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비암사에는 비암이 있다

느림보 이방주 2013. 12. 5. 22:06

비암사에는 비암이 있다.


사람들은 운주산 비암사에 가면 배암이 있다고 믿었다. 새벽마다 뱀 굴에서 뱀이 총각으로 변신하여 내려와 탑돌이를 하면서 사람으로 변하기를 발원했다는 전설까지 전해지면서 비암사를 뱀절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배암[]’ 아니라 비암碑岩으로 확인 된 것은 50여 년 전 일이다. 1960년 부근의 쌍류리에 거주하는 한 대학생에 의해서이다. 그의 예리한 관찰력에 의해 1300여 년 간이나 감추어진 비암사의 비밀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의 상륜부에 일반적으로 복발이 있어야 할 부분이 특이하여 의문을 제기하여 조사하게 되었다. 그 결과 3개의 불비상을 찾아내었다. 즉 국보 제 106호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石像, 보물 제 367호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名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 보물 제 368호인 미륵보살반가석상彌勒菩薩半跏石像이 그것이다. 이 부처님을 부조한 석상들은 작지만 모두 비석 모양이라 불비상이라고 부른다. 불비상은 매우 특이한 불교 예술품이고 또 연기지역에서만 발견된다. 제작 시기가 백제가 멸망한 뒤 13년 뒤인 673년부터 689년까지 약 15,6 년간이라고 한다. 백제 부흥운동 과정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으며 알아갈수록 백제의 최후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내게 불비상이 넌지시 일러주는 것은 매우 많았다.

비암사에서 전시용 불비상을 보았지만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국립청주박물관에 갔다. 박물관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얇은 내 상식으로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허락을 받고 학예사 한분을 모시고 가서 촬영을 했다. 박물관에서 볼 수도 있지만 사진을 모니터에 확대하여 두고두고 보고 싶었다.

우선 국보로 지정받아 제일 전면에 전시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을 들여다보며 보시한 전씨를 생각해 보았다. 총 높이는 43cm, 두께는 26.7cm인 부처님이 부조된 비석모양 돌이다. 전면과 배면 그리고 옆면에도 그림이 있다.

전면에는 이름대로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부처님이 연꽃 자리 위에 설법인으로 가부좌를 틀었다. 몸에 두른 법의 자락이 무릎을 덮었고 주름은 실제처럼 자연스럽다. 주름 사이로 실에 꿴 구슬(연주)이 보이고, 머리에도 연꽃과 연주가 아름답다. 본존불 좌우에는 보살인지 인왕인지 나한인지 칠존상이 반듯하게 서서 아미타 부처님을 호위하고 있다. 아마도 뒤에서 상반신만 내보이는 상은 나한상인 듯싶다. 아미타부처님의 왼쪽에 3위 오른쪽에 4위가 대죄보다 조금 높은 연꽃무늬 자리에 서 있다.

아미타 부처님의 뱃머리 모양 광배는 2중으로 되어 있고 칠존상의 광배는 따로 원광으로 되어 있다. 뱃머리모양 이중 광배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모양의 불상과 비천문상을 새겨 놓았다. 아미타부처님 연꽃자리 옆으로 사자상이 호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연꽃무늬 대좌 위에 조각되어 있어서 화려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하도 아름다워서 백제 금동대향로를 생각나게 한다.

배면은 4등분하여 단마다 5위씩 모두 20위의 불상인지, 중생인지, 전씨의 조상인지를 새겼다. 흉부와 여백에 잘게 새긴 글자들은 읽기 어렵다. 관명과 인명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측면에는 주악을 하며 승천하는 주악비천상이 새겨져 있는데 연주 악기는 생황도 있고 비파 피리 거문고로 보인다. 여기에도 역시 작은 글씨들이 있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의 계유년은 백제가 멸망한지 13년 만인 673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새겨 넣은 글자에 의하면 당시 연기 일대의 백제 유지 전씨라는 사람이 비암사를 세우고 백제 역대 국왕과 대신들, 칠세부모와 전쟁으로 죽은 백성을 위하여 절을 짓고 발원하였다고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인명과 관명이 백제 멸망 전의 것으로 알려져 백제사 연구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토신앙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지향하는 신앙이다. 연기 지역 일대의 사찰에서 발견되는 불비상은 백제 멸망과 부흥운동 과정에서 겪은 지역 민중의 고통을 담고 있다. 전씨를 비롯한 민중의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연기 지역 대부분 사찰에 아미타부처님의 불상이 조성되었을까? 모두가 아미타정토신앙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애잔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통 받은 민중의 극락왕생을 빌고 또 빌었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三尊石像)

