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 3월호 월평
수필 함께 읽기를 통한 이달의 수필 합평
월간 한국수필에서는 기존의 월평코너를 다른 형태로 시도했습니다.
3분(중진이상 .중진, 신인)의 각각 다른 감각을 기대하며 합평위원 한분이 맡은 매수( 200자원고지 7매)를 지켜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추천된 세편의 작품 총평, 질문취지에 적합한 평과 함께 문학 안에서의 순기능, 역기능, 특징을 분석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합평작품
1. 서현성 <간이역에서>
2, 류창희<빈빈>
3, 황로사< 썩지않는 낙엽>
합평위원
심영희(강원한국수필가협회 회장)
이방주 (서원대학교 수필강사)
박경옥 (미래수필 이사)
진행 권남희편집주간
1. 서현성 <간이역을 지나며>는 감동수필의 전형을 봅니다. 어려운 낱말을 쓰지 않고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글입니다. 문장력이나 구성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감동은 억지스럽지 않은 현장감에 있다고 봅니다. 감동적 글쓰기는 왜 어려운 것인지요.
2. 황로사 <썩지않는 낙엽>은 고령화 사회를 비유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사색하는 글이다.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다짐하고 있다. 사색하는 힘은 작가에게 중요하다. 상투적이지 않은 사고력을 갖추려면 생각하기 훈련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3. 류창희 <빈빈 >은 고전을 인용하여 작가의 의도를 밝혀보는 글쓰기이다. 이러한 형태는 고전에 많이 등장하는데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해도 자칫 교훈적으로 흘러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어떤지요.
4. 총평과 함께 굳이 평자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추천한다면 어떤 글인지요.
간이역을 지나며
서 현 성
기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갈 때는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그리운 어머니, 보고 싶은 바다, 그리고 항상 내 마음속에 한폭의 수채화처럼 남아있는 측백나무가 서 있는 간이역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해 봄은 진달래꽃이 유난히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이 되어 교실에 들어간 첫날부터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너도나도 수학여행은 언제, 어디로 갈 것인지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70년대만해도 시골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멀리 여행한다는 것은 수학여행 말고는 거의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수학여행 날짜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우리 반에서 유독 정자만이 갈 수 없다고 했다. 그 아이는 여수에서 꽤 떨어진 덕양이란 곳에서 기차 통학을 하고 있었다. 당시 몇 평 안되는 농사를 어렵사리 짓는 정자 아버지는, 아들도 아닌 딸을 멀리 여수의 학교까지 보낸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수학여행을 단순히 놀러 가는 것으로밖엔 보지 않는 터라 바쁜 농번기에 여행은 사치라고만 여겼다.
드디어 수학여행 가는 날이 왔다. 이른 아침, 역 광장에 모여 인원을 파악하던 반장이 다른 아이도 아닌 애자가 아직 안 왔다고 했다. 여행비가 확정되기도 전에 저금했던 돈을 찾아 나에게 맡겨놓고 날마다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애가 아니던가.
설마 오겠지 하는 사이에 발차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반 아이들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차에 올랐다. 서서히 기차가 움직이자 다른 반 아이들은 전송 나온 친지들에게 목청껏 인사하며 기뻐 어쩔줄 모르는데 우리반 아이들은 초조하게 차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일제히 아이들이 “애자가 온다.”하고 소리쳤다.
애자가 플랫폼으로 연결된 구름다리를 허겁지겁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차창 밖으로 거의 몸을 내놓은 채 “뛰어라, 애자야. 빨리 와.” 하고 야단들이었다.
기차는 점점 속력을 내었고 간발의 차이로 차를 놓친 애자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모습이 차츰 멀어져갔다. 안타까운 심정은 아랑곳없이 기차는 힘차게 기적을 울리며 비취빛 바다를 옆에 끼고 달렸다. 차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엄마섬, 아기섬 그리고 그 사이를 오가는 통통배는 너무나도 평화스러웠다.
