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정방사 유감 -스님과 박새-

느림보 이방주 2013. 10. 20. 22:53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된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어떤 조직이 싫으면 조직원이 조직을 떠나면 된다는 말이다. 중이 싫어진다면 절은 어떻게 해야 하나? 중이 싫어졌다고 절이 중을 퇴출시킬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금수산 정방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가장 아름다운 절을 좋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보여주고 싶어 그 먼 곳에 얼마나 드나들었는지 모른다. 이제 마지막이다.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친구 불온에게 정방사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이런 아름다운 절을 알고 있다는 것도 뽐내고 싶었다. 별로 바쁘지도 않으면서 바쁜 척하는 불온을 달래어 정방사에 가기로 약속했다.

 가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을 왔다가 무엇을 남기고 떠나가는지 보고 싶다. 가을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제 할 일을 다 해놓고 우리 곁을 떠난다. 아무도 가을에게 요구하지도 않으니 아무도 가을이 한 일에 치하를 보내지 않는다. 그래도 가을은 제 할 일을 다하고 간다.  그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가장 자연스럽다. 나는 일부러 이런 가을의 모습이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부흥리에서 굴티재를 넘어가는 길가에 생명들은 가을의 입김에 흠뻑 젖어 있다. 싸리나무 잎새마다 가을 냄새가 노랗게 묻었다. 연풍에는 사과나무 마다 가을의 색깔에 물들었고, 송계로 넘어가는 지릅재를 넘을 때는 솔잎 향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팔랑소에괸 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오감으로 가을을 감각한다. 계곡을 구불거리며 돌고도는 찻길에 가을이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 것 같다.

 

금수산 정방사

 

청풍에 도착하니 가을에 취해 해찰을 부리느라 시장기를 느꼈다. 인심 좋은 어느 식당에서 버섯불고기로 식사를 하면서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나누어 마셨다. 나는 운전 때문에 입술에 칠하는 정도였고, 불온도 반병 정도는 남겼다. 그래도 공기가 맑으니 불온이 말할 때마다 차 안에는 소주향이 향긋하다. 청풍대교를 건너 능강으로 향하는 길에는 가을색이 더욱 짙다. 일부러 올린 것처럼 바위벽을 바르게 타고 올라간 담쟁이 잎사귀에 오후 햇살이 새빨갛다. 청풍호는 파란 하늘빛을 담고 있다. 호수가 커다란 그림책처럼 아름다운 산과 하늘과 바위로 색칠을 하고 있다.

 

                                         

                                                                        정방사에서 바라본 청풍호와 월악산 

정방사로 올라가는 외길에 차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제천시가 조성한 자드락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미움 받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주차장은 깊은 숲 속에 있다. 나무들이 하늘을 가렸다. 여기서 조그만 걸으면 하늘 확 열리고 온 사바세계가 다 내려다 보이는 모습을 불온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절 마당에서 바라보면서 멀리 월악 영봉 등마루가 하늘에 실선을 긋고 있는 모습, 영봉 넘어로 수만겹으로 겹쳐지는 산줄기의 아름다운 선을 여기서 보여 주고 싶었다. 산줄기가 빚어내는 골짜기마다 청풍호는 하늘 빛을 되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실눈으로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거룩한 관음보살을 바라보면서 불온은 얼마나 감탄할 것인가?

 

돌계단 옆에 설치된 삭도가 마음에 걸렸다.

차로 실어온 짐을 여기서부터 스님들이 등짐으로 져날라도 될 것을 삭도를 만들어 놓아 흉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안될까?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잘 넘어갔다. 돌계단을 밟고 겨우 오르니 절 마당에는 하늘이 마음껏 가을 햇살을 쏟아붓고 있었다. 불온은 여기서 내려다 보이는 월악과 청풍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원통보전에 관음보살님게 삼배를 올리고 나오니 스님이 휘파람을 불며 새를 부르고 있었다. 박새 두 마리가 주변에서 눈치를 보다가 스님의 손가락에 앉았다. 어느 방송사에서 왔는지 젊은 남녀가 이 광경을 촬영하면서 스님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산사에 수행하는 스님이 자연과 교감하는 신비스러운 모습에 반했다.