 

국보 제106, 초기통일신라(673)시대, 총높이43Cm 두께26.7Cm,

현재 국립 청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래 비암사에는 3위의 비상(碑像)이 전해 왔다. 이것을 19609월에 발견 조사하여 모두 국보, 보물로 지정하고 국립박물관으로 이관, 보존하였는데 이 석상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상이란 석비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비상이 3위나 있었으므로 碑岩寺라는 사명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삼존석상은 옥개(屋蓋) 대좌(臺座)를 잃고 신부(身部)만이 남아 있다. 전면에는 大形의 주형광배(舟形光背)를 지닌 군상(群像)이 조각되었으며 중앙에는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이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였는바, 의단은 밑으로 내려 대좌의 반을 덮고 의습(衣褶)은 좌우 대칭으로 표현했으며 통견(通肩)한 법의를 비롯해 습벽(褶襞)사이에 연주(連珠)가 장식되어 있다. 수인은 설법인(說法印)이고 삼도(三道)는 없는 듯하며 머리에는 연화(蓮華)와 연주(連珠)로 장식된 원형두광(圓形頭光)이 있다.

본존상 좌우에는 각각 1위의 보살입상과 인왕입상이 모두 유경련화좌(有莖蓮華座) 위에 직립하였으며 본존과 보살 사이에 각 1위의 나한 상반신 만이 표현되었다. 모두 칠존상이 조각되었는 바, 이들 칠존상은 모두 다시 하부에서 대판중엽(大瓣重葉)의 연화좌(蓮華座)에 이중으로 실려있으며 연화좌와 각 상 사이에는 상대하는 장신의 사자(獅子) 2가 새겨졌다. 광배하는 화불과 비천상이 조각되어 화사하다.

양 측면에는 좌우 양쪽 끝에 원주형을 표현하고 4좌의 연화좌에는 모두 같은 양식의 천부 진악상(秦樂像)을 끊어 앉혔다.

뒷면은 4단으로 등분하되 3조의 구선대(構線帶)로 나누었다. 그리고 각 단마다 5위의 좌상을 병열하여 합계 20위를 배치하였다. 각 상은 모두 같은 형태로서 연화와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을 갖고 있으며 양손은 수중공수(袖中拱手)하였고 흉부마다 전면의 본존상과 같이 자를 새겨 놓았다. 그리고 각 상간지(像間地)마다 오른쪽 상측에 1행으로 관명과 인명을 기각(記刻)하였으니 이것은 석상 조성을 발원한 향도 중 주요 인물 20명의 승속들일 것이다.

이 비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명문에 새겨진 것으로 전면 하단에 14,14자의 주문을 비롯하여 양 측면에 세자각명(細字刻銘)이 있는 바 이것은 씨일가의 발원인 것이다. 조각에 있어서 양 측면의 진락상은 연대가 가장 오랜 석상일 것이며 명문의 계유년은 신라 문무왕대(661-680)로 추정된다. 이 명문에는 백제시대의 대성인 전씨·진씨·목씨가 나오고, 절을 짓고 석상을 발원하게 된 이유를 國王大臣 及 七世父母 含靈等 願敬造寺智識明記 (백제의 역대국왕과 대신들, 칠세부모와 전쟁으로 죽은 백성 등을 위하여 발원하여 그들을 모시는 절을 짓고 석상을 만들었음을 명기한 것)” 이것은 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 중의 하나로 달손 신차와 같은 백제의 관등명과 진무대사’, ‘상차내말과 같은 신라의 관등명이 동시에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가 백제를 통일한 직후(백제가 멸망한지 10년 되는 해인 계유년-서기 673-)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비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의 유력자인 전씨가 발원하여 이룩한 것으로 짐작된다.

비신에는 연꽃 주악비천상 및 생(), 비파(琵琶), (), (), () 등의 악기가 보이며 비천상 밑에는 용머리를 양각했다. 이러한 모습은 백제금동대향로의 연꽃, , 주악상 등의 배치와 유사하다.

저면(底面)에 장방형의 촉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면 대석을 만들어 상면에 장방형 구멍을 파고 이 촉을 삽입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비암사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己丑名阿彌陀如來諸佛菩薩石像,보물제367)

 

보물제 367,

통일신라초기(689)시대, 총높이 56.9Cm,

현재 국립 청주박물관 소장

 

19609월에 발견 조사된 비암사의 3비상 중 하나로 제일 큰 석상이다. 주형광배(舟形光背)와도 같은 형태의 석촌(石村)인데 조각은 오직 전면에만 새겨졌고 배면에는 4행의 명문이 있을 뿐이다. 또 이 석상의 두께가 위로 올라가면서 얇아지고 곡면을 이룬 것은 이와 함께 비암사에서 발견된 2개의 석상과 서로 다른 점이다.

