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세종특별자치시 연기지역 이성, 작성, 금이성 답사

느림보 이방주 2016. 3. 16. 04:43

세종특별자치시 이성李城, 작성鵲城, 금이성金伊城, 비암산 보루 답사


세종시 연기지역 전의 전동면 산성 답사의 마무리 일정으로 전의면 송성리 이성에서 출발하여 작성, 금이성을 거쳐 금성산(신증동궁여지승람에는 운주산으로 되어 있고 지금 운주산으로 불리는 산은 고산으로 되어 있음)을 타고 내려가 기슭의 운주산비암사에서 마치는 종주 산행을 하기로 했다. 이 종주 산행과 산성 답사는 상당히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우선 전의현의 중앙에 있는 토성에서 바라보이는 서남쪽의 산성의 체계를 알 수 있고 주변의 산세와 마을의 형성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산성 축성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의 상황을 미루어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산행을 하고 싶었으나 종주 산행이라 차량을 어디다 두고 시작해야 할 지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마침 이효정 선생님이 함께 하자고 해서 오늘 날짜를 잡게 되어 더욱 의미 있고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답사할 수 있게 되었다.


청주 사천동 성당에서 만나 비암사 주차장에 내 차를 주차시키고 이 선생님의 차를 타고 송성리로 갔다. 처음에 대전 가톨릭대학교 구내로 들어가 이성으로 향하는 산행 들머리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다시 학교 밖으로 나와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대전가톨릭대학교 하늘 묘원에 가면 학교 뒷산이 작성이고, 거기서 북쪽으로 가면 이성, 남쪽으로 가면 금이성이라고 일러 주었다. 우리는 임도를 타지 않고 능선을 걸으려 한다니까 그러면 송성리 마을에서 이성으로 올라가야 한다며 들머리를 가르쳐 주었다.


마을에 들어가서 들머리를 잘못 들어 잡목을 헤치며 멀리 보이는 임도를 향하여 치고 올라갔다. 임도에 이르러 조금 걸으니 이성의 표지판이 나왔다. 거기서 우리 답사와 산행은 시작되었다.  



이성-작성-금이성-비암사로 이어지는 등마루 지도 (이효정의 블로그 <山에는 山이 있다>에서 퍼옴)



1. 이성李城 

위치 : 연기군 전의면 달전리, 전동면 송성리
규모 : 주장 714m, 높이 3-10m, 폭 2m, 높이(해발) 430m  테메식 산성
시대 : 고려시대(백제시대가 더 정확함)
문화재 지정 : 충청남도지정기념물 제78호(89년 12월 29일) 세종특별자치시 지정 기념물 4호

▣ 답사일 : 2016년 3월 15일


임도를 따라  이성의 들머리 쪽으로 걸어가노라니 왼쪽으로 무너진 성이 보였다. 나는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그쪽으로 올라가고 싶었으나 이 선생님이 입구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 100m 쯤 가니까 이성이라는 알림판이 나왔다. 길은 황토이고 아주 고왔다. 나무 토막으로 길에 계단을 만들어 놓아서 걷기가 좋았다.건물지였을 법한 산성의 입구에 이성에 대한 설명을 적어놓은 안내판도 있었다. 이성은 전의 이씨의 고려시대에  태조의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태사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올랐던 이도李棹가 공주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사성(임금에게 성을 새로 받는 일)을 받아 이곳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성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전의현의 향교 뒤에 있는 토성을 중심으로 남쪽에 위치하여 이성離城이라 한다고도 한다. 곧 전의의 남쪽 정오방正午方이므로 주역에 의해 이성이라고도 하고 남산성이라고도 전해내려온다. 전의 이씨들은 이곳을 시조의 성지로 생각하지만 여러가지로 봐서 이성李城이라 하는 것은 전의 이씨의 후손에 의해 성역화된 것이고, 이성離城이 맞는 이름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표지석이나 안내판은 모두 이성李城으로 되어 있다. 전의 이씨의 시조인 이도가 이곳에서 살았다면 그렇게 써도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 이성산(전의 남산)은 전의의 안산이면서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송성리 앞에는 개바위가 있어 호랑이가 으르렁대면서 생기를 잃지 않는다고 하니 풍수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들머리 건물지에서 북쪽으로 성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성은 무너졌으나 성을 쌓았던 돌무더기가 그대로 보여서 성의 윤곽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남쪽 건물지(이도가 살았던 집 터, 아니면 정자가 있던 자리)에서 성벽으로 추정되는 아래로 돌을 짚으며 내려가 보았다. 성쌓기 방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성돌은 주변에서 주워 모아 쌓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른 곳에서 옮겨 왔다면 이 많은 돌을 어떻게 날랐을까 궁금하다. 아니면 주변 산에 돌광산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돌은 조금 차이가 있지만 너비 40cm 두께 15~20cm 저도 크기의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쌓았다. 혹 모양이 다른 것도 있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성벽을 쌓을 때 중간중간에 작은 돌로 쐐기돌을 넣어서 무너지지 않게 했다. 성의 높이는 낮은 곳은 2m, 높은 곳은 5m도 더 될 듯하다.


