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충남 서천군 한산면 서천 건지산성乾芝山城

느림보 이방주 2016. 4. 17. 07:38

충남 서천군 한산면  서천건지산성乾芝山城 답사


위치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규모 : 둘레 1300m, 토축 산성, 내성 테메식 산성, 외성은 포곡식산성
시대 : 백제후기에서 통일신라 시대
문화재 지정 : 충청남도 사적 제 60호

▣ 답사일 : 2016년 4월 16일



[개요]

 

둘레 1,300m, 면적 16만4128㎡. 현재 동서문지(東西門址)가 남아 있다. 축성시기는 대개 백제 후기에서 통일신라 초기로 보고 있다.

이 산성은 주봉에 위치한 긴 타원형의 산정식(테뫼식)산성과 이 성을 거점으로 서북쪽의 작은 계곡을 두른 포곡형(包谷形)산성, 그리고 서문지의 남서쪽에 두 개의 소규모 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테뫼식 산성은 말안장모양[馬鞍形]의 산정에 길이 150m, 너비 30m로서 둘레는 350m에 불과한 작은 성이다. 산성의 북쪽은 험준한 천연의 암벽을 이용하여 성벽으로 삼았고, 나머지 부분은 토축했으나 붕괴가 심하다. 그러나 산성의 윤곽이나 성벽의 통과선은 찾아볼 수 있다.

이 산성에 이어 작은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 산성은 테뫼식과는 달리 성벽 내부에 돌덩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높은 능선의 성벽 높이는 1m 내외이나 비교적 낮은 서문지 부근에서는 3m의 높이를 보이며 형태도 뚜렷하다. 성 안에는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 있는데, 지금도 한산(韓山)에서 산성에 이르는 도로는 이 문을 거치게 된다.

또한, 서쪽에도 문지가 확인되었는데, 이 문지에 이르러 앞뒤로 서로 방향이 어긋나게 벌어지면서 개방되었다. 이것은 마치 후대의 성곽에서 볼 수 있는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둘러쳐서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과 같이, 방어를 목적으로 미리 설계된 축성상의 구조로 추정되며, 성벽의 너비는 약 4m이다.

성안에 있는 봉서사(鳳棲寺) 서쪽 지점의 약 200평 가량의 계단형 평지에서 탄화미(炭化米)와 백제시대 토기조각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산성은 그 구조상으로 보아 먼저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고, 그 뒤에 포곡형 산성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서문지에서 남서쪽으로 600여m 떨어진 높이 약 130m의 산봉에 동서로 두 개의 소규모 산성이 있는데, 동쪽의 것은 길이 95m, 너비 60m의 타원형을 이루었고, 서쪽의 것은 길이 60m, 너비 45m로 동쪽 성에 접근하고 있다.

이들은 모성(母城)인 건지산성에 부수된 자성(子城)으로 볼 수 있는 보루(堡壘)인데, 이러한 모자축성법(母子築城法)은 백제산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산성은 임천(林川)의 가림성(加林城, 일명 聖興山城)과 함께 금강 하류의 수륙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건지산성이 전의 운주산성, 예산의 임존성과 함께 백제 부흥군의 최후의 거점이라 하여 찾아가고 싶었다. 언젠가 친구들과 서천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한산의 목은 이색의 문헌서원만 돌아보고 바로 인근의 건지산성을 돌아보지 못해 안타까웠다. 나 혼자 원한다고 해서 돌아볼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성안에 있는 봉서사와 함께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을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미루지 말고 혼자 떠나는 것이다. 물 한 병 떡 한 덩이를 배낭에 넣고 카메라만 챙겨 가지고 바로 출발했다.


봉서사 주차장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배낭을 메고 출발했다. 우선 봉사서 경내로 들어가서 극락전에 삼배를 드리고 나와서 건지산성을 일러주는 팻말을 찾아 비탈진 산길을 올라갔다. 산성은 토성이다. 이 성도 다시 쌓으려는지, 정비를 하려는지 성벽 위의 나무를 다 베었다. 중장비를 동원하여  나무를 베느라 성벽 아래 비퀴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고 토성이라 일부 훼손되기도 했다. 아름드리 참나무들을 베어낸 그루터기가 선명하다. 흙은 온전한 황토이다. 베어낸 나무도 다 치워서 주변 정리가 잘 되었다 토성은 다시 건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뚜렷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성벽 위에 올라 가서 성을 돌아보니 성의 윤곽이 다 보인다. 이 성은 건지산의 두 봉우리에 걸쳐서 긴 타원형으로 되어 있다. 양쪽 봉우리에 작은 테메식 산성이 있고 가운데 구릉을 잇는 산성은 자연스럽게 포곡식으로 되어 있다. 마치 두 고리를 이어 놓은 것처럼 내성은 테메식, 외성은 포곡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구릉에 한산면 호암리에서 영모리로 넘어가는 자동차 길이 나 있다. 자동차은 2차선으로 좁은 도로이고 이 도로를 통하여 봉서사로 들어가기도 한다. 이 길이 축성 시기부터 있던 길인지는 알수 없지만 아무튼 이 길의 호암리쪽에 동문이 영모리 쪽에 서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로에는 차가 심심찮게 지나다닌다. 도로 옆에는 작은 개울이 한산면 소재지 족으로 흘러 간다.


