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이방주 2015. 3. 23. 07:18

쌀 한 가마

 

 

청주 서원구 죽림초등학교 앞에 가면 죽림동 월천마을 유래비가 있다. 주택공사에서 아파트를 짓기 전에 방앗간이 있던 바로 그 자리이다. 이 유래비문을 쓰면서 나는 그 앞을 걸어 학교를 다니던 8년을 생각했다. 지금도 고향 다니는 길에 유래비 앞에 서면 옛날 생각이 난다. 방앗간 마당은 아주 넓고 늘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마당 한편에는 소달구지가 있고 커다란 황소가 달구지 옆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꼬리로 툭툭파리를 날리며……. 방앗간 앞 냇물은 마당 가까운 보에서 한번 머물렀다 흘러 물소리가 시원했다. 거기에 방천길가에 커다란 양버즘나무가 있었다. 누군가 앉을개를 놓아서 시오리 하굣길에 잠시 앉아 쉬어가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 살, 그 시절에도 보릿고개에는 쌀이 귀했다. 방앗간 마당을 돌아 막 양버즘나무 아래 앉아 쉬려 할 때였다. 방앗간 문 앞 지게에 쌀인지 한 가마를 얹어 놓고 한씨 청년과 담배를 피우던 일가 청년 하나가 나를 불렀다. 나이는 나보다 열 살쯤 많지만 손항孫行이라 나를 대부大夫라고 부르는 나이 때를 벗지 못한 꾀돌이이다. 그러나 머리가 좋아 온갖 지혜가 가득해서 있는 집안에 태어났더라면 한 자리 톡톡히 해먹었을 사람이다.

대부! 이리 좀 와 봐유. 잠깐만 와 봐유.”

왜유?”

잠깐이면 된다는 말에 방앗간 마당으로 걸어갔다. 또 무슨 장난으로 날 골탕 먹이려나. 그런 우려를 하면서도 그의 장난 밑바탕에는 늘 우리가 일가라는 정서를 담고 있어서 안심은 되었다. 둘 다 나의 중형仲兄 친구들이다.

대부! 지게질 잘 한다매유? 동네 소문이 났는디 쌀을 한 가마씩 지고 서당까지 올라간다면서유.”

서당이란 서당이 있던 우리집을 말한다. 세월이 지났지만 동네 사람들은 우리집을 다 서당이라고 불렀다. 그는 종가집인 우리 집까지 우마차가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놀리고 있는 것이다. 방아를 찧어 달구지에 실어다 작은댁 마당에 부려놓으면, 큰형님을 도와 쌀을 한 가마씩 나누어 짊어지고 한 마장 쯤 되는 고갯길을 올라가야 한다. 그걸 놀리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형님을 돕는 어린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뜻인지도 모른다.

대부! 이거 쌀 한 가마인데 지고 일어서기만 하면 대부한테 다 줄게 져 봐유.”

정말 주능규? 딴 소리하기 없기유. 일어나기만 하면 되는 거지유?”

아이 증말유. 주구 말구유. 나이 더 먹은 사람이 왜 대부한테 그짓말을 하것슈?”

몇 말 더 지고 일어나면 더 줘유?”

아니 더 진다구? 더 줄게유. 걱정말구 지고 일어날 만큼 져 봐유.”

둘러보니 서너 말쯤 담긴 가마가 또 있었다.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번쩍 들어서 지게 위에 포개 얹었다. 그 위에 가방을 얹고 지게꼬리를 맸다. 가방을 매는 나를 보더니 두 청년의 눈빛이 의아한 빛으로 변했다.

일어서기만 하면 내 거니께 지고 가면 되는 거쥬? 지게는 저녁에 갖다 줄께유.”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하굣길이라 텅 빈 배에서 힘이 날 리 없었다. 그러나 한번 겨루어 보리라. 오른쪽 무릎을 꿇고 지게 작대기에 힘을 실어 45도 각도로 몸을 구부린 다음 어금니를 앙다물고 콧구멍으로 바람을 내 품었다. 지게는 한번 기우뚱하더니 앞으로 꼬꾸라질 듯이 몇 걸음 걸어갔다. 그러나 서너 걸음에 곧 균형을 잡았다. 그들의 놀란 눈동자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쌀 한 가마하고도 서너 말을 벌었다. 이제 내 것이다. 집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가다 지게를 내려놓으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일어서기도 했는데 이제는 발자국만 옮겨 놓으면 쌀은 내 것이다. 이 보릿고개를 쌀밥으로 넘을 수 있다.

대부, 대부! 아니 그냥 가면 어뜩햐?”

나이 많은 족손族孫의 애타는 부름을 뒤로 하고 한 50m쯤 걸었다. 하늘이 노랗다. 코에서 단내가 폭폭 난다. 장딴지가 터질 것 같다. 그래도 저 나이 많은 손자를 혼내 주리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아니 너무나 무거워서 몸을 돌릴 수도 없었다. 두 청년이 쫓아왔다.

아니, 정말로 짊어지고 가버리면 어떡해유.”

그래 맞아. 그만 일로 쌀 한 가마를 정말로 짊어지고 가면 어떡하나. 나는 이럴 때 어린 대부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정말 할아버지다운 기특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자리에 지게를 내려놓았다.

지고 갈규? 아니면 내꺼니께 우리 집까지 져다 줄규?”

어깃장을 한 번 놓고는 지게 위에서 가방을 내렸다. 나는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가방끈을 손가락에 걸어 어깨 너머로 늘어뜨리고 휘파람을 불며 돌아섰다. 사실은 그 쌀은 내 쌀이다. 계속 싸워서 내 것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참았다. 지금도 그 때 그 쌀이 내 것이라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사실이다.

족손族孫이나 나나 당시 쌀 한가마는 생명만큼 소중한 재물이었을 것이다. 나는 환갑이 넘어 그 족손을 지금도 만난다. 이제 칠순을 훌쩍 넘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지혜롭게 일해서 지금은 좋은 차를 굴리고 다닌다. 아마도 쌀 다섯 가마쯤은 주머니에 넣고 다닐지도 모른다. 나도 쌀 다섯 가마 값이 넘는 스마트폰을 노리개로 가지고 다닌다. 그러나 그 때 쌀 한 가마만큼 귀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족손은 지금도 그 일을 생각이나 하는지 모른다. 아마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농담처럼 말을 꺼내 볼까 했지만 체면 때문에 참았다. 얘기했다가 그가 자신의 체면 때문에 쌀 한 가마를 지갑에서 꺼내주면 큰일이다. 그는 기어이 주려하고 나는 받지 않으려 하면서 서로의 체면 때문에 다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인제 우리는 둘 다 쌀 한 가마가 체면을 가릴 만큼 아쉬운 형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이를 만날 때마다 그때 받지 못한 쌀 한 가마가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걸려 있다.

  (2015. 3.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