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7635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공화제의 의원내각제이며,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인 국민회의(150)이다. 주요 정당은 지향당(Smer), 기독민주연합(SDKU), 민주운동(HZDS), 국민당(SNS) 등이다.

슬로바키아는 오랫동안 헝가리의 지배를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 슬로바키아민족운동이 일어나 인접국인 체코와 슬로바키아연방 결성을 촉진하였으며, 그 결과 19181028일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하였다. 1939년 슬로바키아는 독립을 선포하였으나 곧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에 슬로바키아 레지스탕스는 19448월 국민봉기를 주도하였고, 1945년 독일의 패망과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가 재건될 수 있었다.

1946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였고, 1948년 무혈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되었다. 1968년에 슬로바키아인 둡체크(Dubcek, A.)에 의한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나 바르샤바조약군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1989년에 슬로바키아 민주세력의 주도하에 공산당 통치를 종식시켰으며, 슬로바키아는 그 뒤 좀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9926월 실시된 선거에서 체코계 당과 슬로바키아계 당이 자기민족 지역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에 따라, 그해 9월 헌법을 제정하고 199311일 체코슬로바키아연방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독립하였다.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의 최대 도시인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의 수도로 도나우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며 한때 헝가리의 수도가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었다. 그 당시 많은 헝가리 왕들이 이 도시에서 즉위식을 했는데,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이곳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이 도시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통치하던 시절에 가장 부흥했었다. 그래서 그 시대에 대부분의 도시 건물들이 건축되었다. 구시가지에는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보존돼 있어 중세 도시의 면모를 느끼며 둘러볼 수 있다. 더불어 근교는 와인 산지로도 유명하니 여행 중에 와인 잔을 기울이는 추억도 만들어 보자


브라티슬라바에 도착한 즉시 시내 관광을 했다. 처음 찾아간 곳은 파란 교회라고 하는 곳이다. 교회의 외벽이 모두 파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마침 결혼식이 있어서 입장해서 바로 나와야 했다. 신랑과 신부는 매우 나이가 들어 보였고 신부의 거침없는 행동이 오히려 보기 좋았다.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길의 모습

브라티슬라바의 거리-에리자베스교회 가는길

파란교회에리자베스 교회

파란교회 외부 장식

파란교회의 내부

결혼식을 기다리는 신랑 신부

길가에 주차해 놓은 웨딩카

거리의 전차

거리에서

성 마틴 성당

국립 극장 앞 광장

국립극장 앞 광장에서


훔쳐보는 사람, 매홀에서 일하다가 훔쳐보는 모양이다

훔쳐보는 사람을

모자를 벗는 사람

시가지 거리

미카엘 문으로 가면서

미카엘 문의 장식

서울 8138KM

거리 벤치에서


브라티슬라바 관광을 하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로 향한다. 이번 여행중 아마도 하루에 3개국을 돌아보는 경우는 오늘이 유일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바키아로 여기서 다시 헝가리로 간다. 문화도 세 나라는 조금씩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쓰고 게르만 계통의 민족이라 게르만 문화이다. 슬로베니아는 아무래도 슬라브 문화에 가까울 것이다. 헝가리는 훈족이므로 동양의 사고방식을 지니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 이 모든 문화를 하루에 본다는 것은 무리이다. 과연 머리에 남는 것이 있을까 걱정해 본다.