세종시에서 가꾸었는지 아니면 전의 이씨 종친회에서 다듬었는지 성 주변의 잡목과 잡초를 제거하여 비교적 깨끗이 성벽의 흔적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또 성벽 위를 널찍하게 해 놓아서 걷기도 좋았다. 북쪽을 향하여 가다보니 고려태사 이도의 주거지라는 표지석이 있고 넓은 건물터가 있었다. 이곳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개국공신으로 벼슬까지 한 사람이 왜 이렇게 놓은 곳에 와서 살았을까? 옛 사람들은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여 검소하게 사는 것을 자랑으로 알았다는 것이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쪽으로 모롱이를 돌아서니 전의가 훤히 다 보인다. 이곳은 고려시대 이도가 쌓았다고 하지만, 백제 시대의 토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백제의 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최근에 주로 답사한 임존성이나 금이성과도 축성법이 비슷한 것으로 봐도 고려 때 성으로 활용하기는 했겠지만 백제 시재 축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고려산성, 운주산성, 이성, 작성, 금이성이 연결되어 공주의 웅진성 부여의 사비성으로 연결되는 중요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라보면 전의에서 유구를 거쳐 공주로 통하는 주요 통로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고, 신라가 단양 충주를 넘어 이곳을 지나 서해로 통하거나, 보은 회인 청주를 거쳐 이곳을 지나 황해로 나아가 중국으로 통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요지이기도 한다. 당연히 신라가 백제를 범하려는 것을 막는 요새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산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도가 고려 때 보수하여 성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하면 맞지 않을까?


사실 따지고 보면 천안에서 전의 조치원 대전 전주 목표로 가는 1번 국도보다 천안삼거리에서  전의를 지나 연기, 유구, 공주로 통하는 도로가 예전에는 더 중요한 도로였을 것이다. 1번 국도는 현대에 들어와서 새로 난 도로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이 등마루를 타고 이어지는 산성들의 역할을 눈에 보듯 훤하게 짐작이 가는 것이다.


산성을 한 바퀴돌아 남쪽으로 나시 나오니 치성처럼 남쪽으로 툭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하였다. 분명 여기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치성을 쌓은 것이라 생각되었다. 산 아래에서 사방으로 공격하는 적을 방어하기 좋고 멀리 유구로 향하는 도로를 전망하기에도 좋아 보였다. 그 부분에서 많은 고와편을 발견하였다. 가만히 보니까 주변이 온통 와편이 널려 있었다. 와편은 꽤 큰 것도 있고 아주 작은 것도 있다. 또 회색도 있고 붉은 색도 있다. 아마도 회색과 붉은 색은 건축의 시대가 다를 것이다. 이것으로 봐서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필요한 대로 재건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들머리로 돌아와 이번에는 가운데 높은 망대로 올라가 보았다. 여러가지 표지석이 있는데 주로 전의 이씨 시조인 이도에 관한 것이고 가장 높은 곳은 정자가 있던 자리라는 표지석이 있다.높은 봉우리도 아닌데 이 자리에서 사방을 다 조망할 수 있었다.


백제시대의 산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정말로 우리 문화의 자랑이다. 산성에 대하여 사람마다 다 설이 많은 것은 그 세월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백제시대 쌓은 산성을 통일 신라에서도 썼을 테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도 썼을 것이다. 그 때마다 소용 닿는대로 성를 고쳐 쌓기도 하고 건물을 고쳐 짓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너진 곳을 다시 보수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시대가 변하는 것에 따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나 소용이 흔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야기나 생활의 양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전의 이씨 전설도 여기에 묻어 있는 하나의 생활 문화이고 소중한 우리의 자산인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소중한 우리 역사 문화의 보물이다.


나는 오늘 소중한 답사를 하나 마쳤다. 오기전에는 이성은 별 것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와서 보니 절대 빠뜨려서는 안되는 충청산성의 답사 코스였다. 많은 생각을 하면서 작성을 향하여 임도로 내려왔다.