봉서사에서 비탈길을 올라가 만난 성벽은 도로가 끊어놓은 곳에서 훨씬 정상 쪽으로 올라가 있었다. 처음부터 살펴 보기 위해서 다시 서문으로 짐작되는 도로 쪽으로 내려 왔다. 성위에 난 길로 내려 오면서 살펴 보았다. 토성이라도 지금처럼 성벽이 비스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성벽의 흙이 흘러 내려서 이렇게 비스듬한 성벽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성벽 양쪽에 기둥을 박고 널판지를 댄 다음 황토를 가운데 넣고 다졌을 것이다. 황토를 물에 이겨서 다졌을 수도 있다. 여러가지 공법을 동원하여 쌓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모존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문지는 성벽이 끊어진 부분에서 약간 어긋나 있었다.  봉서사 쪽으로 성벽이 약간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고 반대쪽은 안쪽으로 꾸부러져 있다. 이른바 옹성甕城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치는 작은 겹성)의 모양이다. 이러한 모습은 청주 가까이에 있는 정북토성에서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길에 내려가서 성을 올려다보니 상당히 놓아서 약 5~7m쯤 되어 보였다. 아마도 이곳에 문이 있었을 것이다. 문헌에서는 성의 높이가 능선 부분은 1m 정도, 서문지 부분은 3m 내외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능선 부분은 1~ 3m 정도, 서문지 부분은  5~7m 정도는 되어 보였다. 성의 너비는 아랫 부분은 약 300cm, 윗 부분은 150cm 정도로 짐작되었다.


서문지 부분에 건물지로 보이는 평지가 있다. 평지는 봉서사 쪽으로는 계단식으로 널직널직하게 아직도 뚜렷하게 건물이 계단식으로 있었던 흔적이 보였다. 성의 내부에 민가가 있었다기 보다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 계단식으로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와편이나 토기편 등이 발견되었다기에 스틱으로 파 헤져 보았으나 풀이 많아 발견되지 않았다. 또 더 파내는 것은 훼손의 가능성이 있어서 참았다. 이곳에서 불에 탄 곡식의 재도 발견되었다는데 그런 것을 찾지 못해 아쉽기는 하였다. 대신 문지 가까운 건물지에서 기와편 몇 조각을 발견하였다. 서문지는 절개면에서 황토가 계속 허물어지고 있는데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안타까웠다.



하늘에서 본 건지 산성의 개요


봉서사에서 산성으로 가는 둘레길에 있는 표지석

일부 등산로로 변하고 훼손된 성벽과 이정표

건지산 정상으로 가는 성벽

건지산 정상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의 모습


서문지 부근의 도로와 문지 모습

서문지 부근의 계단식 건물지

서문지에서 건너 편의 산성의 모습 - 높지 않다.

서문지 근처 건물지에서 발견한 와편


다시 정상 부분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가팔랐다.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어 걷기에는 편했다. 정상에 오르니 뚜렷하지는 않지만 보루처럼 둥글게 쌓은 성의 윤곽이 보인다. 봉우리를 길게 150m 정도이고 너비는 30m 내외였다. 이곳은 한산쪽으로 매우 경사가 급해서 자연 성벽처럼 보였다. 그 위에 토축했지만 아직도 윤곽이 뚜렷하다. 윤곽은 뚜렷한데 나무를 베느라고 그랬는지 중장비가 오르내려 황토 성벽이 많이 훼손되었다. 1500년 이상 지탱해 온 성벽이 현대에 와서 부주의로 이렇게 훼손되는 걸 생각하면 안타깝다. 일을 시키는 사람이나 일을 하는 사람이니 역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거나 문화재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한 소치라고 생각되었다.


정상에는 건지산정이라는 정자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정자를 건립하게 된 동기 들을 적어 놓았다. '乾止山亭'이라는 현판의 글자 중에 止자가 건지산의 芝와 달라서 의아했다. 모든 문헌에 다 芝로 나오는데 止로 쓴 연유가 궁금했다. 정자 아래에는 건지산성에 대한 설명을 나무판에 적어 세워 놓았다. 그 중에 이 건지산성이 주류성이라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저항 거점지라고 되어 있다. 정확하게  '거점지로 알려져 있으니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역사란 자기 편에서 생각하면 이렇게 아주 쉽게 왜곡된다. 임존성에 가면 거기가 주류성이라 하고 운주산성에 가면 최후의 거점이 바로 거기라 했다. 내가 운주산성만 가 보았을 때는 거기가 바로 최후의 거점이라고 굳게 믿었었다.  역사는 해석이 중요하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미래 설계가 달라진다. 이렇게 내가 보이는 것만으로 해석하려 하면 무서운 결과가 나온다. 그래서 더 많이 찾아내고 고증해야 한다. 그래서 백제사나 고구려사가 땅에 묻힌 것이 아닌가? 가야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또 안내판에는 제목은 건지산성의 안내판으로 해 놓고 목은 이색의 문헌서원, 봉서사, 한산면 소재지 등에 대하여 더 많은 설명을 덧붙였다.