아무튼 두 나라를 돌아보면서 오스트리아는 아무래도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높기 때문에 깔끔하고 훌륭하다. 오스트리아에서 슬로바키아로 넘어오는 국경지대에서 느낀 것은 소득의 차이가 국토관리에도 이렇게 차가 난다는 사실이다. 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에 비해 월등히 가난하지만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 수준이다. 그러나 거리에서 본 것은 우리보다 훨씬 검소하다는 것을 느꼈다. 오스트리아든 슬로바키아든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고 편안해 보였다. 명동에서 청주사람을 만난 것처럼 편안하다. 그들의 눈에는 경쟁의식이 보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개인 소득이 6만달러 가까이 되니 경쟁을 생각하지않아도 되는가? 그들은 국토의 70%가 농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그렇다면 우리는 1만달러 소득일 때보다 3만 달러 소득이므로 더 편안해야 하는데 더 경쟁이다. 우리는 무한 경쟁의 역사를 지니고 살아왔다. 이기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극한적인 투쟁으로 살고 있다. 어떤 철학, 어떤 교육이면 그런 가치를 버리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런 경쟁의식이 없기 때문에 미움도 덜할 것이다. 경재에서 졌을 때 승자에 대한 미움은 아주 오래 남는다. 예를 들어 백제와 신라의 경쟁에서 진 백제 유민들은 아직도 신라를 미워하고 있다. 조선 말기 풍양조씨와 안동김씨, 여흥민씨의 경쟁에서 지고 이기는 싸움은 아직도 그 앙금이 남아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을 미워하고 일본은 아직도 우리를 혐오하고 있다. 그냥 모든 것을 하나의 역사의 흐름으로 생각하면 안될까하는 생각을 여기서 한다. 거리에 수많은 동상들을 보면 유럽인의 역사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순신장군이 세종대왕 동상이나 마음 놓고 세울 수 있다. 서울 거리에 법정스님이나 김수환추기경의 동상을 세울 수 있을까? 광화문 앞에 김구나 이승만 동상을 세울 수 있을까? 종로에 박정희 동상을 세울 수 있을까. 참으로 의문이다. 청주 동헌 앞이나 도청 마당에 이원종 전 지사의 동상을 세울 수 있을까? 중앙공원에 노무현의 흉상을 세울 수 있을까? '나'가 아닌 남을 부정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제 슬라브족에게 지배 당하고 소련 탱크가 거리를 휩쓸었던 부다페스트로 향한다. 헝가리 사람들은 어떻게 승자들을 대할까? 그들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버스로 2시간 30분 걸린다고 한다. 오후 6시 경 도착한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단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밥이다. 야 밥이다. 그러나 전혀 뜸이 들지 않았다. 아무리 참고 먹으려 해도 먹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이 실수로 밥이 설익은 것이 아니라 원래 이렇게 해서 먹는다고 한다. 참고 몇 숟갈 요기를 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밥이 퍼졌다고 난리일 것이다. 다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헝가리

정식 명칭은 헝가리공화국(Republic of Hungary)으로, 19891023일 헌법 개정으로 헝가리인민공화국(Hungarian People’s Republic)에서 바뀐 명칭이다. 면적은 93028, 인구는 9897541(2015년 현재)이며, 수도는 부다페스트(Budapest)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마쟈르족으로 96.6이며, 독일인이 1.6%, 기타 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인, 루마니아인이 있고, 언어는 민족고유의 마쟈르어를 사용한다. 국민의 67.5가 가톨릭교를 믿으며, 개신교 20%, 그리스정교 2.6%이다.

기후는 다습한 대륙성기후로서 봄·가을이 짧고 여름에 비가 많이 온다. 경제는 농업 위주였으나, 2차세계대전 후 공업화에 주력하여 공업생산이 주도하게 되었다. 특히 광업·알루미늄공업·자동차·전자기기 등의 개발에 주력하고 있으며, 주요 자원은 석탄·천연가스·보오크사이트 등이다.

2015년 현재 국내총생산은 1,37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24450 달러이다. 이 나라의 정체는 의원내각제 성격의 공화제로서, 대의기구는 임기 4년의 국민회의(386)가 있다. 주요 정당으로는 사회당(HSPR), 청년민주연합(FIDESZ), 민주포럼(HDF) 등이 있다.


부다페스트

인구 1,757,618(2015) 면적525.2국가 헝가리 도나우 강 양안에 걸쳐 있다. 헝가리의 정치·행정·산업·상업의 중심지이다.