임도에서 올려다본 이성

이성의 들머리

전의 이씨 시조인 이도가 살았다는 건물지

흙에 묻혀 토성처럼 변해버린 성벽

무너져 잡초더미에 묻힌 성벽- 그 높이를 짐작할 만하다.

축성의 방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도가 살았던 건물지 표지석

세종시에서 세운 이성 안내판

무너진 성석

건물지

여기저기 널려있는 와편


치성처럼 남쪽으로 툭 튀어 나온 곳

와편

성벽

남쪽으로 돌출된 부분

성의 중앙 봉우리 망대가 있던 곳- 전의이씨들의 표지석

표지석

장정지



2. 작성鵲城


▣ 위치 : 세종시 전동면 송성리

▣ 규모 : 높이  2~5m, 동·서 7m, 남·북은 8m정도의 규모이어서 성이라기보다는 보루였을 가능성이 있음 

▣ 시대 : 백제시대


작성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임도 걸어 대전가톨릭대학교 뒷산을 올라 갔다. 산이 좀 가파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가톨릭 묘지라고 하는 하늘묘지를 지나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노라니 대학교 건물이 보이고 주변의 산야가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작성에 올랐다.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나무에 작성산이라는 표찰만 붙어 있었다. 아주 작은 성은 무너져 돌이 여기저기 구른다. 그러나 돌에서 다듬은 흔적이 보이므로 분명 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소중한 요새로 쓰였음이 분명하다. 어느 문헌에는 봉수대였다고 했지만 붕수대로 보기는 주변 산봉우리에 비에 너무 낮다. 분명 보루였을 것이다. 현대 군대 규모로 본다면 1개분대 정도가 주둔한 보루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에서 이성과 금이성 사이의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금이성에서 이곳으로 파견을 나오든지 이성에서 이곳으로 파견을 나와 근무하면서 이성과 금이성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주변을 관찰하였을 것이다. 마치 첨병부대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의 형태는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이 주변의 돌을 주워 모아 다시 성처럼 쌓은 흔적이 보였다. 잘못하면 옛날의 성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 사람들이 어떤 목적인지는 몰라도 다시 쌓은 것이다. 그러면 고려산성이세 금이성을 거쳐 공주까지 가는 동안 수많은 보루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것도 발굴을 통하여 세상에 알리고 보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작성산 정상의 무너진 성터


성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

이것은 최근에 누군가 새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흔적


이것도 다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작성산에서 잠시 쉬면서 물을 마셨다. 이선생님이 떡을 두덩이 가져오고 따끈한 차를 내놓았다. 나는 사과 한덩이를 가져 왔다. 점심때가 다 되었는데 이것으로 시장기를 달랜다. 떡을 꼭꼭 씹어 달게 먹고 사과를 반으로 딱 갈라서 나누어 먹었다. 간식을 먹으면서 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성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그동안 다니면서 본 백제의 성과 사찰에 얽힌 백제 부흥사에 관해 각나는 대로 이야기 했다. 자꾸 다니면 조금식 눈에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금이성으로 가는 길은 아주 순하고 평탄했다. 산길을 걷다가 임도를 거쳐 금이성 표지판을 보고 통나무를 잘라서 놓은 계단을 올라갔다. 날씨가 많이 더워졌다.



3. 금이성 金伊城 


▣  위치 : 연기군 전의면 달전리, 전동면 송성리
규모 : 주장 714m, 높이3-10m, 폭2m, 높이(해발)430m
시대 : 고려시대(백제시대?)
문화재 지정 : 충청남도지정기념물 제78호(89년 12월 29일)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호


금이성은 비암사쪽에서 올라가서 답사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잡초가 무성해서 성의 윤곽을 다 보지 못했다. 잡초가 너무 많아 성을 한 바퀴 돌아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자 성 중앙 정자에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금이성 복원정비사업 문화재조사종입니다'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이 성을 복원하는구나 생각하니 반갑기도 하고 아쉬움도 있었다. 문화재를 조사하기 위해 성의 주변의 잡목과 잡초를 다 제거해서 성이 뚜렷하게 보였다. 잡초에 묻혀 있을 때보다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다시 한번 놀랐다. 높이 10m라고 하지만 무너진 성돌의 양으로 보아 10m도 훨씬 넘는 것으로 보였다. 정자가 있는 곳에서 성의 전체 모습을 조망하고 멀리 전의에서 공주로 향하는 길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산봉우리들 가운데 가장 놓은 산이 바로 이 금성산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멀리 천안과 전의현이 다 보인다. 세종시 금강 일대가 다 내려다 보이는 요새이다. 이 성에서 전의 향교 뒤의 토성까지 직선으로 약6km 정도이고, 고산산성(운주산성)에서 전의 향교 뒤의 토성까지도 6km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풍수상의 문제인지 전략상의 문제인지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예사로 보이는 젊은 남녀 두 사람이 나이 많은 인부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잡초와 나무뿌리를 제거하는가 본데 아마도 정밀 제거인지 아주 조심스럽게 나무뿌리와 풀뿌리를 건드리고 있었다. 며칠 후면 이곳이 발갛게 살만 남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주 알맞게 다시 온 것이다.