정상에서 보니 한산의 소재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아주 멀리까지 다 내려다 보인다. 육안으로 봐도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까지 다 보였다. 이곳이 훌륭한 전망대이고 보루가 되었을 것이다. 또 반대쪽의 건지산 정상의 성의 모습까지 뚜렷하게 보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처럼 성의 윤곽이 다 보였다.


정자에서 한산면 사무소로 가는 등산로도 있었다. 아마도 한산면 소재지에서 등산객들이 바로 이곳으로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반대쪽 산을 올라가야겠기에 올라 온길을 되짚어 내여오기로 했다. 정상에서 동문지 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었으나 너무 가파르고 험해서 안전한 쪽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건지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능선 위의 성벽

능선 위의 성벽-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능선 위의 성벽


정상 부분의 내성의 모습- 중장비가 오르내려 많이 훼손되었다.

내성의 모습 바위벽 위에 흙을 쌓았다.

건지산정 아래 있는 산성의 안내판


내려오는 길에 보니 건지산정의 건립에 대한 송덕비가 여럿 있었다. 이른바 지역 유지들의 덕을 기리는 비였다. 그러나 건지산성 정상에 이렇게 고증도 없이 시멘트 건물을 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곳에 어떤 모습의 건물이 있었을지 생각이나 해 보았을까? 그런 유사한 건물이라도 지어 놓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한산면에서는 등산로 위주로 설계하는 것 같다. 등산로 안내는 여러 곳에 있는데 임존성처럼 성의 개념 지도는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봉서가가 보였다.

내려오는 길에 숲 사이로 보이는 봉서사


다시 서문지로 와서 이곳 저곳을 본다음 작은 산몽우리로 향한다. 성 바로 아래에 묘지가 몇 군데 있다. 이쪽은 훨씬 완만한 능선이고 성벽도 높지 않았다. 정상부에 오르니 완만한 줄만 알았던 산이 갑자기 험준하고 일부 석축한 기초 위에 토축한 부분도 발견되었다.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곳에 건물지로 보이는 평평한 곳이 보였다. 이곳에서 동쪽 성위에 길도 없는 곳을 헤치며 내려왔다. 경사가 급하고 험했지만 그냥 내려왔다. 몇 번 미끄러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작은 나무들을 낫으로 제거한 곳도 있어 위험했다. 가파는 성을 내려와 작은 도랑을 건나 도로 위에 올라 봉서사 주차장으로 올라왔다.

성벽 바로 아래에 있는 묘지

북쪽 산정으로 가는 성벽

아직 나무를 제거하지 않은 곳

건물지로 보이는 곳

나무를 제거하여 옆으로 아직 정리되지 않은 동쪽 성벽

북쪽 작은 봉우리에서 길을 건너 남쪽 건지산 정상 쪽으로 이어지는 성의 윤곽


건지산성은 두 개의 정상부에 있는 작은 테메식 내성을 고리처럼 이어 포곡식으로 쌓은 특이한 형태로 축성된 산성이다. 또한 이 산 성을 중심으로 동서로 두 개의 작은 타원형의 테메식 산성이 더 있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두 군데를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일종의 보루라고 생각한다. 건지산성이라는 큰 산성이 본부가 되고 작은 보루들은 주변을 관찰하는 망대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답사한 백제의 산성들이 대개 이런 형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성과 금이성의 중간에 작성이 있고 금이성과 비암사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비암산 보루(내가 붙인 이름)가 있다. 이것을 모자축성법이라고 하는데 모성과 자성의 연결고리라고 한다. 건지산성도 모자축성법에 의한 산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 


건지산성은 백제의 수도로부터 서쪽 바다와 금강의 어귀를 지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과 백제의 교역과 쟁패의 현장인 기벌포와 연계되는 백제 수호의 요지였을 것이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백제의 최후 순간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러 왔던 군사들이 기벌포에서 당군에게 전멸했다고 하니 건지산성과 더불어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백제 최후의 격전지라고는 하나  부흥군 3천 군사가 최후를 맞아 몰살 당한 슬픔의 현장은 아무래도 아닌 듯하다. 성의 모습이 그렇게 보이지 않고 삼천의 군사가 굴속에서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데 굴이 있을 법한 곳도 없다. 또한 봉서사는 후에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절이라 하니 그들의 명복을 비는 사찰도 없다. 백제의 변방을 지키는 중요한 성이었음은 분명하다.

(2016.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