BC 3000년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오늘날 헝가리 인구의 약 1/5이 살고 있다. 1873년 페슈트(도나우 강 좌안부도(도나우 강 우안오부도(옛 부도, 부도의 북쪽)의 마을들이 합병되면서 부다페스트라 했다. 도시의 규모는 외곽의 여러 공업지대까지 포함할 정도로 커졌다. 페슈트가 평탄하고 단조로운 평야에 있는 반면 부도 구릉의 사면에 세워진 부도는 도나우 강 서안 아래로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이 도시의 대부분은 농경지대와 넓은 산림지역으로 되어 있다. 라듐 성분이 함유된 광천들이 오랫동안 의료용으로 개발되어왔다. 기후는 거친 대륙성기후와 온화한 서유럽 기후가 교차되는 곳으로 연강수량은 600정도이다.

부다페스트의 인근 지역에서는 농사를 거의 짓지 않으며, 부다페스트 경제에 있어서 공업의 비중은 제조업의 분산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중공업과 섬유제품·기구·통신장비·전자제품 등의 제조는 여전히 활발하며, 서비스 및 행정 부문도 성장해왔다. 헝가리의 수송 및 통신 서비스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도나우 강 유역에 있는 지방에는 선박 대리점들이 있다.

외국 무역상사도 많이 있으며, 상업은 국제박람회와 전시회를 통해 촉진되고 있다. 도심 재개발과 외곽지대로의 산업체 이주로 인구가 도심에서 외곽지대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전후 재건산업으로 보다 현대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으나 부도의 성곽 언덕 지구에 있는 복구된 부도 성()과 모티오슈 교회(13세기), 페슈트 도심의 시청 건물(1735), 페슈트의 북쪽으로 강을 따라 있는 국회의사당(1904) 등 많은 역사적인 건축물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인 인민민주주의 가로는 페슈트 도심에서 북동쪽에 있는 시 공원까지 뻗어 있다. 이 가로변의 주목할 만한 건물로는 국립 오페라 극장(1635 설립)과 미술박물관을 들 수 있다.

헝가리 학술원뿐만 아니라 로란드에외트뵈슈대학교(1635 설립)를 비롯한 여러 고등교육기관이 있으며, 또한 많은 박물관·미술관·극장·연주회장 등이 있다.

부다페스트에는 지하철 및 전차 연결망이 넓게 뻗어 있다. 부도는 여러 개의 교량과 하나의 철도 터널로 페슈트와 연결되어 있다. 도나우 위원회 위원용의 체펠 자유항이 있는 도나우 강과 대륙횡단 도로 및 철도 등을 통해 국제수송이 이루어지고 있다. 도심에서 남동쪽으로 16떨어진 곳에 페리헤디 국제공항이 있다  

저녁을 먹은 후 도나우강 주변의 야경을 보러 나갔다. 버스에서 내리자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비를 맞으며 어둠을 더듬어 배를 탔다. 도나우강은 부다지역과 페스트지역을 양분하는 강이다. 부다지역은 왕궁이 있고 고급관리들이 살았던 지역이고 페스트지역은 상공인이 살았던 지역이라고 한다. 여기에 처음오 놓인 다리인세체니 다리, 부다지역의 왕궁과 성당, 페스트지역의 성당과 아름다운 건물들을 유람선안에서 다 볼 수 있었다. 황홀한 야경이다. 서울의 야경도 이만큼 아름다울 것이라고 자부했지만 겔레르트언덕의 아름다운 건물을 보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야경

야경

야경

야경

야경

 

화려한 야경을 보고 늦게 아바쿠스 호텔로 들어왔다. 호텔은 깨끗하고 조용했다. 저녁에 백만사 회원들이 모여 이완호교장이 준비해 온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면 늘 그렇듯이 안하던 말을 한다. 그러나 편안한 사람들이 있을 때그렇다. 아마도 아무도 나를 실수했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내일은 부다페스트를 관광하고 쟈그래브로 이동한다. 밤에 본 아름다운 다뉴브강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이할 것인가. 소주기운이 남아 잠을 푹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