이선생님이 학예사 한 분에게 우리가 성을 조사할 것이 있으니 한 바퀴 돌아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쿡 웃음이 나왔다. '학예사 앞에서 우리가 무슨 성을 조사한 단 말인가' 그 사람도 생각없이 '그렇게 하시라.'고  허락한다. 나는 지난번에 왔을 대와 반대 방향으로 성을 돌았다. 성이 700m 가량 되기 때문에 한 참돌아야 할 것이다. 북쪽에서 동으로 돌아 내려 갔다.


성돌의 무더기가 그대로 성벽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지로 보이는 곳도 뚜렷하게 보였다. 이곳은 아마도 북문지가 아닌가 한다. 이 부근에 옛 성벽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축성의 방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돌은 너미 40~50cm, 두께 10~20cm 정도 되는 큰 돌을 다듬어서 쌓았다. 성의 안쪽과 바깥쪽은 정교하게 쌓고 가운데는 작은 돌을 집어 넣어 단단하게 다진 것으로 보인다. 북문지는 뚜렷하다. 여기서 돌아 동쪽으로 내려왔다. 여기는 경사가 급한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의 중간에 성벽이 없으면 포곡식 산성이 될 텐데 여기도 낮은 성벽이 있었다. 테메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시 성벽을 타고 남쪽 등성이로 올라갔다. 남문지가 있었을 법한 곳에 성벽은 안쪽으로 완벽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외부에도 성벽이 남아 있어 철책을 만들어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복원하는 사람들이 아마도 이 곳을 토대로 축성법을 연구하여 제대로 복원해 주리라고 믿는다. 오늘 금이성은 정말 잘 왔다. 하마트면 금이성의 본래 모습을 더 보지 못할 뻔 했다. 복원을 하면 아무래도 훼손되리라고 본다. 삼년산성처럼 아예 다시 쌓아버리면 어쩌나. 대전의 계족산성도 전혀 본래 모습이 아니다. 어쩌면 삼년산성과 계족산성츼 축성법이 똑 같을 수가 있을까? 빌고 또 빌건대 금이성 만큼은 원형대로 완전 고증을 거쳐 복원해 주기 바란다. 아니면 차라리 그냥 두는 것이 낫다. 운주산성도 복원부분은 남아 있는 부분과 전혀 다른 21세기 성쌓기 새로운 축성법으로 쌓았다. 제발 원형대로 해주기를 바라며 두번째 금이성에서 내려온다. 그래도 나는 사진을 자꾸 찍었다. 사진으로라도 남겨야 할 것이 아닌가?


임도에서 금이성 올라가는 나무 계단


금이성 정상 표지판

정상부분에서 남쪽으로 무너진 성벽

정상에서 남쪽 성곽의 모습

정상에서 북쪽 사면의 성곽 모습- 문화재 조사를 위하여 가림포장을 해 놓았다.

북문 부근의 성벽 비교적 낮은 편이다.

문지


문지 부근의  원형이 보존된 성벽-성벽의 가운데를 보면 축성의 방법을 알 수 있다.

무너진 성벽의 돌무더기로 보아 어마어마한 성의 높이와 규모를 알 수 있다.

동쪽 그릉 지대 성쌓기의 모습

남쪽 원형이 유지된 성의 내벽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된 성벽 내부

원형이 유지된 성벽 내부


원형이 보존된 성의 내벽- 그 규모가 집작된다

ㅅ성벽의 바깥쪽을 잘 다듬은 성돌의 모습

무너진 남쪽 성벽

원형이 유지된 성의 외벽-철책이 쳐 있다.


