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개천 바닥에 피는 고마리꽃

느림보 이방주 2016. 9. 29. 16:38

개천 바닥에 피는 고마리꽃


2016년 9월 26일

주중리에서


이 가을주중리 수름재 마을은 익어가는 도향稻香에 흠뻑 취했다. 볏논 아래 개천바닥에는 고마리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볏논의 넘실대는 황금빛 때문에 더 겸손하다. 자전거를 세우고 새벽을 여는 고마리꽃을 내려다본다.


가을 가뭄으로 개천이 말랐다. 농부들은 개천바닥에 바가지 물까지 볏논에 쓸어 담았다. 까짓 고마리가 꽃을 피운들 무슨 소용인가? 볏논에 물을 대야 낟알이 통통해지지. 농부의 마음이다. 습지를 좋아하는 고마리는 자주색 줄기를 추레하게 드러냈다. 연두색 벼이삭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무렵에 고마운 비가 내렸다. 고마리는 그제야 잎을 깨우고 줄기를 세워 꽃을 피웠다. 둑방길에서 내려다보니 공연히 애처롭다. 아침 이슬에 깔끔한 모습이 수름재 토박이들 같다.


오늘 새벽에도 주중동 옛 마을인 수름재 들에서 지나가는 계절을 만난.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밟으면서 정겨운 토박이들의 생활을 발견한다. 피 한 줄기 올라오지 않은 볏논에서, 깔끔한 도라지 밭이나 남새밭에서 부지런함을 본다자가 넘을 듯 잘 영글어 넌출거리는 벼이삭이 고맙다.


바로 길 건너 시가지 쪽에는 내가 사는 아파트가 도시를 방어하는 성벽처럼 가로 막았다. 마을 뒤편 언덕에는 외지인들의 저택에서 호랑이처럼 포효하는 개소리가 무섭다. 배산임수背山臨水 바람막이 뒷산을 뭉개고 거대한 축대를 쌓아 중세 봉건 영주의 성처럼 저택을 올라 앉혔다. 언덕 아래 토박이들이 사는 나지막한 지붕이 올망졸망하다. 손에 흙 묻히고 사는 토박이들은 마음까지 눌렸다. 개소리에 숨죽고 높은 지붕에 기가 죽는다.


고마리꽃은 하얀 것도 있고, 붉은 것도 있다. 하얀 그리움은 그대로 둔 채 가을볕에 미쳐버린 새빨간 열정만 끄트머리에 맺혀 있는 놈에게 더 마음이 간다. 족두리를 막 내려놓은 이마에 찍어 놓은 곤지처럼 예쁘다. 하지만 색깔은 달라도 너나없이 뭉쳐서 피었다. 자잘한 꽃들이 모여 큰 꽃을 이루었다. 꼭 수름재 농투사니들 같다. 뭉쳐 사는 토박이들의 모습처럼 아름답다.


 개천으로 내려갔다. 풀섶을 헤치고 발을 내디뎠다. 며느리밑씻개 덩굴이 종아리를 감고 바지 속까지 가시로 찌른다. 체중을 이기지 못하는 흙더미가 무너져 개천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내려서야 아름다움을 볼 수 있구나. 내려서기를 잘했다. 허리를 굽혀야 진수를 발견한다. 저 위에 올라앉은 사람들도 전원의 참맛을 원한다면 마을로 내려와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사람을 만났다. 허리를 많이 굽혀 절을 했다. 노동하는 철학자에 대한 경의이다. 마을 기운을 다 눌러버린 저택, 저기서 내려다보면 마을이 개천이겠지. 그러나 흙을 버리지 않은 수름재 토박이들은 개천에서도 거룩한 노동으로 산다. 오늘 아침에는 고마리꽃이 참 고맙다. 침묵하는 깨우침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