즐겁게 가야 할 우리반 학생들은 모두가 우울한 채 맥이 풀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기차는 해변을 지나 여수와 순천 사이의 첫 번째 간이역인 미평에 들어서고 있었다. 풀이 죽어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선생님, 저기 좀 보세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믿을 수 없게도 애자가 가방을 휘저으며 기차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는 게 아닌가. 좀 전에 마치 자기들의 함성이 부족해서 애자가 차를 놓치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들은 거의 절규에 가깝게 “빨리 타 힘내, 애자야.”를 외쳐댔다. 상황을 파악한 옆칸 학생들, 그 옆 칸의 승객들까지 모두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고 응원하는 바람에 기차가 쓰러질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애자는 일분도 체 정거하지 않는 짧은 시간에 가까스로 내 손을 잡고 올라타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한참 울더니 간밤에 여행 가방이며 새 운동화까지 머리맡에 놓아두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밤새 잠을 못 이루다가 새벽녘에야 단잠에 빠져 늦었다고 했다. 바로 눈앞에서 친구들이 탄 기차를 놓치고 펄펄 뛰자, 마침 가족을 배웅나왔던 택시기사 아저씨가 지름길로 달리면 기차를 앞지를 수 있다고 안심시켜주면서 요금도 받지 않고 태워다 주었다고 한다.
기차는 언제 울고 언제 애태웠냐는 듯 노랫소리, 웃음소리를 싣고 두 번째 간이역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아이들이 또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정자가 왔어요.” 밖을 보니 못 온다던 정자가 노란 보따리를 들고 서 있었다. 정자도 드디어 아버지가 허락해서 자기 고향인 덕양역에 나와 기다리고 있구나 싶어 우리는 신이 나서 외쳤다. “어서 와, 정자야. 빨리 타.”
우리를 발견한 정자는 재빨리 승강구가 아닌 창문쪽으로 뛰어오더니 차창 너머로 손에 든 보따리를 건네주고는 쏜살같이 뒤돌아가 플랫폼에 서 있는 큰 측백나무 뒤로 숨어버렸다.
“어떻게 된 거지. 왜 안타는 거야?” 어안이 벙벙해 있는 사이에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점 기차가 떠나가자 정자는 숨어있던 나무 뒤에서 조금씩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정자가 까아만 점으로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다.
그를 데려가지 못한 것이 내 잘못인 것만 같아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그 때 반장이 보따리를 주며 “정자가 선생님 드리라고 달걀을 가져왔어요.” 했다.
그 애는 따끈따끈한 달걀을 품에 안고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차창 밖으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속 모르고 환호하는 친구들을 보고 얼마나 함께 가고 싶었을까? 나와 반 친구들이 잘 다녀오기를 바라며 달걀을 들고 기다려 준 정자. 나는 한동안 말을 잃고 있었다.
내가 말없이 엽서를 꺼내자, 아이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준비했던 엽서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정착역인 순천역 우체통에 넣었다. 여수를 떠나 두 군데 간이역을 거쳐오는 동안 우리반은 더욱 끈끈한 정으로 묶인 한덩어리가 된 셈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다시 여수역에는 한꺼번에 쉰 여섯통의 엽서를 받은 정자가 환한 웃음을 띠고 서 있었다. 그때 반 아이들이 그를 껴안고 팔짝팔짝 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도 그 간이역을 지나갈 때면 내 마음속에 가물거리며 멀어져 가던 정자. 언제나 단발머리 소녀로 남아 있는 정자가 측백나무 뒤에서 금방이라도 손을 흔들며 나올 것만 같아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리고 어디선가 ‘선생님!’하고 아이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환상에 젖는다.
이제는 내 품을 떠나 다들 어른이 되어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을 그들도 나처럼 이곳을 지나갈 때면 똑같은 감회에 젖어들겠지.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그리고 친구들과 선생님을 그리워하면서···.
삭막하고 메마른 일상에서 지치고 울적할 때, 문득 떠오르는 간이역의 추억은 내가슴에 잊을 수 없는 따뜻한 등불이 된다.
빈빈(彬彬)
- 문질빈빈(文質彬彬)
류창희
현의 선율이 곱다. 청실홍실의 금슬 현이다. 예전에 혼례에는 악(樂)을 연주하지 않는다고 했다. 관혼상제의 사례 중에 내가 주인공이었던 시간을 송두리째 넘겨주는 서운함이 크기 때문이다.
드디어 아이가 어른이 되는 날이다. 우리나라는 서양처럼 스무 살이 되었다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딸각!’ 부모 자식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사회구조다. 공자님 일대기에서조차 열다섯 살인 지학(志學)에서 스무 살을 빼고 바로 삼십이립(三十而立)으로 넘어갔다. 몸은 커서 어른이 되었으나 아직 어른행세를 하기에는 약하다고 하여 약관(弱冠)이라는 단어가 사전에 있을 뿐이다.
