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버드나무의 변명
늙은 버드나무의 변명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걸 이제 알았다. 아, 그렇구나. 사랑은 울렁거림이었구나. 사랑은 떨림이었구나. 사랑은 설렘이라는 말은 그래서였구나. 아니 사랑은 정녕 때늦은 깨달음이구나.
제 1일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과 만나 저녁을 먹었다. 그녀와의 만남을 기다리며 설레었는데 우리는 사뭇 말이 없었다. 아니, 말은 많았지만 이야기가 없었다. 무의미한 말을 주고받으며 질긴 고기를 씹었다. 밖은 비가 내리고 손님도 없는 홀은 어두침침했다. 비 내리는 날의 토방처럼 음습한 분위기였다. 날이 음습하면 고기도 질기구나.
‘우중충한 자리’ 그 자리에 앉아 우리는 도리어 건조한 대화를 의미 없이 나누고 일어섰다. 나오는 문을 열면 바로 비탈길인데다가 커다란 개가 비를 맞으며 지키고 있었다. 개 때문인지 어둠 속에서 그녀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덜컹’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넘어지는 순간 잡아주지 못한 나를 안으로 꾸짖었다. 그리고 곧 약속을 잡아 놓고 설레면서 어리석음이라던 자책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이다.
제 2일
그녀와 점심 약속을 했다. 내가 왜 고향집 근처에 있는 찻집을 말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친구인데……. 찻집에서 특별히 차려내는 사찰 음식인 연밥을 먹기로 했다. 찻집 마당에 깔린 잔디가 노랗게 봄볕을 쬐고 있다. 마른 잔디에서 반사되는 볕이 따사롭다. 노릇노릇한 잔디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디딤돌이 있는데도 일부러 잔디를 밟아 본다. 유행이 지난 구두의 두둑한 굽이 봄을 밟는다. 찻집 하얀 건물이 뒷산 소나무에 조화롭다.
내가 왜 거기서 허둥댔을까? 출입문 유리에 온몸을 부딪쳤다. 이미 아무런 울렁거림도 없는데 말이다. 막상 만나고 나니 그녀와 만날 시간을 정하고 그 시간을 기다릴 때만큼의 울렁거림도 설렘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유리문을 보지 못하고 전신을 부딪치는 바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주 조심스럽고 교양 있어 보이는 동작으로 연잎을 펼쳤다. 보드라운 영양밥을 게걸스럽게 먹을 수 있는데도 아주 조심해서 젓가락으로 한 알 한 알 집었다. 이렇게 할 게 아니다. 우리는 친구 아닌가? 나는 미역국을 ‘후루룩’ 소리까지 내며 마셨다. 미역 줄거리를 입술을 넘어 턱까지 늘어뜨리며 질겅질겅 씹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그렇게 벽을 허무는 거야. 아니 우리에겐 본래부터 벽은 있지도 않았잖아.
“여기가 내 고향 마을이야.”
사십 년 전 어느 가을날, 수렁논에서 벼를 베다가 갑자기 찾아온 그녀를 맞았던 기억을 불러내었다. 그 때 나는 진흙투성이 무릎이 창피했는데, 그녀는 ‘이야, 너 참 멋있다.’하며 소릴 질렀다. 아버지를 쳐다봤다. 정말 창피해서 어쩔 줄 몰랐다. 아버지에게 창피한 것은 그녀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그녀에 비해 너무 초라한 나였다.
“난 통 기억이 안 나.”
그녀의 말은 반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니 틀림없이 반어일 것이다.
연잎에 붙은 밥알을 알갱이까지 떼어 먹고 호수가 보이는 커피숍으로 갔다. 나는 주인의 솜씨를 보려고 커피라떼coffee latte를 주문했다. 커피라떼를 주문할 때마다 버릇처럼 하던 ‘왜 우유커피라고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잊어버렸다. 주인은 작은 측백나무 그림을 그려 내왔다. ‘예전에는 꼭 비엔나커피vienna coffee를 마셨지 않아?’ 하고 혼잣말처럼 묻는 그는 무슨 차를 마셨는지 잊어버렸다.
차를 마시며 갑자기 그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왜 거기쯤에서 멈추었을까?”
놀랐다. 너무 놀랐다. 말끝마다 ‘우리는 친구야. 우정은 어디쯤에서든 멈출 줄 알아야 해.’라며 선을 진하게 긋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멈추지 않았으면? 어디까지 갔어야 해? 왜 이제 그게 궁금할까?”
“나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친구들이 물어보던데. 그래서 나도 궁금해졌어.”
친구? 친구가 물어 왔다고? 의문을 갖으며 듣고 보니 내게도 우리가 멈추어버린 까닭을 궁금해 하는 선배가 있었다.
“글쎄 왜? 친구들이 내게도 그걸 물어 보던데. 그럼 우리가 어디까지 갔어야 했지? 그만큼 좋아했나?”
나는 참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 ‘사랑했나.’라고 왜 못하고 ‘좋아했나.’라고 말했을까?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난 여전히 바보였다. ‘우리는 깨닫지 못한 사랑을 친구들은 알았나 봐.’하는 말이 목구멍에서 자벌레처럼 고물고물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밀어버렸다. 옆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며 우리를 바라보던 다른 친구가 편지 얘기를 꺼냈다.
“그 편지는? 절절했던 너희들 편지 말이야. 매주 한두 통씩 오고 갔다던”
‘절절했던’이란 수식어가 눈언저리에서 화끈거리더니 여민 옷깃을 헤집고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등골이 근질근질했다.
“이사할 때 불태웠어. 아이들이…….”
