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12. 연화사는 도리원桃李園에 있었네

느림보 이방주 2016. 6. 7. 12:01

연화사는 도리원桃李園에 있었네

 



연화사는 세종시 서면에 있는 자그마한 사찰이다. 복숭아밭 가운데로 골목을 따라가면 일주문 격으로 연화문이 있고, 우뚝 서 있는 비로전毘盧殿과 그 뒤로 숨은 듯이 보이는 삼성각이 전각의 전부이다. 요사채로 쓰는 양옥집이 마당 한쪽에 민가처럼 있을 뿐이다.

연화사는 산중에 있는 절이 아니다. 봄이면 배꽃을 시작으로 복숭아꽃 자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마을 안에 있다. 이백李白의 도리원을 떠올리게 하는 무릉도원이다. 경내는 고요하다. 법당에 들어가니 비로자나석불 양쪽에 협시불처럼 무인명아미타불비상과 칠존불비상을 모셨다. 삼배를 올렸다. 마음은 진품 불비상에 있다. 몰래 사진 찍을 방법을 욕심내지만 그럴 수는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옹골진 복이다. 뒷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법당에서 나와 스님을 찾았다. 스님은 낯모르는 중생을 "차나 한잔 하고 가십시오."하고 쉽게 허락했다. 합장하는 모습이나 구김살 없는 얼굴이 고향 사촌 집에 들른 것 같다. 스님께서 손수 차를 만드는 동안 검소한 처소를 둘러보았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들렀을 때 신도가 한 명도 없는 법당에서 혼자 예불 드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바로 그 스님이 연화사 주지 운주스님이다.


혼자 예불 드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데 예불이 끝나기 전에 나왔던 일이마음에 걸려서 말씀을 건네어 보았다. 신도의 유무가 예불에 미칠 일은 아니라고 했다. 있는 중에도 없음이 있고 없음 가운데에도 있음이 있는 것이 불법이 아니냐고 반문해서 나를 부끄럽게 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산중에 있는데 연화사는 마을 가운데 과수원에 있는 것이 궁금했었다. 스님은 처음 왔을 때 절집이 과수원 가운데 움푹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기단을 높이는 비로전 개축 불사를 이루었다고 한다. 한창 꽃이 필 무렵 이 앞길을 지나노라면 복숭아꽃 배꽃이 만발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비로전의 모습이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연화사에는 연기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말 조정에서 승려들을 공역에 동원한 적이 있었다. 한 스님이 공역을 피해서 만행을 하다가 운주산과 인연이 되어 아미타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기도 중에 꿈속에서 부처님께서 이곳을 정해 주시어 땅을 파보니 아미타불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모시고 수행하게 된 것이 지금 연화사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연화사가 소장하고 있는 불비상은 2점이다. 무인명아미타불비상(보물649)과 칠존불비상(보물650)인데 이 불비상은 1961년 인근 쌍류리 생천사지에서 발견되었다. 설화에 전해지는 아미타불상이 지금 연화사가 모시고 있는 불비상과 일치하는지 알 수는 없다. 만약에 일치한다면 연기설화는 뒷날 연화사를 사랑하는 지역주민들이 지어낸 이야기 같다.


무릉도원은 도가道家에서 꿈꾸는 이상향이다. 그렇지만 사찰이 복숭아꽃 배꽃 피는 아름다운 동산에 있으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연기설화처럼 이곳에서 아미타불이 출토되었으니 이곳이 정토세계이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부처님은 특별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이 정좌한 곳이 곧 정토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중과 산하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궁금한 것이 참 많다. 무인명아미타불비상 이면에는 미륵보살반가상이 새겨져 있다. 서광암에서 발견된 계유명천불비상에는 수많은 부처님을 새겼다.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이 하나의 불비상에 표현된 것도 그렇고, 왜 작은 돌에 그토록 많은 불상을 새겨야만 했는지 궁금증이 꼬리를 몰았다. 운주스님과 차 한잔의 시간은 그래서 점점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2016. 6. 7.)