공자, 가라사대. “질(質, 본바탕)이 문(文, 아름다운 외관)을 이기면 야(野, 촌스럽고)하고, 문(외관)이 질(본바탕)을 이기면 사(史, 겉치레만 잘함)하니, 문과 질이 적당히 배합된 뒤에야 군자이다.”
子曰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 옹야편)
어찌 군자(君子)까지야 바라겠는가. *빈빈(彬彬)은 반반(斑斑)과 같으니, 서로 섞여 적당한 모양이다. 세련됨보다는 차라리 소박하여 조금 촌스러움이 낫다고 하는데 요즈음 세태가 어디 그런가. 내 나이 비슷한 여인들만 봐도 명품 치레에 얼굴까지 성형 수술과 시술을 서슴지 않으니, 젊은 내 아이들보고만 겉치레로 세련되기보다 꾸밈없는 바탕으로 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혼을 앞둔 아이들은 수중(水中)에서 식을 할거라고 했다. 하객으로 초대받으면 나도 산소통을 메고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둘이만 바다에 들어가 촬영했다. 그리고 학교에서 예식과 피로연의 예악(禮樂) 절차를 마쳤다. 결혼식 날 아들이 마이크를 잡고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제가 결혼을 하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할 만큼, 빛나던 시간을 어떻게 다 나열할까?
아들은 어려서부터 문(文)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튄다. 겉멋으로 특목고등학교를 선택했고,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강남거리를 지나가다가 차가운 유리건물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며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논현동의 플래툰 쿤스트할레(platoon kunsthalle)에 들어갔다. 말이 근사하여 작가이지 입에 풀칠도 어려웠다.
큰아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성인식을 치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즈음 시어머님이 병환 중이셔서 작은 아이처럼 블랙 초콜릿 케이크와 와인 한 잔 부어주는 약식의 향음주례도 갖추지 못하고 시기를 놓쳤다. 할 수 없이 *자(字)만 내려주었다. 나는 《논어》 옹야편의 문질빈빈에서 따온 ‘彬彬’으로 아이의 자를 지었다. 성호(星湖) 이익은 “사람은 이름으로 몸을 바르게 하고, 자로써 덕행을 표상한다.”하였다. 대부분 호(號)가 풍류와 해학적인 것과는 달리, 자는 근엄하고 실천적인 덕목을 담아 겸손한 글자로 짓는다.
예서체로 쓴 이름을 표구하여 아이 방에 걸어놓았더니 펄쩍 뛰었다. 그때 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었다. 차비가 없어 집에 오지 못할 정도의 빈 주머니와 책과 붓 사이에서 무엇을 잡을까 고심하는 빈손이었다. 그 당시 자신을 가난의 극치로 여겼다고 한다. 그날 이후, 하나는 ‘자유로운 영혼’ 적빈(赤貧)의 가난이고, 또 하나는 ‘선택한 가난’ 청빈(淸貧)의 빈빈(貧貧)으로 정했다고 한다.
아들이 ‘문질(文質)’이라면 며느리는 ‘사야(史野)’다. 세련[ ] 순박[野]의 ‘예술경영’ 학도다. 도드라지는 성품이 아들과 똑 닮은 거울이다. 단지 아들처럼 빼기의 디자인이 아니고, 더하기의 순수미술이니 스마트한 하트모양이다. 둘 다 기질이 뾰족하다. 그러나 위로 치솟는 열정이 그들에게 없다면, 어찌 첨단의 ‘끼’를 발휘하겠는가. 어미의 마음이란, 아이들의 인생이 조촐했으면 좋겠다. 아직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원석이다. 앞으로 오랜 기간 절차탁마의 노력을 하면 분명히 보석이 될 것이다. 빛나되 눈부시지 않기를, 너무 빨리 공중부양하여 가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챘을까. 아이들이 어미에게 축사를 청했다.
분리와 독립
우리 집의 울프와 니나의 혼사에 와주신 하객분들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귀하게 잘 키운 니나와 부족한 울프의 결혼을 흔쾌하게 허락해주신 홍남주 선생님 유재옥 여사님 사돈 두 분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희는 어제저녁에 서울에 와서 아이들을 만났는데요. 졸지에 덕담을 해달라는 바람에 외람되게 이 자리에 서긴 했습니다만, 누구를 더 덕 되게 할까요? 저희 아버님과 사돈댁 어른들 시댁어른들 남편의 친구분들 특히, 남편 김짝지님께 저만 혼자 뽑혀 죄송합니다. 혼자는 외로워 둘이랍니다. “여보, 나오세요.” 저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여자랍니다.(남편이 나와 옆에 섰다.)