‘아이들이’하고 덧붙인 말은 주워 담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두었으면 작품인데’ 하며 변명을 덧붙였다. ‘태워버리길 잘했지 뭐.’ 그가 말했다. 그는 '우리는 친구니까'라는 말은 생략했다. 그래 맞아 태워버리길 잘했어. 나의 솔직한 반어였다. 빨강색 원고지를 세워 검은 만년필로 쓴 우수어린 그녀의 말 조각들이 떠올랐다. 내가 두메에서 근무했던 6년간 그녀에게 받은 한 부대쯤 되는 편지다. 그녀의 편지가 심어주는 설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 미쳐버리든지 수인囚人이 담을 넘어 탈옥하듯 고개를 넘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우린 그냥 좋은 친구였어. 좋은 친구랑 손잡고 화려한 카펫 위를 걷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어. 아마 우린 둘 다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는 이렇게 사십 년 전 말을 되풀이했다.
“맞아, 나도 그냥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지. 남녀 간에 친구가 어딨냐고 하면 여기 있다고 나설 수 있을 만큼 그런 친구였어.”
나도 이렇게 너무나 뻔한 거짓말을 했다. 그나 나나 말 꼬랑지는 항상 씁쓸했다. 함께 간 친구가 씁쓸함을 확인해 주었다.
“남들은 다 사랑으로 아는데 너희는 멈추어버린 까닭이 친구들은 궁금했겠지.”
‘정말 왜 궁금할까? 왜 남들은 우리 일을 궁금해 할까?’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이 바보들아’하는 꾸짖음으로 들렸다.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우리는 좋아한 것이지 사랑은 아니었다. 그와 만나서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실 땐 울렁거림도 없고 떨림도 없지 않았는가? 맞아, 우리는 사랑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사랑을 말로만으로 끝내는 바보는 없다. 사랑은 어떤 두려운 벽도 넘을 수 있다. 사랑은 소나기 같이 오는 것이라 가르쳐 주거나 깨닫거나 할 겨를도 없이 모든 가치보다 우선해서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자존심을 앞세운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이다. 만해卍海처럼 조국에 대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은 ‘그칠 줄 모르는 사랑의 노래’로 광복을 이루는 에너지가 되었을 것이다. 나라이든 개인이든 사랑을 깨닫는 순간 그것은 역사를 익혀내는 에너지로 치솟는다. 우리는 그냥 친구였다. 우리는 열병처럼 앓아보지도 않았다. 난 ‘그녀’를 애써 ‘그’라고 말하지 않는가? 대학 시절 그리고 젊은 날에는 우리는 그냥 친구였다. 사랑을 모르는 다만 친구였다.
제 3일
그가 점심을 사겠다고 카톡을 보내왔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그녀의 이름을 대하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나는 셋이서 한 시간쯤 걷고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답을 보냈다. 다들 좋아했다. 만남을 약속하는 순간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기다림은 곧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녀를 만나는 일이 설레고 울렁거렸다. 스물두 살 때처럼 가슴이 떨린다. 왜 그러지. 바보처럼…….
참 궁금하다. 왜 그 젊은 나이에 그녀를 좋아하면서 ‘좋아한다’라고 말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 말하지 못했을까? 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 말이 나의 자존심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거라는 두려움에 갇혀 있었을까.
‘사랑이라 말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라던 만해의 말에 속았을까? ‘사랑이라고 말하는 순간 사랑은 불처럼 일어나서 더욱 뜨거워집니다.’ 라고 맞설 줄은 왜 몰랐을까? 어느 록rock의 가사처럼 ‘love is touch’ 란 단순한 진리를 왜 깨닫지 못했을까? 맞아, 사랑을 생각지도 못했다는 것은 나의 거짓말일거야. 그녀와 만남을 약속하는 순간 난 설레고 울렁거리고 떨림이 있었잖아. 이번에는 정말 까닭을 확인하리라.
호수에는 봄이 이미 와 있었다. 우리는 어떤 순진한 처녀가 등잔을 들고 선비를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 때문에 ‘등잔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호숫가를 걸었다. 호수에는 물오리들이 자맥질을 하고 수양버들 늘어진 가지는 연두색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봄은 연두색으로 다가오는가 보다.
호숫가 잔도를 걸으며 그를 바라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울렁거림도 설렘도 없다. 떨림은 더더구나 없다. 아 우리는 친구구나.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었구나. 보이지 않는 먼 곳에서 생각 속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그리고 그녀의 이름자를 들었을 때나 눈에 띄었을 때, 그녀는 떨림으로 내게 왔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아니 그렇게 복잡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 추억 속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사랑으로 나를 울렁거리게 했다. 그가 지금처럼 손을 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을 때 우리는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만큼 편안해진다.
드디어 답을 찾았다. 우리가 사랑으로 불붙지 못한 이유를 말이다. 우리는 둘 다 바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바보였기 때문이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사랑한다.’라고 말이라도 해보는 용기를 내지 못한 바보였기 때문이다. ‘love is touch, love is touch’를 노래할 줄 모르는 멍청이였기 때문이다. 사랑을 친구라는 말의 가리개로 자꾸 자꾸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졌다. 떨림도 울렁거림도 잊었다. 이제는 이성의 차가운 그림이 그려진 ‘나이’라는 병풍이 모든 걸 가려 버린 것이다. 편안한 거리에 있는 그가 고맙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깊은 사랑은 사랑을 잊어버리는 깊은 나이가 되어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이구나. 첫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밑동이 호수에 잠긴 채 연두색 가지에 싹을 틔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매콤한 오징어볶음정식을 먹었다. 그녀는 내게 내 밥보다 한 술쯤 더 많은 자기의 밥과 바꾸어 주었다. 나는 그것이 아무리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그녀의 사랑의 기억이 아니라 다만 우정일 뿐이라고 변명하려 무진 애를 썼다.
(2015.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