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공산성 답사
충남 공주시 공산성 답사
▣ 2015년 12월 6일 오후
▣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
▣ 포곡식 석축 산성
▣ 설명
[개설]
금강변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동쪽과 서쪽에 보조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흙으로 쌓은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돌로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진남루(鎭南樓)·공북루(拱北樓) 등의 남문·북문은 남아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았다. 적에게 보이지 않게 누각없이 만든 암문(暗門),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 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도 남아 있다.
[내용]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문주왕 이후 성왕 이전까지 수도 웅진(熊津)을 수비하기 위하여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城柵)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2.2㎞ 정도인데, 돌로 쌓은 부분이 약 1.81㎞이고, 흙으로 쌓은 성벽은 약 390m이다. 성벽은 2중으로 축조되었지만, 만하루(挽河樓)터 주변에는 동성왕이 쌓았다고 전하는 무너진 성벽이 있어서 모두 3중으로 축조된 셈이다. 이것은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 북쪽의 영은사(靈隱寺) 밖에도 높이 7.4m, 길이 43m의 성벽이 2중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돌 홈통인 석루조(石漏槽) 2개가 있고, 그 위에는 너비 2m의 수구문과 문의 주춧돌 2개가 남아 있다.
흙으로 쌓은 성벽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에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높이와 너비는 일정하지 않은데, 대체로 높이는 1m이고, 너비는 아랫부분이 8.5m, 윗부분이 3m이다. 성 안에는 깊이 약 2m의 호(壕)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가운데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다만 일부는 속을 다지고 겉을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구간도 있다. 협축으로 쌓은 성벽의 윗부분 너비는 약 0.7m 정도이며, 안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백회를 발랐다. 진남루 주변에 사용된 돌은주로 긴 네모꼴이나 네면이 같은 네모꼴인데 반해, 영은사 밖에 사용된 돌은 비교적 큰 편이다.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산성의 주문(主門)은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이다. 진남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누각이며, 공북루는 1603년(선조 36)에 옛 망북루(望北樓)터에 세운 것으로 고주(高柱)를 사용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다락집이다. 서문은 1975년에 보수공사하였을 때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의 크기를 확인하였지만 받침 부분만 복원되었고, 동문도 발굴 결과 길이 6.45m, 너비 2.46m였음이 확인되었다.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동문은 서문·남문·북문처럼 2층이었으며, 동쪽 외곽의 토성에도 약 4m 크기의 문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0년에 발굴조사한 결과, 만하루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이며, 임류각(臨流閣)은 백제 때 세운 건물이지만 파괴된 뒤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장대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적심석만 남은 상태로,주변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그 뒤 1983년에도 조사되었는데, 길이 10.23m, 높이 1.67m, 너비 13∼0.8m의 암문이 발견되었다. 현재 성 안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를 비롯하여 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쌍수산정주필사적비(雙樹山亭駐蹕事蹟碑)·주춧돌·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곧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거처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뒤 822년(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이 일으켰던 반란은 이곳에서 진압되었고, 1623년에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잠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한민족대백과사전-
금강과 공주대학교 부근의 저녁풍경
공주 공산성내 유적 배치도
공산성은 그 앞으로 수없이 지나다녔는데도 한 번도 올라가 보지 않았다. 한 때 백제의 수도였으니 우리의 수도였던 고도의 아름다운 성곽을 한번도 올라가 보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럽다. 더구나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말이다.
겨울답지 않은 날씨, 한가로운 오후 카메라 가방만 하나 가지고 공주로 출발했다. 공산성에 대한 사전 지식에 대한 관심도 없다. 내가 사는 청주에서 가깝다는 것은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아는데도 말이다. 집에서 출발하여 공업단디 뒷길로 달렸다. 오송에 이르러 세종시로 가는 새로운 도로를 달려 세종시에서 공주로 직행하였다. 공산성 주차장에 차를 대는 일은 그ㄹㅎ게 어렵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 주차장이 만원이다. 차를 타고 한 바퀴돌고 나서야 빈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차를 세우고 들어가려니 매표소에서 관람료를 받았다.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길에서 보면 금서루錦西樓가 바로 보이고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벽이 보였다.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비석이 늘어서 있다. 대부분이 조선시대 공주의 지방관리들의 선정비, 덕을 쌓은 분들의 영세 불망비였다. 공주와 관련되는 인물들의 불망비를 관아가 아닌 성곽 앞에 세워 놓은 것은 이곳이 사람들이 많이 오기 때문일 것이다.
바람이 잔잔하고 볕이 따스하다. 금서루 아래는 서문일 것이다. 바로 금서루로 오르는 길이 있으나 문을 통해서 들어가기로 했다. 밖에서 보는 성은 비교적 높고 견고해 보였다. 보수의 흔적이 보이기는 했지만 성의 원형을 살려 보수하여 흉하지 않았다. 성석은 매우 크고 견고해 보였다. 자연석을 사각형으로 다듬었는데 그 모양과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다.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도 조금도 빈틈없이 견고해 보였다. 상당산성은 대리석으로 일정하게 깎아 축성한 것에 비하여 더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보였다. 문을 들어가면서 천정을 보면서 놀랐다. 밖에서 볼 때는 문 위에 돌을 높게 쌓아 문루에서 성문으로 들어오는 적을 어떻게 처리하나 했는데 문위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마루로 처리했고 거기에 그림을 그렸으며 안쪽 성벽에 성을 안내하는 안내 표지판도 있다. 밖에서 보면 정문 위에 누각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하나 더 있다.