저는 아들만 둘입니다. 이미 작은아들은 결혼했고요. 어쩔 수 없이 저는 시어머니 노릇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의 전제란 부모와 자식 간의 ‘분리와 독립’을 하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 열쇠는 어머니가 쥐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이 자리에 서서 벌벌 떨며 벌을 받도록 하는 것은 앞으로 너그러운 시어미가 되라는 의도적인 식순인 것 같습니다. ‘오라 가라, 해라 마라.’ 참견을 자제하겠습니다.
30년 동안, 진자리 마른자리 지켜 온 엄마의 특권, 이제 돌보미 어미의 자리를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남편하고 저하고는 오래전부터 늘 해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말입니다.
오늘 드디어 혼례를 치르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우리 울프와 니나가 어려서부터 키워온, 꿈꿔 온, 예술적인 끼를 잘 발휘하고 차츰차츰 성취하고 꿈과 일과 사랑을 병행하여 곱게 꾸려갈 수 있도록 저와 남편은 1등 후견인이 되자고 약속했습니다.
가족은 '붕어빵틀'이라고 합니다. 우리 부부가 잘사는 모습이 바로 모범 틀이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생활로 나라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힘껏 돕겠습니다. 정욱이의 이름처럼 바르게, 지혜의 이름처럼 지혜롭게 잘 살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 저희 부부는 30년 전 새신랑 각시의 초심으로 돌아가, 함께 손잡고 사이좋게 방방곡곡 꽃구경이나 다니겠습니다. 여러분 앞에서 부모·자식 간의 <분리와 독립을> 선언합니다.
분리와 독립은 탯줄을 끊는 것과 같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 결혼식과 동시에 그동안 아이들과 맺었던 SNS 페이스북, 트위터 친구를 끊었다. 결혼이 아이들의 선택이었듯이 아이 낳고 기르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이제야 비로소 결혼하는 아들 내외가 스스로 선택한 ‘빈빈’의 바통을 넘겨준다. 비록 물질은 가난할지라도 예술정신은 풍요로운 안빈낙도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 빈빈(彬彬) : 문채와 바탕이 함께 갖추어져 빛남이 아주 적절하여 조화로운 모양.
* 자(字) : 성인식冠禮〕 때 이름을 존중하는 뜻에서 자(字)를 지어주었다. 일제 강점기 단발령 이전까지 비록 천자나 제후라도 또한 반드시 20세에 관례를 했었다.
썩지 않는 낙엽 황로사 새해가 되었다. ‘새해인데 왜 이리 아무 것도 다른 것이 없지? 그냥 그러네’ 라는 서운한 느낌의 말이 들린다. 돌아가신 법정 스님은 새 천년이 왔다고 광화문 4거리를 막고 온 나라가 난리 법석을 치던 15년 전, ‘시작도 끝도 없는 세월에 새 것과 헌 것이 있는가... 아직도 인간은 멀었구나’ 라면서, ‘이런 호들갑은 숫자에 매달려 죽고 사는 서양의 물질문명에서 빚어진 유치한 발상이며 치졸한 놀이’ 라고 날카롭게 비판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족한 인간이 마음을 추슬러 다시 한 번 잘 해보자고 스스로 매듭을 지어 애쓰는 몸짓으로 나쁘지 않은 방법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긴 언제라고 해가 바뀌었다고 새로운 것이 있었는가. 시간은 늘 새 얼굴로 왔지만 그 시간을 맞는 나의 마음이 문제였다. ‘새해인데 그냥 그렇다’는 말은 이제 새해를 맞는 설렘도,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이루어보겠다는 의욕도, 올해는 꼭 이루어 낼 것이라는 희망도 사라졌다는 말이다. 무수히 반복해 온 일, 계획을 세우고 이루어내지 못했던 누적된 실패의 기억은 어느새 스스로 속는 일조차 포기하게 된 것이고, 그건 역시 살아온 긴 시간 탓이겠다. 습관처럼, 새해가 왔으니 주변을 좀 정리하고 무엇보다 버릴 것은 단호하게 모두 버려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던 차에 예정에 없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따뜻한 나라였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고 낮으론 긴소매 티셔츠면 딱 좋은 기온. 딸과 사위, 손자와 함께하는 여행은 행복했다.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은 없이 돌봄을 받기만 하는 입장은 편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그 상황은 순간순간 편안함과 더불어 남편과 내가 이젠 쓰일 모 없는 갈 데 없이 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해주었다. 어리다, 젊다, 늙다, 라는 형용사와 동사에 ‘이’ 자를 붙여 사람을 지칭하는 말, 어린이,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와 젊은이라는 말에선 느낄 수 없는 묘한 멸시와 하대와 동정의 느낌이 늙은이라는 말에선 진하게 풍긴다. 함께 다닌 수많은 여행 중 한 번도 몸에 탈이 난 적 없이 즐겁고 씩씩하게 다니던 남편이 속이 안 좋다며 끼니를 거르고 난생 처음 소화제를 먹었다. 한 쪽 귀의 기능이 많이 떨어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자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 안쓰러움을 지나쳐 가슴을 막히게 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 5월 영국의 코츠월드 지방에서 나 역시 여행길에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병치레를 톡톡히 한 적이 있다. 