이 석상 또한 군상을 전면에 가득히 조각하였는데 다른 것보다도 도상적(圖像的)인 모습을 지니고 있어 한 폭의 변상(變相)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마치 아미타경에 보이는 극락세계의 장면을 그대로 이 석상에 부각시킨 것 같다.

하단에는 단판(單瓣)의 연화좌가 돌려져 있으며 그 위에 난간과 보계(步階)가 만들어졌고, 다시 그 위에는 연못이 있는데 파장문(波狀紋)으로써 수면을 표현하였다. 난간 좌우에는 사자(獅子)가 상대하고 있으며 보계(寶髻)의 좌우에는 연꽃 위에서 합장하는 화생(化生)을 새겼다. 바로 이 연못 중앙에서 큰 연꽃이 솟아났고, 그 곳에서 분기(分岐)된 연화좌의 중앙에는 본존이 앉았으며 좌우에는 직립한 여러 불상이 나열하고 있어 엄격한 좌우 대칭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중앙의 좌상은 유달리 크게 조각하였는데 통견의(通肩衣)를 걸쳤으며 내계(內髻)가 있고 오른손은 또렷하지 않으나 왼손은 만자(卍字)를 새긴 가슴 아래에 들고 있다.

본존 좌우의 보살상은 긴 몸에 본존과 같은 둥근 두광(頭光)을 가졌으며 보관(寶冠)과 장엄구를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그리고 이들 보살과 본존사이에는 나한상 각 1위씩을 조각하였는데 상반신만이 표현되었다. 보살상 옆으로는 입상 각 1위가 한 손을 들어서 천궁을 받들었으며, 다시 그 위로는 주선을 따라 화불보다도 큰 좌상 7위를 배치하였다. 이 같은 작은 불상 사이에는 큰 나무의 가지와 잎이 표현되었으며 이를 덮고 연주(連珠)와 영락이 사이사이에 섬세하게 조식(彫飾)되어서 장관을 이루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경문에 보이는 극락정토의 세계일 것이다.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4행의 명문이 있다.

 

己丑年 月十五日

此爲七世父母及□□□

□□阿彌陀佛諸佛菩薩像

敬造



 

비암사 미륵보살 반가석상(보물제368)|

 

이 석상은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보다도 년대가 다소 뒤져서 신라 신문왕9(689)년으로 추정되는 바, 이들 고대 석상이 같은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삼고 있으나 서로 형태와 표현이 다른 점은 주목해야 할 것이다.

 

보물제368, 통일신라초기시대,

총높이 40Cm,

현재 국립 청주박물관 소장

 

비암사에서 발견된 3비상 중 가장 작은 것으로,4면에 모두 조각이 있으나 전면이 위주임은 다른 석상과 같다. 위의 옥개(屋蓋)와 아래 대좌가 모두 한 돌로 조성되고 네 귀에는 둥근 기둥 모양을 새겨서 감실(龕室)을 표현하였다.

, 후면은 T자형을 이루었으며 측면은 위로 올라가면서 좁아지고 있다. 전면 중앙에는 보살좌상 1위만을 전면에 가득히 조각하였는데 방좌(方座)에 앉아 왼쪽 다리는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위에 얹어 이른바 반가좌를 취하였으며, 오른손은 들어서 턱에 대어 이른바 사유형(思惟形)을 보이고 있다. 보관(寶冠)을 쓰고 목걸이,두광 등 장엄구를 갖추었으며 천의는 두 팔에 걸쳐서 길게 대좌에 이르고 있다. 머리 위에는 천개(天蓋)가 새겨졌고 다시 그 위에 보주와 영락이 장식되었다. 하면은 주형을 이루었으며 그 중앙에 둥근 화병을 놓고 그 좌,우에는 꿇어 앉은 인물상을 배치하였는데, 기물로 미루어 승려와 공양상으로 보인다.

위에는 수엽(樹葉)이 얽힌 지붕이 있고 그것을 받치는 가늘고 긴 원주의 주기둥과 중간에는 꽃무늬로써 장식하였다.