문으로 들어가서 성곽을 한 바퀴 돌기로 마음 먹었다. 왼쪽으로 가면 북으로 도는 것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남쪽으로 동쪽으로 한 바퀴도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기로 했다. 어린이로부터 젊은이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산책하는 시민들이 많다.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은 없다. 특이 젊은 연인들이 많이 온 것 같다. 연인들이 성곽길 산책을 하면서 데이트를 하는 것이 특이해 보였다.
약간 비탈길을 올라서 금서루를 가까이서 찍었다. 상당산성의 공남문보다는 작았지만 규모가 꽤 컸다. 상당산성 공남문과 다른 점은 누각을 돌로 둘러싸서 누각안에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각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성벽이 견고해 보였다. 바위 때가 묻어 고색창연하다. 한참 오르막길이다. 오르막길에 오르자 북으로 앞으로 한바퀴돌아서 내려올 성곽이 한 눈에 보였다. 금서루를 지나 봉우리에 있는 공산성 전망대와 그 너머 금강과 공주의 신시가지가 눈에 들어 왔다. 1500년을 넘어 과거와 현대를 한 눈에 보는 것이다. 1500년 전의 문화는 아무것도 없는 미국인이 와서 이 정경을 보면 얼마나 놀랄 일인가.
금서루로 올라가는 길- 비석과 누각 성벽이 한 눈에 보인다.
안에서 본 금서루
서쪽 성곽 위에서 본 금서루
남쪽으로 벋은 성곽길에 올라섰다. 여기서는 공주의 구시가지가 다 보인다. 노란 깃발이 펄럭인다. 깃발을 자세히 보니 호랑이 그림이다. 깃을 하얀색으로 둘렀으니 서백호이다. 북에 등을 두고 남을 바라보면 우백호(서), 좌청룡(동) 남주작 북현무이다. 펄럭이는 호랑이 그림이 나를 과거로 끌어당기는 기분이다. 금방이라도 백제 동성왕의 행차가 나오든지 금서루앞에서 근위병의 교대식이 있을 것만 같다.
성곽은 금서루가 있는 곳처럼 자연석을 네모나게 다듬어서 쌓았다. 그런데 역시 그 크기가 일정하지는 않았다. 성곽은 바깥쪽은 축대처럼 아랫부분을 더 두껍게 쌓고 그 위에 두 자쯤 줄여서 담장처럼 쌓아 올렸다. 안쪽은 흙으로 채워 마무리했다. 역시 보수한 흔적은 보이지만 옛모습 그대로이다. 성곽 위에는 따로 길을 내어 사람들이 산책하기 좋게 하였다. 길은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남녀가 팔짱을 끼는 손을 잡고 갈 수 있는 넓이는 되었다. 그렇다면 백제 시대에도 사람들이 왕래하기에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성곽 주변에는 참나무나 소나무가 많다. 바깥쪽으로는 길을 낼 수 없을 만큼 경사가 크고 안쪽으로는 완만해서 성 어디서든지 성내로 통하기는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데나 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니기 좋은 곳에 길이 나 있었다. 때로 안쪽으로도 경사가 급한 곳이 있어서 축성의 방법도 바깥쪽처럼 기단과 상단이 부분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래쪽의 너비와 위쪽의 너비가 차이가 많이 난다.
왕궁지에 올랐다. 너른 빈터가 있고 건물지가 여기 저기 있다. 이곳이 공산성의 요지인 것으로 보인다. 쌍수정이 있고 왕궁지가 있다. 바로 앞에 연지도 있다. 쌍수정 옆에는 아직도 나무들이 버티고 있다. 어떤 나무가 있어 쌍수정이라 했을까?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 나무에 벼슬을 내렸다고 하여 그 때부터 쌍수정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이괄의 난 때 인조도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인절미라는 떡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왕궁지는 그리 크지는 않으나 이곳에 피난해 온 왕들이 충분히 머물 수 있었을 것 같다. 또한 이곳에서 송산리 고분군이 그대로 보인다 하니 명승이라고 할 만하다. 연지는 원형으로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 갈수록 점점 넓혀가면서 돌로 쌓았는데 꽤 많은 양의 물을 보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리 중에 이곳에 피해 있는 왕은 사방이 다 보여 조망할 수는 있겠지만 마음이야 편할 수가 있을까? 사람들은 전쟁이란 걸 만들어 놓고 사실은 불필요한 일에 국력을 낭비하는 바보짓을 했을까. 공평하게 구획을 정해 놓고 그냥 편안하게 행복만을 추구하면서 살면 옛사람도 훨씬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성곽을 쌓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이 필요했을까. 오늘은 웬지 문화에 대한 자부심보다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숙연해진다.