결국 나는 타이페이의 지하철에서 대만의 젊은 여인이 양보하는 자리에 어색하게 앉으며, 우리의 실상을 깨우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거야 늙었다는 걸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셈이 아닌가. 하기야 미루고 미루다 연말에 받은 건강진단 결과에서 나의 키가 약간 준 것을 이미 확인한 터다. 사람은 시간과 함께 먼 길을 휘적거리며 다니다 결국 ‘돌아간다’지만, 직립보행 하던 내가 인류의 발달사를 거슬러 척추를 꼿꼿이 세워 뛰어다니는 ‘호모 에렉투스’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나 하고 씁쓸했었다. 한 견과류와 함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대한민국의 항공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3그루의 감나무 아래 수북이 쌓아 놓았던 낙엽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쌓아두면 어느새 바수어지고 흔적 없이 사라져 흙과 한 몸이 되어 새싹에 양분이 되던 낙엽이, 언제부턴가 썩지 않고 버티며 움터 나오는 새싹을 견고하게 덮으면서 힘겹게 한다. 산성비 때문이건 몇 차례씩 뿌려지는 농약 때문이건 썩지 않는 낙엽을 치우는 것은 겨울의 큰 일거리가 되었다. 65세 이상이 인구의 7% 이상이 되면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것이라는데, 한국은 이미 2000년에 그 선을 통과했다. 60세 정년 이후 할 일 없이 수입 없이 20년을 더 살아야 하는 노년층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유년층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청장년층, 다음으로 노년층이 가장 적은 안정적인 피라미드 구조는 무너져버렸다. 그건 경제 활동 인구 1인당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된다는 말이다. 고령화 사회엔 나이 들어가면서 꼭 필요한 것에 대해 많은 정보와 충고의 말들이 있다. 건강, 돈, 친구는 물론,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들이다. 육체적 경제적인 것은 말 할 필요 없는 생존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그 기본 조건이 견디어낼 만할 때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할 ‘일’이다. 혹자가 주장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하는 것이 노년을 살아내는 현명한 대안’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이 어디 흔하냐는 말에는 말문이 막힌다. 일은 경제적인 상황을 개선해주면서 외로움을 덜어주고 생기 있는 삶을 살게 한다. 떠나는 그 날까지 생기 있게 사는 삶, 그건 누구나가 소망하는 일이다. 평균 80세의 어버이 연합’을 이끌어가고,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단체가 유지되며, 사안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유 없이 어떤 일에나 나서서 태극기 흔들며 환호하는 ‘엄마부대 봉사단’을 존속시키는 것은 생기 있게 살고자 하는 소망에 무시할 수 없는 경제적인 필요가 맞물린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으로서, 석연치 않은 과장된 모습을 보는 마음은 민망하다. 긴 시간을 살아오며 많은 것들을 겪어 온 사람으로서, 자식을 잃고 절규하며 차가운 거리에 나와 앉을 수밖에 없는 상처로 가득한 가슴에 비수를 박는 동년배의 행동을 보는 것은 더욱 불편하다.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온기를 잃어가는 이 각박한 세상에 따뜻함의 불씨를 지켜내는 일을 나이 든 사람이 할 수 없다면, 대체 그 긴 시간 동안 우리가 겪어온 아픔, 슬픔, 극복, 어렵사리 이루어낸 용서와 사랑의 기억, 경험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인생의 겨울이다. 나 또한 싱그런 잎이었고 애쓰며 작은 꽃을 피웠으며 나름의 열매도 맺었지만, 이제는 뼈를 드러내며 홀로 선 잎 떨군 나무의 아름다움을 보여야 하리. 썩어가는 낙엽의, 좋은 것의 마지막까지 대지로 돌리는 순응과 겸허함, 새싹 위로 불어오는 바람을 적당히 막아주는 그 따스함을 배워야 하리라. 생기 있는 삶을 원하지만 나 여기 있다고 악쓰지 않으며 바수어져 흙으로 가는 것을 억울해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일이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다니엘서 13,52)’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뜨끔하지 않으려면. <3월호 합평 자료> 3호 합평자료 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서원대 수필창작교실 강사) 1. 서현성 <간이역을 지나며>는 감동 수필의 전형을 봅니다. 어려운 낱말을 쓰지 않고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글입니다. 문장력이나 구성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감동은 억지스럽지 않은 현장감에 있다고 봅니다. 감동적 글쓰기는 왜 어려운 것인지요. 