측면에는 좌,우에 각기 같은 모양의 연화좌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1위씩 조각하였는데, 머리 정면에 보탑이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둥근 보주를 들고 있다. 천의와 치마의 양식은 전면상과 같으며 하면에는 또한 꿇어앉은 공양상 1위가 새겨졌다. 이들 보살입상이나 그 밑의 공양상이 모두 전면을 향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같은 점에서 전면의 반가상을 주존으로 삼아서 삼존형식을 의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후면은 전면과는 달리 곡면을 이루었는데 조각은 매우 간단하여 1기의 보탑을 가득히 조각하였다. 이 탑은 2단의 기단이 있으며 그 위에 타원형의 탑신이 마련되고 다시 그 위로는 평판을 놓아 大小 3기둥의 상륜(相輪)을 장식하였다. 이 같은 모양의 탑형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랜 것이라 하겠는데, 이같은 탑을 후면에 새긴 것은 전면에 새겨진 주존상과의 관계에서 그 존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석상은 삼국시대에 유행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삼아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위중한 유품이며, 소형이기는 하나 손상이 없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4면 석상에 있어서 정면의 보살은 측면의 두 상과 더불어 미륵삼존으로서의 조형양식을 보이는 것이며, 후면의 보탑은 미래불로서의 미륵보살의 표상을 새긴 것으로 해석된다.

이 미륵반가석상의 조성년대는 각 부분의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서 함께 발견 조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과 같은 673년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멸망한 후 멀지 않은 시기에 그 영역에서 조성된 이들 석상은 통일신라보다는 오히려 백제의 석조미술을 오늘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지역적으로 보아 이곳 연기군 일대가 백제 고토 중에서도 고도인 공주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그 조성시기가 백제 멸망 직후이기 때문이다.

 




<해석>

정토신앙은 많은 죽음을 경험한 후 유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토신앙이 지역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은 그러한 경험은 특정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7세기 후반, 충청남도 연기 지방에서도 그러한 경험을 겪은 모양이다. 아미타불의 정토신앙과 관련되는 불상이 많이 조성된 것을 보면, 그러한 상황을 추측할 수가 있다. 1960년대에 이 지역에서 발견된 몇 개의 존상은 모두 정토신앙과 관련된다. 이들 상은 신라의 67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689년까지 이어진다. 물론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미타정토신앙이라는 같은 분위기에서 조성된 것임은 틀림이 없다.

이곳에서 발견된 불상들은 모두 비석 형태의 돌 네 면에 불상을 조각하고 명문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불비상(佛碑像)이라고 부르는 이 형식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특징이다. 비록 660, 백제가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이들 불상은 편년 상 신라시대의 것으로 간주되지만,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높이 43cm, 27.6cm, 두께 17cm)의 명문에 보이는 백제의 관직명과 대표적인 백제 성씨인 전씨(全氏)를 통하여 백제 불교 신앙의 전통을 여전히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판독이 가능한 166자의 명문에 의하면, 불비상은 673415일에 국왕과 대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병합 과정에서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의 극락정토왕생을 기원한 것 임에는 틀림이 없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에는 정면의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과 4존의 비구상, 2존의 금강역사상이 조각되어 있다. 양 측면 위 부분에는 극락정토를 표현한 듯 각각 4존의 기락천(伎樂天)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정면 쪽을 향하고 있는 용이 새겨져 있다. 불비상의 뒷면에는 20존의 불좌상이 같은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일본의 [부상략기(扶桑略記)]에 의하면, 이미 백제 성왕(聖王) 때인 552년에 아미타불상과 관음보살상, 세지보살상 등 금동삼존불을 일본에 보내 왔다는 기록이 있어서 백제에서의 아미타정토신앙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유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명문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표현한 것이라는 것은 같은 지역의 비암사(碑巖寺)에서 발견된 신라 689년에 조성한 기축명(己丑銘) 불비상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아미타불상과 권속(眷屬, 따르는 무리)들은 극락정토 연못[보지(寶池)]의 팔공덕수에서 피어난 연꽃 위에 표현되어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한 표현이다.

 

본래 연기군 전의면 산 속의 비암사에는 3위의 비상이 전해 왔다. 이것을 19609월에 발견 조사하여 모두 국보·보물로 지정하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관, 보존하였는데 이 석상도 그 중의 하나이다. 석상이란 석비의 모양으로 조성한 불상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비상이 3위나 있었으므로 비암사라는 사명이 붙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상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전면 하단에 14, 14자의 주문을 비롯하여 양 측면에 세자각명이 있는 바, 이것은 전씨일가의 발원인 것이다. 조각에 있어서 양 측면의 주락상은 연대가 가장 오랜 석상일 것이며 명문의 계유년(癸酉年)’은 신라 문무왕대(661680)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비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의 유력자인 전씨가 발원하여 이룩한 것으로 추정된다. 저면에 장방형의 촉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면 대석을 만들어 상면에 장방형 구멍을 파고 이 하면의 촉을 꽂도록 하였던 것 같다. 총 높이는 40.3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