성곽 위로 잘 나 있는 산책 길
왕궁지 옆 연지
쌍수정
공산성 깃발에 대한 안내판
왕궁지에서 성벽은 조금 비탈진 아래로 내려간다. 여기가 곧진남루이다. 시내에서 올라오는 계단 길이 이 문루 아래 문으로 통한다. 누각은 규모가 작다. 바로 성내로 통하는 큰 길이 있다. 여기서 바로 가파게 타고 오르면 연등루 공북루에 이르게 된다. 영등루로 오르면서 남쪽을 보면 토축산성 위에 석축 산성을 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토성 위에 쌓은 석성이다가 토성으로 된 겹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이 축성 방법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잘 알지는 못해도 이 부분에서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토성 위에 나무 계단을 밟고 올랐다. 여기는 돌로 쌓은 곳처럼 아랫부분을 쌓고 조금 들여서 윗 부분을 따로 쌓아 올려서 성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리고 그 옛날에 토성을 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흙이 필요 했고 그 많은 흙을 어떻게 다 옮겨 왔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광북루에 올르니 마루에 임류각이 있고 명국 삼장비가 있다. 이곳에서 강을 건너 공주대학교 부근이 보인다. 이제 북으로 비탈길을 내려간다. 해가 서산에 지는지 이곳은 어둑하다. 사람들이 반대쪽에서 이곳으로 올라온다. 숲은 울창하다. 내리막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경사가 급한 곳을 계단을 밟고 천천히 내려가니 바로 연지 만하루이다, 만하루 아래 연지가 있다. 이곳은 성안의 물이 강으로 빠지기도 하고 강의 물이 성안으로 들어오기도 하도록 되어 있다. 만하루는 전망대나 보루라기보다 강가에서 풍광을 즐기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전쟁 중에도 영웅들은 여인을 끼고 술을 마신 것이 옛 사람이 아닌가? 그래야 또 영웅 호걸이라는 칭송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만하루 에서 바로 영은사라는 사찰로 통한다. 영은사는 스님이 있는지 조용하다. 절집 앞에는 은행나무가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은행을 땅바닥에 쏟아 놓았다. 냄새가 지독하다. 영은사에서 쌍수교를 거쳐 바로 진남루로 통하는 도로가 있었다.
나는 공북루 앞에는 넓게 지표조사를 하는 곳이 있었다. 공북루라는 이름은 북을 우러러 임금께 예를 표하는 곳이라 한다면 백제 당시에 지어진 이름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조선시대 쯤에 지어진 이름으로 생각되었다. 여기서는 ㅂ기 좋게 북이 탁 트인 곳에 있었다. 누각이 다른 곳보다 더 규모가 크다. 그러나 오래된 건물 같지는 않았다. 이곳에 경치가 아주 빼어났다. 여기서 공산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그러나 거리가 매우 짧다.
전망대에서는 공산성이 한눈에 보일 것 같다. 여기서 금서루와 관광안내소 주차장이 다 보인다. 그리고 금강을 중심으로 나뉜 공주의 구시지와 신시가지가 다 보인다. 공주시는 조용한 교육도시이다. 이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모두 점잖고 겸손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토축산성의 모습
토성의 모습
동쪽 성곽위의 청룡 깃발
북쪽 성곽 위의 흑현무의 모습
만하루 연지 금강 공주 시가지 노을을 반사하는 건물이 아름답다
공북루에서 공산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
공북루 앞 지표조사 하는 곳
전망대 올라가면서 공주대학교 부근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시가지와 금강의 모습이 아름답다. 저녁 노을에 흐르는 물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물에 잠긴 고층 건물과 산의 모습이 기막히다. 옛사람들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맨날 전쟁만 한 것도 아닐 텐데 그래도 날마다 이곳을 지키기는 지켰을 것이다. 여기서 근무하면서 시내를 내려다 보았을 것이다. 왕궁은 어디에 있었을까? 공산성 왕궁터가 높은 곳이 왕구이었을까? 아니면 피난처였을까? 알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아마도 저 아래 강가 기름진 땅에 궁궐을 짓고 마을에는 벼슬아치들이 살림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아낙들이 쌀 씻어 밥짓고 우물 파서 물마시며 살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 성은 아무나 드나들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을 부러워했고 근대 개화기에는 한강을 건너야 서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강남에 살아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한다. 옛날 이곳에서는 공산성 앞에 사는 사람이 대세였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거기 사나 여기 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루 세끼 먹고 자식 낳아 기르며 사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다.
돌아오는 길 주차장 볕이 더 따사롭고 강을 건너 새 서울인 세종시를 지나 청주로 들어서는 발길이 무겁다. 백제가 서울을 위례에서 공주로 옮겼듯이 오늘 서울을 한양에서 공주와 연기로 옮겨 세종이라 이름지었다.
(2015년 1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