양식을 불문하고 문학 작품을 대할 때 흔히 ‘가독성과 흡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낯설게 하기’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을 오해하면 낯설게 하기를 했는데 어떻게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쉽게 읽어지는 작품이 어떻게 문학적 긴장감을 가질 수 있느냐고 반문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쉽게 읽히면서도 얼마든지 문학적 긴장감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서현성 수필가의 작품 <간이역을 지나며>는 우리 민족이면 누구나 그리워하는 향수를 진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공간적 향수의 대상인 고향과 시간적 향수의 대상인 과거를 간이역이라는 소재로 응결하여 일단 독자를 잔잔한 정서의 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향수를 소재로 한 수필 작품은 일단 기억의 재생에 성공해야 독자를 끌어 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자신의 기억을 독자의 기억의 세계에 뚜렷하고 인상적으로 재생시키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지요. 이때 중요한 것이 수필적 상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필이 사실의 문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추억을 있는 그대로만 서술한다면 독자를 끌어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작가의 기억을 현장감 있게 상상해서 문학적으로 재구성해야 합니다. 사실과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문학에서 수필적 상상은 반드시 필요한 형상화 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애자’와 ‘정자’에 대한 두 기억의 삽화를 병렬구조로 배치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두 제자의 모습이 생생하고 현장감 있게 재생되어 마치 읽는 사람이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큼 인상적입니다. 두 개의 삽화가 간이역의 기억으로 수렴되면서 아름다운 인간관계라는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자’의 이야기 삽화에서 작가가 엽서를 꺼내자 제자들이 모두 엽서를 꺼내어 정자에서 편지를 쓰는 장면은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기는 하지만, 다소 작위적인 면이 있어 독자의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것이 체험한 사실이라면 허구로 오해 받지 않을 만큼의 형상화 기술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감동적 글쓰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쉽게 읽히면서도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있으며 감동에 젖게 하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추억을 소재로 할 때 지나치게 감상에 젖어 삶의 의미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수필문학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이야기로 끝나버릴 수 있음을 누구나 유념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2. 황로사 <썩지 않는 낙엽>은 고령화 사회를 비유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사색하는 글이다.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는 마음가짐을 다짐하고 있다. 사색하는 힘은 작가에게 중요하다. 상투적이지 않은 사고력을 갖추려면 생각하기 훈련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자연은 수필가에게 인생의 섭리를 일깨워줍니다. 수필이 우리네 철학적 사색을 표현하는 문학 양식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변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발견하는 의미도 자연의 변화에서 더욱 짙게 깨닫게 되나 봅니다. 황로사 수필가의 작품 <썩지 않는 낙엽>은 일상의 일을 자연에서 터득하는 사색적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령화 사회를 썩지 않는 낙엽을 보면서 섭리를 발견하는 것으로 사색이 시작됩니다. 작가는 자연이나 인간이나 순조로운 순환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데, 산성화로 썩지 않는 낙엽이 쌓인 것처럼 고령화 사회가 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생산성 없는 고령화 사회가 되는 것을 걱정하면서도 막상 생각이 자신의 가족에 이르러서는 건강을 챙겨 장수를 기원하게 되고, 보다 젊게 살려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삶의 지혜를 추구하게 됩니다. 작가의 사색은 결말 부분에서 자신이 피운 삶의 꽃을 돌아보며 잘 썩는 마지막의 모습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르고 있습니다. 수필이 철학적 사색을 토로하는 문학양식이라면 철학적 사색의 방법을 생각하게 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사색이라면 작품성을 기대하긴 어렵겠지요. 