 

절집 뒤에 불끈 솟아 있는 바위는 원통보전을 한 입에 물어떼려는 듯이 달려 드는 모습이다. 그 아래 석간수를 한 구기씩 마셨다. 산 아랫마을의 찌꺼기가 저 아래로 마구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스님은 계속 새를 부르고 있었다. 탐방객들은 그 모습에 취해서 넋을 놓았다. 스님이 우리에게 소주향과 기름 냄새를 맡았는지 '우리 스님들은 자연 속에서 깨끗한 음식을 먹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과 교감을 하는데 속세 사람들은 소주를 마시고 기름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새들이 멀리 한다.'며 우리를 질책하는 듯했다. 잠시 부끄러웠다. 스님이 다시 휘파람을 불어 새를 불렀다. 박새 한 마리가 날아와 스님 엄지손가락에 앉았다. 박새는 스님이 손에 쥐고 있는 땅콩 한 알을 입에 물더니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새가 스님의 어깨에 앉아 노래라고 한 자락 불러 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땅콩만 물고 날아갔다.  

 

그것은 땅콩이었다. 박새가 날아와 앉아 준 것은 스님의 청정심이 아니라 바로 땅콩이 이유였다. '조건과 반사' '학습 효과의 실험' 같은 교육학 강의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어린시절 쑥부쟁이꽃 한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노래를 불렀다. "짱아야 짱아야, 여기여기 앉아라. 멀리멀리 가면은 똥물 먹고 죽는다." 그러면 빨갛게 익어 예쁜 고추 잠자리가 쑥부쟁이꽃에 날아와 앉는다. 그렇게 고추 잠자리를 잡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기를 계속하면 꽃이 없어도 잠자리가 내 손가락에 와서 앉는다. 땅콩을 주지 않아도 와서 앉아 있다가 날아가고 또 다시 날와와서 앉았다 날아간다. 완전한 교감이었다. 박새는 땅콩으로 학습된 것이다. 휘파람을 불어 스님의 손에 앉아 보면 사람들이나 먹는 고소한 땅콩을 먹을 수 있다. 휘파람, 땅콩은 조건이고 새가 날아오는 것은 학습 효과이다. 스님은 그렇게 박새에게 학습을 시켰다. 그것은 스님이 말하는 자연과의 교감이 아니라 고소한 땅콩과의 교감이다. 스님은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탐방객을 현혹시켰을까? 

 

종교가 타락하면 혹세무민이 된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잘 안다. 나는 불법을 모르는 초파일 신도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고 있는 한 사람으로 땅콩과 휘파람으로 순진한 새를 부르고 있는 스님의 모습에 절망했다. 새에게 땅콩을 먹이는 것도 그 아이가 자연 속에서 적응하는 노력을 포기하게 하는 것인데 그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 스님의 모습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 이때 갑자기 정경유착이라는 세속의 단어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스님은 염불에 입이 아프 것이 아니라 박새를 부르는 휘파람에 혀에 쥐가 날 것 같아 신도를 걱정시킨다.

 

지금까지 열 번도더 찾아 왔고 올 때마다 스님이나 공양주 보살님께 감동 받았는데 오늘의 탐방이 허무하다. 가장 존경하는 친구에게 가장 아름다운 절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나의 허망한 욕심이었나 보다. 저렇게 푸른 하늘, 장엄하게 뻗어가는 백두대간의 용틀임, 하얗게 빛나는 청풍호의 물빛, 이렇게 수려한 자연 속에서 어떻게 세속의 유착을 수행하셨는지 답답하다. 청정한 금수산 자락의 정결한 도량이어야 할 절집의 정랑에서 혹세무민의 구린내가 난다. 스님이 싫어지니 절까지 싫어지는 기분이다. 신도는 떠나는 수밖에 없다. 모든 것 다 뒤로 하고 돌아 내려오는 길에 다시 원통보전을 바라보았다. 부처님은 월악산만 바라보시는지 아직도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눈만 지그시 감고 계시다. 쏟아질듯 무너질듯 달려드는 바위벽이 으르렁거린다. 바위벽 위에 청정한 소나무 한 그루가 속세도 불계도 초월한 듯 참선에 들어있다. 

(2013. 10. 17.)