비암사로 오는 길은 잘 아는 길이다. 비탈길을 한참 내려와서 임도를 지나 비암산(지도에는 없지만 사람들이 비암산 뒷산을 그렇게 부른다)으로 오른다. 이곳은 길이 아주 부드럽고 좋다. 솔가리가 길에 쌓여 포근하다. 그런데 이성에서부터 계속 느낀 건데 가끔씩 길이 마구 파헤쳐진 곳이 있다. 처음에는 멧돼지 소행이려니 했는데 살펴보니 산악 오토바이가 훼손한 것이다. 비탈길은 더욱 심하다. 그래서 대전가톨릭대학교 뒤쪽에 산악 오토바이를 고발한다는 표지판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이제서 들었다. 산을 아낄 줄 모르는 무식한 현대인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은 바로 길을 그렇게 만들어버린다. 순한 사람들이 지나간 길은 순하게 남는데 이런 상식없는 사람들이 지나간 길은 이렇게 상식 밖의 모습으로 남는다. 기막히다. 지난 주에 충청매일에 기고한 글의 내용을 여기서 확인한다. 비단처럼 고왔던 오솔길의 훼손은 비암사 바로 뒤에 임도까지 이어졌다. 오토바이를 임도에서만 타도 되는데 왜 산으로 기어 올랐을까?


비암사로 오는 좋은 길이 아쉽다.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거치는 동안 한 봉우리를 지날 때 이 선생님이 '저건 성이 아닐까'하면서 손가락으로 알려 준다. 아 그건 성이었다. 무너진 성이었다. 비슷한 크기의 성돌이 여기저기 굴러 있다. 정과 망치로 다듬은 흔적이 역력하다. 여기에 알려지지 않은 보루가 또 하나 있구나. 아마도 연기면 진의리 뒷산에 둘레 약 1200m의 진의리 산성(테메식 산성)과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금이성에서 진의리 산성으로 연결하는 보루일 것이라 생각도 해 보았다. 이 성은 둘러보니 작성보다 규모가 더 커보인다. 어느 문헌에도 나와 있지 않다.


비암사는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참 아름답다. 연기지역의 백제 유민들이 부흥군의 한 많은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는 조용한 이 사찰에서 영령들이 고요하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을 것이다. 이 선생님은 비암사에 처음 와 보는 듯 감탄을 연발했다.


비암사 오는 도중의 보루-차라리 작성보다 더 규모가 커보인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비암사


비암사에서 내 차를 타고 송성리에 가서 이 선생님 차를 회수하여 고복저수지 도가네 메기매운탕으로 갔다. 3시 30분이다. 그렇게 북적이던 식당이 한가하다. 오늘은 정말 이 집 메기매운탕을 먹어볼 수 있겠구나. 둘 다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술은 마시지 않았다. 매운탕 한 냄비와 밥 한 공기를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하고 다음의 좋은 약속까지 하고서 여기서 헤어졌다.


지금까지 옛 연기 지역의 전의면 전동면 연서면에 걸쳐 있는 산성을 답사했다.

백제는 475년 웅진 천도 이후 많은 산성을 쌓아서 대전 충청 지방에만 200여 개의 성을 가진 산성의 나라이다. 특히 고구려, 신라 등 삼국과 접하는 국경 지역인 천안에서 세종시 일대에 운주산성을 비롯하여 전의 향교 뒤의 토성土城이성離城작성鵲城금이성金伊城 15개 이상의 산성을 조밀하게 세웠다.

전동면 3개 마을과 전의면 2개 마을에 걸쳐 있는 운주산雲住山은 높이 460m로 구름이 머물다 가는 산이라 이름이 붙었다. 운주산에는 3개 봉우리마다 성터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 성을 뭉뚱그려서 운주산성 혹은 고산산성이라고 하지만, 조선 중기에 펴낸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8권 전의현조에서는 전의에는 3개의 산이 있는데, 동쪽에 고산高山)은 현의 8리쯤에 있고, 남쪽에 운주산이 현의 7리쯤에, 북쪽 5리쯤에 있는 증산甑山과 함께 솥의 세 다리처럼 세 봉우리를 이루는 전의현의 진산이다고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즉 지금의 운주산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산이고, 운주산은 금성산金城山이다.

신라의 진흥왕이 새재를 넘어 충주며 경기도 일대를 차지하여 황해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뱃길을 확보하고, 후에 삼국통일의 주역인 가야왕족의 후손 김유신 아버지를 진천에 이주시켜서 고구려, 백제와의 국경지역을 맡긴 것을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진흥왕과의 쟁패는 옥천지방에서 극심했는데 여기서 결국 성왕이 전사함으로써 신라와 백제의 다툼은 신라 쪽으로 그 기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오늘 약 4시간 30분에 걸쳐 이 산성의 등마루를 밟으며 부근의 산성의 위치와 쓸모에 대해 흐릿하게나마 윤곽을 잡게 되었다. 나머지 세세한 사항은 살아가면서 천천히 알아보기로 한다.

(2016.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