그렇다고 훈련을 통하여 법칙대로 사색한다면 더욱 상투적인 인식이 될 것입니다. 독서로 배경지식을 확충하고, 삶에 대한 심오한 철학을 바탕으로 자연이나 일상에서 삶의 진리나 의미 있는 삶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황로사 수필가의 작품 <썩지 않는 낙엽>은 구성이 다소 산만한 감이 있지만, 썩지 않는 낙엽을 보면서 반어적으로 생기 있게 잘 살다가 잘 썩어 자연스럽게 대지로 스며드는 자신의 삶을 기대하는 독창적인 인식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3. 류창희 <빈빈>은 고전을 인용하여 작가의 의도를 밝혀보는 글쓰기이다. 이러한 형태는 고전에 많이 등장하는데 현대적인 요소를 가미해도 자칫 교훈적으로 흘러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어떤지요. 대개 고전이나 문화재 등 인류 역사의 유물을 소재로 선정했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작가 자신을 투영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논어 같은 삶의 교훈을 일깨우는 고전일 경우 자칫 교육적 해설이나 도덕 교과서 같은 글로 빠지기 쉬울 것입니다. 또한 문화재를 소재로 택했을 경우에도 대상의 예술성이나 희귀성 같은 것에 빠져들어 공자의 ‘사무사思無邪’란 말에서 설명하는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는 절제를 놓치기 쉽게 됩니다. 그래서 대상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는 것이 문학적 긴장감을 조성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류창희 수필가의 작품 <빈빈彬彬>은 고전에 자아를 투영하는데 성공하여 작가의 의도를 들키지 않고 전달하였습니다. 오히려 ‘빈빈彬彬’이라는 논어의 가르침을 일상에서 쉽게 깨우치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에 드러난 자아 투영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자식의 혼인식에 즈음하여 자신이나 자식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돌아보았습니다. 서두에서 혼인의 일반적 의미를 간략하게 진술한 다음, 논어 옹야편의 ‘빈빈彬彬’을 고전적 어조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혼인하는 아들 부부의 성품을 ‘빈빈彬彬’의 의미에 투영했습니다. 아들의 ‘문질文質’과 며느리의 ‘사야史野’의 조화를 자랑하지 않으면서 넌지시 알려 주어 독자를 흐뭇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첫 문장의 “현의 선율이 곱다. 청실홍실의 금슬琴瑟 현이다.”로 되돌아가 주제를 강조하였습니다. 거문고와 비파의 현에서 소리가 잘 어울린다는 고사를 설명하지 않고도 아들 내외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부부가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새 출발하는 부부의 금슬까지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 자식을 가진 독자를 감동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빈빈彬彬’과 아울러 ‘분리와 독립’까지 선언해서 자식에 대한 교육적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대할 때 인용이 많은 구성 때문에 다소 당황하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논어를 인용했고, 그리고 결혼식에서 ‘분리와 독립’이라는 축하의 말씀이 삽화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면 논어는 고전적 어조로 인용하고, 축하의 말씀은 현장감 있는 일상 어조로 인용하여 고전에 자아의 투영이라는 면에서 성공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수필의 요건이라는 교훈성을 들키지 않고 독자에게 전달한 작품이라고 봅니다. 고전적 텍스트에 대하여 독창적인 착상이나 구성이 예술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문장이 한두 곳 발견됩니다. “우리나라는 서양처럼 스무 살이 되었다고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딸각!’ 부모 자식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사회구조다.” 는 자칫 서양도 부모자식 관계를 끊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고, “홍남주 선생님 유재옥 여사님 사돈 두 분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는 객체와 서술어의 호응이 되지 않습니다.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훌륭한 작품에서 옥에 티라고 생각되어 말씀드립니다. 4. 총평과 함께 굳이 평자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추천한다면 어떤 글인지요. 세 작품 모두 훌륭한 작품이지만 굳이 한편을 선택한다면 고전이라는 쉽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 작가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투영하여 탄탄한 구성과 문장력으로 성공한 류창희 수필가의 <빈빈彬彬>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