[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


연화사는 도리원(桃李園)에 있었네

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2016년 06월 13일 (월) 18:08:21충청매일 webmaster@ccdn.co.kr

 

 

연화사는 세종시 서면에 있는 자그마한 사찰이다. 복숭아밭 가운데로 골목을 따라가면 일주문 격으로 연화문이 있고, 우뚝 서 있는 비로전(毘盧殿)과 그 뒤로 숨은 듯이 보이는 삼성각이 전각의 전부이다. 요사채로 쓰는 양옥집이 마당 한쪽에 민가처럼 있을 뿐이다.


연화사는 산중에 있는 절이 아니다. 봄이면 배꽃을 시작으로 복숭아꽃 자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마을 안에 있다. 이백(李白)의 도리원을 떠올리게 하는 무릉도원이다. 경내는 고요하다. 법당에 들어가니 비로자나석불 양쪽에 협시불처럼 무인명아미타불비상과 칠존불비상을 모셨다. 삼배를 올렸다. 마음은 진품 불비상에 있다. 몰래 사진 찍을 방법을 욕심내지만 그럴 수는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옹골진 복이다. 뒷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법당에서 나와 스님을 찾았다. 스님은 낯모르는 중생을 “차나 한잔 하고 가십시오"하고 쉽게 허락했다. 합장하는 모습이나 구김살 없는 얼굴이 고향 사촌 집에 들른 것 같다. 스님께서 손수 차를 만드는 동안 검소한 처소를 둘러보았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들렀을 때 신도가 한 명도 없는 법당에서 혼자 예불 드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바로 그 스님이 연화사 주지 운주스님이다.


혼자 예불 드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데 예불이 끝나기 전에 나왔던 일이마음에 걸려서 말씀을 건네어 보았다. 신도의 유무가 예불에 미칠 일은 아니라고 했다. 있는 중에도 없음이 있고 없음 가운데에도 있음이 있는 것이 불법이 아니냐고 반문해서 나를 부끄럽게 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산중에 있는데 연화사는 마을 가운데 과수원에 있는 것이 궁금했었다. 스님은 처음 왔을 때 절집이 과수원 가운데 움푹 빠져 있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기단을 높이는 비로전 개축 불사를 이루었다고 한다. 한창 꽃이 필 무렵 이 앞길을 지나노라면 복숭아꽃 배꽃이 만발한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비로전의 모습이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연화사에는 연기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말 조정에서 승려들을 공역에 동원한 적이 있었다. 한 스님이 공역을 피해서 만행을 하다가 운주산과 인연이 되어 아미타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기도 중에 꿈속에서 부처님께서 이곳을 정해 주시어 땅을 파보니 아미타불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모시고 수행하게 된 것이 지금 연화사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연화사가 소장하고 있는 불비상은 2점이다. 무인명아미타불비상(보물649호)과 칠존불비상(보물650호)인데 이 불비상은 1961년 인근 쌍류리 생천사지에서 발견되었다. 설화에 전해지는 아미타불상이 지금 연화사가 모시고 있는 불비상과 일치하는지 알 수는 없다. 만약에 일치한다면 연기설화는 뒷날 연화사를 사랑하는 지역주민들이 지어낸 이야기 같다.


무릉도원은 도가(道家)에서 꿈꾸는 이상향이다. 그렇지만 사찰이 복숭아꽃 배꽃 피는 아름다운 동산에 있으면 안 된다는 법도 없다. 연기설화처럼 이곳에서 아미타불이 출토되었으니 이곳이 정토세계이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부처님은 특별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이 정좌한 곳이 곧 정토라는 것을 깨달았다. 산중과 산하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나는 궁금한 것이 참 많다. 무인명아미타불비상 이면에는 미륵보살반가상이 새겨져 있다. 서광암에서 발견된 계유명천불비상에는 수많은 부처님을 새겼다.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이 하나의 불비상에 표현된 것도 그렇고, 왜 작은 돌에 그토록 많은 불상을 새겨야만 했는지 궁금증이 꼬리를 몰았다. 운주스님과 차 한잔의 시간은 그래서 점점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